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1.
다시 돌아온 시간.
김신은 게이트를 열려던 순간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것은 게이트의 위치를 아예 바꾸는 것이었다.
공허를 꿰뚫어보는 눈.
시간을 돌리기 전의 김신은 미지의 공간 너머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아티펙트를 이용해 본 장소가 프란과 만났던 장소였기에 그곳에서 조금 위치를 바꿔 그곳과 떨어진 장소에 게이트를 열었었다.
이유는 하나.
엘렌이 아티펙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한유성의 실패다.
그렇다면 아예 접근방법을 바꾸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궁금해서 넘어올 때까지 게이트를 열어둔다.
게이트 자체가 그들에게는 유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지는 이것이 되리라.
시간이 되돌아가는 동안 했던 고민이 끝나자, 김신은 처음과 같이 보랏빛 아티펙트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지이잉!
공간이 뒤틀리며 천천히 게이트가 열린다.
“무사히 돌아오도록 하지.”
돌아서며 게이트를 향해 발을 떼는 한유성의 말에 김신은 그를 불러세웠다.
“길드장님.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무슨 일 있나?”
“···뭔가 이상합니다.”
고개를 갸웃하는 김신의 모습에 자리에서 멈춰선 한유성.
김신은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다시 공허를 꿰뚫어보는 눈을 이용해서 게이트 너머의 공간을 훑어봤다.
머릿속으로 직접 투영되는 저 너머의 공간.
조용히 살펴보던 김신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적들의 움직임을 포착하자 미소를 지었다.
***
시간이 되감긴 지금.
탑의 26층에서 프란이 사라진 장소를 살펴보던 엘렌은 또다시 게이트가 열리는 징조를 포착했다.
지이잉!
거칠게 떨리는 공간의 중간으로 벌어지는 틈새.
조금씩 그가 있는 26층을 삼키며 열린 게이트를 본 순간, 엘렌은 시간을 돌리기 전과 같이 고민했다.
‘먼저 마물들을 보내야겠군.’
공의 영역에서 흘러나온 기운에 변이된 동물들을 먼저 집어넣어 공간 너머에 있을 적들을 혼란으로 빠트린 후, 진입한다.
짧은 계획수립과 동시에 허공에 마기를 흩뿌리는 엘렌.
우웅!
그가 가진 특유의 파장이 넓게 퍼지자,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물이 몰려들었다.
“가라. 가서 너머에 적이 있다면 모조리 물어뜯어 공간을 만들어내라.”
한때 파충류, 포유류 등 일정한 형태를 가졌던 동물이었던 것들.
이제는 공의 영역에 변이되어 기괴하게 변해버린 그 마물들이 엘렌의 의지를 깨닫고, 게이트 너머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지축을 흔들며 빠르게 게이트 너머로 들어가는 마물들.
엘렌은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주변에 있는 동료였던 것들을 불러들였다.
“너희들도 준비해.”
엘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답하는 세 명.
“그르르륵!”
엘렌은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비틀린 미소로 답했다.
“모든 파편이 모인다면 너희들도 되돌아올 수 있을 거다.”
2.
쿠구구구구!
게이트 너머로 어떠한 소리가 들린다.
한유성은 김신의 제지에 자리에서 멈춰선 직후, 게이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발소리?’
동물의 발굽이 땅에 부딪히며 내는 거대한 소리.
어떠한 짐승들의 발소리는 거대한 소음이 되었고, 그 소음이 게이트를 넘어서까지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소리에 정체를 파악한 한유성은 김신을 이끌고 뒤로 물러섰다.
“아무래도 너머에 있는 무언가가 이쪽으로 넘어오나 보네. 잠시 뒤로 물러서서 지켜보도록 하지.”
“예.”
곳곳에 설치된 함정 중, 안전한 하나의 루트를 따라 헌터들이 있는 곳까지 빠져나온 한유성과 김신.
태진성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곧장 김신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나?”
“게이트 너머에서 무언가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무언가?”
“예. 바로 저것들입니다.”
김신의 답변과 동시에 게이트 너머로 괴수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기괴하게 변이된 온갖 동물들의 출몰.
그 모습에 태진성은 표정을 약간 찌푸리며 답했다.
“위험했군.”
태진성의 말을 들은 한유성은 김신을 보며 짧게 감사를 표했다.
“붙잡아줘서 고맙네.”
“의심되기에 붙잡은 것입니다.”
“그래도 자네 아니었으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모르잖나.”
한유성의 말을 들으니, 가슴 한구석이 따가웠다.
‘사실 붙잡지 못했습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타고 올라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간을 돌리기 전의 이야기다.
새롭게 얻은 기회에서는 그를 지켜냈기에 김신은 그의 감사를 피하지 않았다.
***
처음과는 다르게 쓰러진 한유성은 없지만, 상대할 괴수의 수가 엄청나다.
콰아아아앙!
달려오는 그대로 폭발하는 함정들.
아티펙트와 함께 묻혀있던 마석이 깨짐과 동시에 흘러나오는 마나는 같이 묻혀있는 아티펙트로 흘러 들어가 주변을 향해 무분별하게 능력을 쏟아부었다.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폭발하는 땅.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베어내는 바람.
땅 위에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얼음.
지나가는 괴수들을 태워버리는 불까지.
아티펙트의 지뢰밭 위를 지나가던 괴수들은 비산하는 땅의 잔해에 온몸이 갈가리 찢겨 지거나, 통째로 갈라지고, 걸어가던 그대로 얼어붙었으며, 먼지로 화했다.
그렇게 많은 수의 괴수들을 줄였지만 여전히 남은 괴수들은 많았고, 남은 괴수들은 처음 쏟아진 괴수들보다 더욱 단단하고 강한 놈들이 주를 이뤘기에 헌터들도 그것에 대응해 각자가 가진 원거리 스킬들을 준비했다.
─────!
수많은 S급 헌터들의 스킬사용에 엄청난 마나가 몰려들며 대기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크에에에엑!
그 모습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괴성을 내뱉는 괴수들.
하지만, 헌터들은 괴수들에게 내려줄 자비란 영원한 안식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거침없이 준비해놓은 스킬을 쏟아부었다.
우우우우우웅!
아티펙트는 괴수가 그 위를 지나가야 발동하지만, 스킬은 다르다.
괴수들이 흩어져서 달려오는 길목에 생겨나는 총천연색의 공격들.
달려오는 괴수를 그대로 증발시켜버리는 스킬의 무자비한 향연이 끝나자, 전장에 남은 것은 대부분 크게 다친 괴수뿐이었다.
‘이 정도면 큰 피해 없이 싸울 수 있겠어.’
처음 전투에서는 한유성이 붙잡혔다는 예상외의 상황에 선공하지 못해 난전이 펼쳐졌지만, 이번엔 확연히 다르다.
확연히 비교될 만큼 줄어든 괴수의 수.
곳곳에서 나머지 괴수들과 전투를 벌이던 때에 게이트를 넘어오는 거대한 기척이 느껴졌다.
“엄청나군...”
엄청난 압박감에 말꼬리를 길게 끄는 태진성.
김신은 그의 말을 들으며 게이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존재의 모습을 살펴봤다.
검은 날개와 머리에 달린 뿔.
마족의 상징과도 같은 그것들을 달고 있는 존재와 그의 곁에서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주변을 살펴보는 세 명의 마족.
승부수를 띄운 김신의 선택은 이제 저들과의 전투로 결과가 나온다.
세 군데로 흩어지는 엘렌의 동료들과 게이트 바로 앞에서 자리한 채 그것을 보는 엘렌.
김신은 오만한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옆에 있는 태진성에게 넌지시 말을 했다.
“때가 됐군요.”
3.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요.
백견(百見)이 불여일행(不如一行)이라.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게 낫고, 기왕이면 보기보다는 해보는 게 낫다는 말.
김신은 일전에 겪었던 회장과의 전투에서도 느꼈지만, 시간을 되돌린다는 행위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것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네놈이 이 게이트를 열었군.”
처음과는 다르게 대화를 걸어오는 엘렌.
김신은 가능하면 주변에서 펼쳐지는 전투가 끝날 때까지 시간을 벌고 싶었기에 엘렌의 말에 답했다.
“그래. 내가 열었다.”
“게이트를 열고 가만히 냅둔다라...네놈이 한 생각인가?”
“넌 어차피 넘어와야 하니까. 함정이든 뭐든 일단 넘어오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김신의 말에 작게 감탄을 터트린 엘렌은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놈도 알다시피, 네놈과 나의 격차는 확실하다. 그러니, 네가 가진 그 파편을 주면 내가 특별히 너는 살려주도록 하지.”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힘을 가진 놈들은 항상 오만해지는 것 같다.
“...”
답 없이 조용히 바라보는 김신의 시선에 엘렌은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만심에 가득 찬 녀석의 말 따위는 들어줄 필요조차 없는 법.
김신은 바라보는 엘렌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내 대답은 ‘싫다’야. 세상에 나만 인간인 상태로 남는 것은 너무나도 외롭거든.”
“감정이란 언젠간 무뎌지지.”
“말은 그렇게 해도 프란이 없는 빈자리를 크게 느끼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비꼬듯 말하는 김신의 답변에 엘렌은 올라갔던 입꼬리를 끌어내리며 스산한 목소리로 답했다.
“···살려줘도 싫다고 하는군.”
“살려줄 것도 아니었잖아. 어차피 넌 너에게 가치 없는 것들은 취급하지 않으니까.”
기억으로 본 덕분에 엘렌의 성향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는 김신의 말에 그는 허를 찔렸다는 듯이 기괴하게 웃음을 내뱉었다.
“크크크큭.”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던 엘렌은 마기를 끌어 올려 김신을 향해 쏘아지듯 달려들며 말했다.
“그럼 죽이고 빼앗을 수밖에!”
움직임을 여전히 보기엔 힘들었지만, 근접전투는 확실히 어떤 방식으로 할지 알고 있다.
채앵!
처음과는 다르게, 완벽한 준비를 끝내놨기에 조금 더 빠르게 반응한 김신.
옆에 있던 태진성은 김신이 엘렌의 공격을 받아낸 방법을 보고는 눈을 빛냈다.
“그것은...!”
유려하게 흔들리는 김신의 검.
김신은 맹렬하게 쏟아지는 엘렌의 공격을 침착하게 흘려냈다.
챙챙챙!
최소한의 움직임.
육체적 능력이 약하다면 그에 따른 새로운 대처방법을 취해야 하는 법.
휘익!
찌르고 베는 엘렌의 원초적인 공격은 공격이 닿기 직전 그의 앞에 선 검에 의해 흘려져 옆으로 빠져나가거나, 그가 움직이는 아주 약간의 몸짓으로 빗겨나갔다.
채애앵!
그리고 태진성이 놀란 이유.
심장이 있는 부근을 찔러 들어오는 엘렌의 공격을 향해 검을 마주 내미는 김신의 검.
김신의 검은 찔러 들어오는 엘렌의 오른손을 부드럽게 감으며 들어오는 힘을 그대로 그의 방향을 향해 되돌렸고, 엘렌은 자신의 손이 김신의 검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되돌아오는 모습에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이화접목(移花接木)...”
유검의 핵심.
상황에 맞춰서 쓰려면 어마어마한 숙련도가 필요한 기술이지만, 지금의 김신은 엘렌과 한번 싸워봤다.
천마신공에도 있는 유검에 상대의 공격의 단조로운 패턴을 안다는 이점이 더해지며 할 수 있게 된 방법.
김신은 극한의 집중을 끌어내며 엘렌을 마주 보며 생각했다.
시간을 되돌리며 본 그 한순간의 틈.
바로 그 순간을 노리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