《116화》[외전] 이후의 이야기.
1.
탑은 사라졌고, 게이트는 더 이상 출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각성자는 여전히 존재하고 사람을 해치려는 괴수 또한 여전히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이 말은 결과적으로 헌터들이 당장 해야 할 일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5팀장님! 아니, 김신 씨!”
지금 나를 팀장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의 정체는 한설.
그녀는 병원에서의 일 이후부터 부쩍 적극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네. 왜, 왜요?”
한유성의 말 때문에 한설의 마음을 알고 나서 그것을 의식하기 시작하자 왠지 모르게 대화를 하기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대화를 할 때마다 심장이 좋은 의미로 쿵쾅거리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탑이 없어지고 난 후부터 팀장 자리를 내려놨으니 사실 팀장도 아니기도 하고.
“오늘은 어디로 가실 건가요?”
“흠, 아직 정한 게 없어서요. 혹시 추천해주실만한 장소라도?”
한설의 질문은 여행 장소다.
하지만, 말이 여행 장소지 사실상 아직 국토 대부분에 괴수들이 바글바글 하기에 토벌 겸 여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번에는 춘천 쪽으로 가볼래요?”
“춘천, 춘천이라...나쁠 거 없죠.”
“그러면 저는 준비를 좀 하러 가볼게요.”
“준비요?”
“명색이 여행인데 기분은 내야죠.”
“가면 토벌하느라 바쁠 텐데...”
“괜찮아요. 사람이 몇 명인데요. 물론 같이 가야 한다는 게 좀 걸리긴 하지만.”
단전을 폐하면서 내공은 못 쓰지만, 여전히 마법과 특성을 사용할 수는 있었기에 이제는 아예 전업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바꿨다.
그리고 그에 따른 파티원의 변경이 생겼는데.
기존에 있던 5팀은 내가 빠지면서 송인아 또한 덩달아 빠져버린 탓에 바빴지만, 정작 나는 별다른 구인 없이 파티원이 곧바로 생겼다.
“오빠. 나왔어!”
“저도 왔어요.”
가방을 내려놓으며 산뜻하게 인사하는 송인아와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태하윤.
탱커가 없는 스트라이커 3명에 근위 1명이지만, 전력면으로 보거나 임기응변이 필요한 상황에서의 전투를 생각하면 사실 기형적이지도 않은 조합이었다.
오히려 너무 세서 탈이지.
어쨌든 모든 사람이 모였으니 이제는 출발해야 할 때.
우리의 테마는 항상 그날 정해지기에 별다른 계획은 필요 없다.
애초에 대부분의 A급 괴수는 태하윤 홀로도 정리가 가능한 수준이니, 이 파티의 강력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굳이 입 아프게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준비하러 갔던 한설이 준비가 다 끝났는지 준비할 물건을 들고 오며 말했다.
“춘천하면 닭갈비! 준비는 넉넉하게 해두었으니 이제 출발하죠.”
“네, 가볼까요?”
한설의 말에 답하자, 송인아와 태하윤이 옆으로 와서 찰싹 달라붙었다.
하지만, 내 팔은 두 개고 사람은 세 명.
물건을 준비해 오던 한설이 그 모습을 보고 준비했던 물건을 내팽개치자, 나는 두 사람의 품에서 팔을 슬쩍 빼며 한설이 놓친 물건을 집어 들었다.
“물건은 제가 들 테니, 여러분은 따라오시죠.”
“히잉...”
송인아의 한숨이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
부웅!
이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고속도로.
여기까지 오는 것만 해도 벌써 1개월이 걸렸다.
“시간 참 빨리 가네요. 김신 씨를 만난 게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런가요?”
“저희의 첫 만남이 평범하진 않았죠.”
“하긴, 키클롭스를 상대하던 중에 지원이 온 것이었으니까요.”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로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태하윤.
나는 그 모습을 힐끗 보고서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탑의 소멸과 게이트의 미출현이 확실해진 이후 지구의 모든 국가는 다시 잃어버렸던 영토를 되찾는 작업에 착수했다.
헌터의 도움을 받아 도로에 방치된 차량들을 정리하고, 서울을 비롯한 각 대도시의 외곽을 점차 수복하고.
그 과정이 모두 끝나려면 땅덩어리가 작은 이 대한민국에서조차 5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헌터들은 앞으로 족히 10년은 더 일거리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 거다.
어쨌든 고속도로를 타고 쭉 올라와 도착한 이곳은 중앙고속도로의 톨게이트.
시내에는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은 곳이 많기에 우리는 톨게이트에서 차를 세워두고 도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직 사람이 살만한 환경이 아니기에 적막한 춘천의 석사동.
대로를 따라 걸어가며 물을 마시던 내게 옆에 있던 한설이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다.
“김신 씨. 그런데, 우리는 언제 사귀는 거죠?”
“풉! 콜록콜록.”
“괜찮아요?”
“아, 콜록! 괜, 괜찮아요.”
한설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한 이후, 옆에 있는 세 명의 여자들도 질세라 모두 자신의 감정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좋긴 한데, 너무 힘들다.’
연애하고 싶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세 사람이 날 좋아해 줄 줄이야.
사레 걸린 탓에 한참 동안 기침하던 나는 내 등을 두들겨주던 한설의 손을 조용히 끌어내리면서 그녀가 한 질문에 답했다.
“그 문제는 천천히 이야기하자고 했잖아요.”
“그래도. 빨리 대답을 안 해주시니까...”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내가 나쁜 놈이다.
세 사람은 각자 자신을 택해주기를 기다리고 있고, 나는 선택을 미루고 있었으니까.
근데, 솔직히 어떻게 선택을 하나?
누구 하나를 택하는 순간 세 사람과의 관계가 전부 틀어질 텐데.
“인아는 여동생 같은 아이고, 태하윤 씨는 제가 답답한 상황에 막혀있을 때 많은 도움을 준 은인이에요.”
“저는요?”
“당연히 한설씨도 갈 곳 없던 저를 수호길드에 들어갈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 은인이죠. 그러니까 솔직히 제 문제는 단순히 이성 간의 문제로 보기에는 조금 더 복잡한 이유가 있어요.”
그렇게 말하자, 조금 우울한 표정으로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한설.
그 모습이 크리스마스 날 양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확인했다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 같은 표정이라 마음 한구석이 아리긴 했지만, 아직은 아니다.
원래 연애문제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내가 세 사람을 알게 된 것은 이제 1년이 거의 다 되어 가지만, 이런 사적인 만남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일, 혹은 도움을 주고받느라 만난 것이었지.
그러니 호감은 있어도 성격은 모른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걸 생각해보면 얼마 만나지도 않았는데 판단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암, 그렇고말고.
내가 애늙은이 같다고 생각해도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내 기준에는 이게 최선이니까.
2.
우리는 무사히 춘천에 도착해 주변에 있는 괴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대부분 내가 손을 쓰기도 전에 세 사람의 검과 이능에 썰려 나간 것이지만.
“오빠는 무리하지 마.”
“어, 그것참 고맙네.”
“고마우면 내 소원 들어줄래?”
“사귀자는 거 빼면 어지간해서는 다 들어줄게.”
“결혼하자.”
“하...”
“농담이야.”
정신, 정신이 나갈 거 같애!
지나가던 해파리 한번 찔러보는 것 마냥 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푹푹 찌른다.
그럴 때마다 내 반응은 움찔움찔을 뛰어넘어 꿈틀꿈틀 수준이고.
‘그냥 명화랑 한우 씨 데리고 올 걸 그랬나?’
날 좋은 날 나들이를 기대했더니, 어째서인지 세 사람이 치열한 복마전을 하고 있다.
쾅! 휘이이잉! 서걱!
그 무엇으로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송인아의 스킬이 괴수 한 마리를 잡으면 곧바로 한설의 스킬이 똑같이 한 마리를 잡고, 질세라 태하윤의 검도 검강을 뿜었다.
크르르륵...
치열한 경쟁 속에서 피를 뿜는 것은 괴수요, 그 모습에 소름이 돋는 것은 나였으니...
“급할 거 없으니까 조금만 천천히 하죠. 마침 봄꽃도 피어서 풍경도 좋은데.”
내 말에 송인아가 가장 강력한 스킬인 무형의 창을 쏘아내며 말을 시작했고, 다른 두 사람도 그녀의 말에 한마디씩 덧붙였다.
“여기 있는!”
콰앙!
“괴수들을!”
휘이잉!
“모조리 벤 후!”
서걱!
“쉴 거야.”
서로 경계하면서 왜 또 이런 거는 손발이 잘 맞는 거야...
“아, 예예. 그렇고 말고요. 세 분의 의견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편하신 대로 하시지요.”
결국, 끝날 때까지 그들의 살벌한 토벌을 모두 본 끝에야 나는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
가지고 온 물건의 대부분을 해리엇의 가방에 담았기에 사실상 내가 맡은 역할은 짐꾼.
가볍게 바닥에 늘여놓은 도구를 이용해 한설이 준비해 온 닭갈비를 볶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닭갈비는 맛있는 냄새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깻잎의 향이 향긋하게 닭을 감싸고, 그 안에 담긴 매콤한 양념의 맛과 야채의 식감이 입을 즐겁게 만든다.
“와, 한설 씨 요리되게 잘하시네요?”
“고마워요. 손재주가 없는데 오늘은 맛있게 됐네요.”
“거짓말.”
“...”
송인아의 혼잣말에 싸늘해진 분위기.
“인아야, 그래도 맛있게 먹으면서 그렇게 말하면...”
송인아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살리기 위한 내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충격적인 발언을 내뱉었다.
“오빠 이거 맛이 좀 익숙하지 않아?”
“맛?”
잠시 분위기를 생각 안 하고 맛을 음미하자, 확실히 익숙하게 느껴지긴 했다.
뭐랄까, 아는 맛이라고 해야 하나?
송인아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건지 아니면 진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내 생각을 확실히 펙트로 바로잡아주겠다는 듯 송인아는 또다시 거침없는 발언을 내뱉었다.
“이거, 저기 춘X네 닭갈비야. 오빠 단골집.”
“응? 에이, 아무리 맛이 비슷해도 그렇지. 인아야 그러면 안 돼.”
내 말에 웃으며 송인아의 말에 반박하는 한설.
“하하, 인아 씨. 제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
나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뭔가 느낌이 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입은 웃는데 눈은 그렇지 않다.
설마...진짜야?
“노력? 노오력? 사 오느라 노력을 하셨겠죠.”
“...”
정곡을 찔렸는지 웃는 얼굴로 아무런 말을 못 하는 한설.
이 분위기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옆에 있는 맏언니인 태하윤을 바라보니, 그녀는 두 사람의 일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며 태연하게 닭갈비를 입에 넣고 있었다.
“태하윤 씨. 저 좀 도와줘요.”
“그러면 주말에 시간 비워요.”
“그러면 도와줄 거예요?”
“네. 당연하죠.”
“알겠-”
두 사람의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 답하려던 순간,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내게 말했다.
“오빠, 그럴 필요 없어. 우리 벌써 화해했어.”
“맞아요. 인아 씨랑 제가 얼마나 친한데요.”
뭔가 이상하다.
대화를 곱씹어본 나는 두 사람의 태세전환이 이렇게 빠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설마...’
이거 지금 주말에 시간 비우라는 거, 견제하려고 그런 거 맞지? 그렇지?
아니라고 보기에는 아쉬워하는 태하윤의 얼굴과 안도하는 두 사람의 표정이 너무 적나라하다.
‘세상에...’
괴수와 싸우는 것보다 더욱 치열한 전장인 이곳.
나는 밥을 코로 삼키는 것인지 입으로 삼키는 것인지를 모른 채, 하늘을 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 그냥 괴수나 잡을걸.”
지금 이 순간에도 치열한 눈치싸움을 하는 세 사람.
“...”
아무래도 내 여난은 계속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