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1
파편의 잠식으로 반신(半神)의 경지에 오른 엘렌마저 피하지 못한 김신의 일격.
공간을 물들이는 그의 공격에 자연에 존재하는 마나를 의지만으로 다스릴 수 있게 된 엘렌은 김신이 내뿜은 내공을 제어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거리를 뛰어넘어 엘렌이 서 있는 공간을.
공간을 뛰어넘어 존재마저 베어버린 김신의 검술.
의지라는 힘으로 자신의 신성(神性)을 만든 엘렌이었기에 그 본질을 베어버리는 김신의 검술은 신에 경지에 올라선 그를 소멸(掃滅)이라는 결과에 빠트렸다.
“크아아아악!”
존재 자체를 베인 엘렌이 엄청난 마기의 폭풍을 일으키며 점차 먼지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스으윽-
그 모든 장면을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담담히 바라보는 김신.
그는 사라지는 엘렌을 바라보다가 그가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순간, 나지막이 그를 향해 말했다.
“너도 네 삶을 찾아야 했지만, 나도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 사과는 하지 못하겠지만, 잘 가길 빌어주지. 이 망할 공간은 이제 없어질 테니까.”
죽이려 들었던 적에게 위안을 주는 말이라니.
미련을 버리니 조금이라도 더 편해졌다.
눈을 감은 엘렌은 그렇게 자신이 가진 파편만을 남긴 채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
태초로부터 이어온 사람의 생명.
그 가장 뜨거운 불길을 태우는 김신에게 시간이란 얼마 남지 않은 귀중한 자원이었다.
그러기에 가장 큰 산이었던 엘렌을 쓰러트린 지금 김신이 해야 하는 것은 나머지 세 명에게 있는 파편을 회수해 하나로 만들어 이 재앙을 끝내는 것.
주변을 슬쩍 살펴본 김신이 검을 쥔 손을 들어 허공에 휘저었다.
스윽-
부드럽게 허공을 베고 지나간 검은 거리를 격하고 공간을 갈라 헌터들과 대치 중인 세 명의 잠식된 적들과 괴수들을 모조리 갈랐다.
지이잉!
힘없이 쓰러져 먼지로 화하는 그들에게서 떨어진 파편을 게이트를 열어 가볍게 주운 김신.
모든 파편을 모은 그가 파편을 합치려 한 그 순간, 그의 심장 부근에서 뻐근한 느낌이 느껴졌다.
“...!”
여전히 시간은 흘러가고, 그에게 남은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살고 싶다는 욕망과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
지키고 싶다는 마음으로 희생이라는 선택을 했지만, 그도 어디까지나 인간이었기에 미련이 남는 것은 사실이었다.
살고 싶다.
미련은 남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여기서 끝내지 않으면 재앙은 그대로 진행될 테니까.
호흡을 가다듬은 김신이 떨리는 손을 억지로 움직여 파편을 합치자, 파편은 거대한 힘의 흐름을 이끌며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공의 존재 그 자체의 모습을 한 아티펙트.
원래는 방대한 힘을 다룰 자아가 그 안에 있어야 했지만, 신에 가까운 그 또한 수많은 인간에게 파괴되며 그 신성을 잃었기에 이제는 공의 영역을 다룰 수 있는 껍데기만이 남았다.
그것을 손에 쥔 김신은 아티펙트에 담긴 공의 존재에 기억을 훑으며 모든 헌터들이 들을 수 있도록 말했다.
“모두 귀환하세요.”
탑의 존재 자체가 공의 존재의 힘을 통해 원래 있던 공간으로 사라지면 탑 또한 그 원형(原型)을 잃고 흩어질 것이 분명하다.
김신의 말이 귓가에 직접 들리자, 헌터들이 놀란 눈빛을 하면서도 모두 귀환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사이에서 마지막에 게이트 너머로 날려 보낸 태진성이 다시 김신이 있는 자리로 돌아와 그를 보며 말했다.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한 건가.”
죄책감이 가득한 태진성의 표정.
김신은 자신의 선택으로 일어난 일에 미안한 마음을 갖는 그에게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저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미래를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았나.”
이미 지나간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김신은 그저 그답게 악동 같은 미소를 짓는 것으로 답했다.
2.
게이트 너머로 돌아온 김신은 곧바로 모든 헌터들이 무사히 탑에서 빠져나온 것을 확인한 후, 하나로 합쳐진 아티펙트를 들어 올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
아티펙트에 몰려드는 엄청난 마나.
주변에 있는 마나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아티펙트는 김신의 의지를 따라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게이트를 열어 탑을 향해 아티펙트에 담긴 힘을 사용하는 김신.
환한 보랏빛을 내뿜는 아티펙트는 공허를 꿰뚫어 보는 눈을 통해 탑의 각 층이 있어야 할 그들의 공간을 보여주었고, 김신은 그 층을 게이트를 열어 다시 되돌려 놓았다.
쿠구구구궁!
엄청난 이변이 일어난 것 때문인지, 지구 전역에 느껴지는 기묘한 진동.
재앙의 종식을 알리는 엄청난 일이 분명한 만큼, 그 시작을 알리는 여파 또한 엄청났다.
스르르-
탑의 정상부터 천천히 먼지가 되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나의 층이 없어지면 곧바로 다음 층이.
그렇게 연쇄적으로 사라지는 탑의 모습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바로 미국의 공영방송국.
탑의 소멸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그들의 모습에 한국 또한 그들의 방송을 긴급방송으로 송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했던 탑의 모습이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
가족 혹은 소속된 팀의 팀장이 모두 마지막 결전을 위해 탑으로 향한 것을 알고 있는 송인아, 한설, 태하윤.
세 사람은 길드의 대기실 혹은 집에서 떨리는 심정을 진정시키며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러던 중 그들의 핸드폰에 울리는 긴급재난문자.
[탑이 사라지고 있으니, 이 문자를 받으신 분들은 모두 신속하게 주변의 대피소로 향하시길 바랍니다.]
세 사람은 모두 문자를 확인하고 나서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TV를 켰다.
[게이트와 함께 태평양에 생겼던 정체불명의 탑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만드는 것으로 추정되는 세 명의 사람들이...]
헬기를 탄 리포터의 말 이후, 화면을 돌려 탑의 모습을 보여주는 생중계화면.
방송을 보고 있던 세 사람은 모두 사라지는 탑이 아닌, 바뀐 화면에서 게이트 너머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신?’
태진성과 한유성의 앞에 서서 열린 게이트의 너머로 보랏빛의 아티펙트를 들고 탑을 향해 쏘아내고 있는 남자.
세 사람은 김신이 서 있는 장소가 익숙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바로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나갔다.
3.
공의 존재의 힘을 담은 아티펙트를 이용해 게이트를 닫고 난 후.
김신은 탑의 존재가 완전하게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긴장이 풀림과 함께 몸에 한계가 찾아왔음을 느꼈다.
서서히 줄어드는 생명의 불씨.
선천진기를 폭발시키는 방법은 알아도 멈추는 방법은 몰랐기에 깨진 둑으로 흘러나오는 내공을 다시 담을 방법이 없었고, 김신은 급속도로 사라지는 생명의 기운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스륵. 툭.
바닥에 떨어지는 아티펙트와 아득해지는 시야.
서서히 쓰러지는 몸을 받쳐주는 태진성을 향해 김신은 눈을 감은 상태로 말했다.
“···모든 게 끝났군요. 그래도 제 손으로 끝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자네는 살아야지.”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김신도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직 살날이 창창한 젊은 청년이니까.
하지만, 마치 불치병에 걸린 듯한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해야 할지 모를 뿐이다.
‘내가 기적을 바라는 날이 올 줄이야.’
세상에 공헌한 공을 높이 사 사소한 기적이라도 일어났으면.
“방법이 없기는···”
김신은 태진성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
몸을 감싸는 기묘한 부유감.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한 그 묘한 감각에 김신은 이곳이 사후세계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지만 편안하다.
그의 몸을 조용히 감싸오는 포근함.
김신은 그러한 기분을 만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혈혈단신으로 성인이 되자마자 각성이라는 기적을 만났고, 그렇게 각성한 힘으로 한때 불사길드의 유망주까지 올랐던 기억.
하지만, 김신은 그렇게 각성한 후로도 계속해서 괴수를 잡는 일만을 계속해서 했기에 삶에서 따로 즐거운 무언가를 찾기 힘들었다.
남들이 다하는 연애.
남들이 다하는 여행.
남들이 다하는 여가생활까지.
그러던 와중에 몸까지 다쳐서 나락까지 떨어진 그를 제기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감정]스킬.
스킬을 얻고 난 후로도 김신의 삶은 일뿐이었지만, 그래도 전과는 다르게 좋았었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과 만나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이들이 있었기에.
그에게 자신감과 살고 싶다는 욕망을 불어 넣어주는 이들이 있었기에.
그렇기에 김신은 정말로 아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는가.
많은 사랑을 받았고, 지키고 싶었던 이들을 지켰고, 그들을 지키는 것이 자신 홀로 희생하는 것으로 충분했다는 것을.
결과적으로 생각하면 혼자였던 삶을 그 시간만큼은 가장 알차게 보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살고 싶은 건, 내가 인간이라는 증거인가.’
자조 섞인 웃음을 속으로 내뱉던 그때.
-···신 씨!
어디선가 그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사후세계에서마저 환청을...’
너무나도 그리워한 나머지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려던 찰나, 아까보다 조금 더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신 씨!
명확하게 들리는 목소리.
익숙하지만, 여러 가지의 목소리가 한대 섞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인아? 한설 씨? 하윤 씨?’
누구의 목소리를 가져다 틀어도 다 어울릴 것 같은 목소리.
김신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였고, 마침내 그를 부르는 목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
익숙한 천장의 모습.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알코올의 향기는 이곳이 분명 사후세계가 아닌 병원이란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자신은 선천진기를 억지로 사용했고, 그에 대한 대가로 생명이 가진 원초적인 힘을 끌어다가 썼다.
생명의 불꽃이 모두 다 하는 순간, 죽는 것이 당연했을 터인데...
머릿속으로 당장 생각나는 것은 운이 좋아 어떻게든 선천진기의 사용을 막았다는 것이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면 지금 이 모든 것도 그저 꿈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더 가능성이 늘어나는 것 같기도 했다.
‘꿈이라면 아프려나.’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볼로 가져가는 김신.
가지런히 모여 있던 손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그의 양손을 잡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따뜻하다. 그리고 부드럽다.
한순간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손을 잡은 누군가의 마음이 느껴졌다.
정말 아끼는 무언가를 만질 때와 같은 조심스러운 손길.
김신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고, 보이는 광경에 놀라고 말았다.
“인아? 한설 씨? 하윤 씨? 세 사람이 대체 왜...”
일어난 그를 향해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세 사람의 모습.
김신의 얼빠진 표정을 보던 세 사람은 그의 말에 각자 한마디씩을 하기 시작했다.
“죽은 줄 알았다고! 이 바보야!”
“혼자서 그렇게 무리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김신 씨, 우리 삼촌 아니었으면 지금쯤 진짜 죽었을지도 몰라요. 아, 그래도 살아서 다행이다...”
쏘아붙이는 세 사람의 말 중, 김신은 태하윤이 말한 말에서 의문점을 찾았다.
“태진성님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라고요?”
정말로 내가 살아있는 게 맞나?
그런 생각이 듦과 동시에 질문의 당사자인 태진성이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어났나? 몸은 좀 어떻고?”
조금 무거운 느낌은 있지만,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은데요?”
“뭔가 이상한 것은 없나?”
천천히 내부를 관조하던 김신은 그제야 몸에 이변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단전이...”
단전이 막혔다.
아니, 사라졌다고 표현하는 게 옳은 건가?
김신의 답을 들은 태진성은 조금 미안한 듯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말했다.
“선천진기의 여파를 막는 방법은 그것밖엔 없었네.”
“단전을 폐했기에 살았다는 말씀입니까?”
“맞네.”
얼떨떨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살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김신은 그토록 바랬던 것이 이뤄졌다는 기쁨에 환하게 웃었다.
“상관없습니다. 이제 어차피 내공을 쓸 일도 없을 테니까요.”
아직 지구촌 곳곳에 남아있는 괴수들을 토벌해야 하겠지만, 어쨌든 그것들은 다른 헌터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살아남았으니 이제는 못다 한 소망들을 이뤄야지.
열심히 일한 것으로 이미 돈은 충분하다.
그러니 이제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거다.
놀러도 가고, 연애도 하고.
'날씨 좋다.'
김신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