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1.
태진성과 합격으로 엘렌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던 김신.
가슴을 베어오는 엘렌의 손을 튕겨낸 그는 반동을 이용해 오른손에 쥔 검을 역수로 고쳐잡으며 손을 아래로 움직여 엘렌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채앵!
처음과는 다르게 많이 약해진 엘렌의 마기.
그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마기의 막이 한 꺼풀 더 벗겨지며 처음으로 그의 몸에 미약하지만, 상처란 것이 생겼다.
스윽-
부드럽게 몸을 훑고 지나가는 김신의 검.
그 끝에 묻어나오는 피를 바라보는 김신과 자신이 베였다는 것에 크게 충격받은 엘렌이 놀란 표정으로 김신을 바라봤다.
어떻게 자신을 벨 수 있냐는 듯이.
분명, 엘렌의 경지는 김신과 태진성이 힘을 합쳐야만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육체적인 강함 그 자체.
검사는 처음 보는 상대조차 합을 나누며 빠르게 허와 실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해결책을 찾아내야 할 만큼 치열한 싸움을 한다.
‘솔직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큰 차이도 아니긴 해.’
마법이 주력인 마법사에게 육체적인 실력으로 비슷하다는 것이 골치 아프긴 하지만, 어쨌든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 다행이다.
‘소모전이 정답이었나.’
버티면 가능성이 커진다.
혹시나 했던 최악의 상황이 오거나, 최고의 한 수를 아직 찾지 못했지만 우선 소모전으로 가면 유리하다는 것은 알아냈다.
물러난 엘렌을 바라보며 역수로 쥔 검을 다시 고쳐 쥔 김신.
“어려운 상대야. 좀처럼 빈틈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그는 곁으로 다가오며 말하는 태진성의 물음에 주변을 둘러보며 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집니다. 조금만 더 버텨보죠.”
강대한 괴수 무리와의 전투에서도 자리를 지키며 팽팽하게 맞서는 헌터들의 모습이 보인다.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무기가 헌터들에게는 힘으로 적들에게는 족쇄가 되는 지금 이 유리한 이점을 놓칠 수는 없다.
***
가슴을 타고 흐르는 검은 색의 핏방울.
엘렌은 계속해서 질질 끌리는 이 불쾌한 상황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앞의 두 사람을 바라봤다.
‘마법을 써야 하나?’
마법사로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경지에 끝에 도달했었다.
하지만 공의 존재가 죽고 공의 영역이 그가 있던 26층을 침범함에 따라 그 또한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파편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결국, 엘렌은 마법사로서의 경지가 끝나는 것은 물론 바뀐 몸으로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몸에 느껴지는 부담에 26층에 있을 때 말고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강해진 육체와 마기의 파괴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신의 육체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법.
가볍게 몸을 훑어본 엘렌은 마기의 총량과 파편을 억누르고 있는데 쏟고 있는 힘 그리고 게이트를 강제로 열고 있는 것에 쓰고 있는 힘까지 계산한 끝에 한 가지의 결론에 도달했다.
‘더 이상의 소모전은 위험하다.’
힘을 모아 한 번에 끝내거나, 아니면 뒤로 물러서 힘을 모아 다시 게이트가 열리기를 기다리거나.
상대 또한 상황은 비슷한 것으로 보이니, 머지않아 다시 올 것이란 건 알 수 있다.
“...”
조용히 김신과 태진성을 바라보던 엘렌은 결심이 끝나자, 손을 들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2.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김신과 엘렌.
그중 김신은 가슴에서 묻어나오는 피를 본 이후로 멈춰 서있는 엘렌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이지.’
상대는 최악의 적.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적의 모습에 섣불리 선공할 수도 없었다.
“...”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침묵 끝에 천천히 손을 들어 움직이기 시작하는 엘렌.
그의 손끝을 따라 허공에 수놓아지는 마기를 본 순간, 김신은 태진성을 옆으로 밀쳐내며 자리를 벗어났다.
번쩍!
눈앞을 가득 채우는 엄청난 빛.
그리고 뒤따라 들려오는 굉음.
콰르릉!
엘렌의 손끝에서 나온 것은 번개.
무려 6서클 마법인 기가라이데인.
티디딕.
간발의 차이로 마법의 정체를 깨달은 김신이 피한 자리에는 거무칙칙한 빛이 그와 태진성이 서 있던 바닥에 스파크를 튀기며 흩어지고 있었다.
‘쓰지도 않던 마법을 쓰겠다고?’
프란의 경우처럼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럽기에 마법을 안 쓰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상황은 바뀌었고, 상대가 전력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으니 이제부터는 마법사를 상대한다는 마음으로 전투를 펼쳐야 할 때다.
‘수인을 맺을 시간, 하다못해 영창을 할 시간도 없이 몰아쳐야 해.’
김신이 파악한 바로 엘렌이 도달한 경지는 8서클.
인간의 한계라는 경지에 도달한 그의 실력을 생각해보면 6서클 마법을 간단한 수인만으로 날려 보낼 수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8서클 마법은 사용하게 둬선 안 돼.’
위력 그 자체보다 마법의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기에 헌터들의 피해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결과를 파악한 김신은 태진성에게 말했다.
“검강을 날려서 최대한 견제해야 합니다!”
마법의 존재를 모르는 태진성의 입장이지만, 지금 생각할 것은 김신의 말처럼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몰아쳐야 하는 것이 맞다.
“알겠네!”
답과 함께 검강을 쏘아내며 엘렌을 압박하는 태진성을 바라보며 김신 또한 검을 쥐고 왼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엘렌을 바라봤다.
***
엘렌의 행동이 근접전에서 마법전의 양상으로 바뀐 이후부터 김신은 계속해서 아슬아슬한 감각을 느꼈다.
쐐애액!
초토화된 대지 중앙에 가만히 선 엘렌을 향해 날아가는 청량한 푸른빛의 강기와 어두운 묵빛의 강기 다발.
아름드리나무 따위는 일격에 베어낼 공격들이 엘렌의 몸을 베기 직전 무언가에 의해 격렬한 폭음을 내며 가로막혔다.
콰아아앙!
주변을 뿌옇게 만든 자욱한 먼지.
그리고 그 사이로 드러나는 김신의 강기와 비슷한 색상의 보호막.
김신은 그 보호막의 모습을 보자마자 곧바로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앱솔루트 실드.’
실드, 베리어보다 더 높은 7서클의 마법인 앱솔루트 실드.
지팡이에 담겨 있던 블라이어의 기억으로 본 최강의 방어마법이었다.
뿌옇게 피어오른 먼지의 사이로 계속해서 날아가는 검강.
가능하다면 내공의 소모가 적은 접근전을 하고 싶었지만, 조금이라도 접근하려 하면 전격과 화염을 비롯한 수많은 마법의 다발이 날아와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지금은 무엇을 하는지 실드 안에서 엄청난 마나가 모여드는 중이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빠르게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정답이리라.
투두둑-
아무리 강력한 실드라고 해도 검강의 위력을 모조리 막는 것은 무리.
처음 한 번의 공격을 막은 직후 두 번째 공격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세 번째 공격에 부서졌다.
그렇게 생긴 빈틈을 향해 날아가는 김신의 검강.
쐐애액!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김신의 검강이 엘렌의 몸에 맞기 직전, 그의 몸이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조금 벗어난 공간에서 다시 나오는 엘렌의 모습.
6서클 마법인 블링크를 써서 공격을 회피한 그의 모습에 김신은 곧바로 왼손을 내밀며 준비했던 마법을 날려 보냈다.
‘익스플로전.’
지이잉-
엘렌의 바로 옆에서 모이는 붉은 마나의 빛.
그는 김신이 마법을 쓰는 모습에 허를 찔렸다는 듯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우우웅! 따악!
김신이 손가락을 튕김과 동시에 엄청난 고열을 동반하며 폭발하는 익스플로전.
콰아아아앙!
단 한 번의 기회였지만, 완벽하게 허를 찌른 공격이 성공했다는 생각에 김신은 엘렌이 서 있던 자리를 노려봤다.
자욱한 먼지가 가라앉고 드러난 엘렌의 모습.
한쪽 날개가 흉하게 뜯겨나간 그였지만, 겉모습은 멀쩡하다.
‘제길.’
회심의 한 수가 큰 피해를 주지 못해 굳은 표정을 지은 김신과 의외에 한 수에 날개와 마기를 많이 소모한 엘렌.
엘렌은 검을 쥔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김신을 향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마법을 쓸 줄이야.”
“...”
답하지 않는 김신을 바라본 엘렌은 서 있는 김신과 태진성을 향해 날개를 희생하며 준비한 마법을 사용했다.
“헬파이어(Hell fire)”
3.
엘렌이 준비한 마법을 사용하자, 땅이 거칠게 흔들렸다.
쿠쿠쿠쿠쿠쿠!
소리가 점점 더 커지며 김신이 서 있는 주변 땅에 점차 금이 가기 시작하고, 곧 금 간 땅의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한 공격.
태진성은 재빠르게 마법의 사거리 밖으로 벗어났지만, 김신은 때를 놓치고 말았다.
“조심하게!”
사거리 밖으로 최대한 벗어난 태진성이 걱정 어린 목소리가 김신의 귓가에 들렸지만, 지금은 그것에 대한 답을 할 수도 없을 만큼 위험천만한 상황.
탓!
김신은 마법의 발현이 시작되기 직전, 내공을 쥐어짜 하늘 위로 솟구쳤다.
용천혈에서 쏘아진 내공과 허공에 내공의 발판을 생성시켜 더욱 높이 올라간 김신.
그가 가장 높이 올라간 순간, 갈라진 땅에서 엄청난 온도의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화르르르륵!
주변의 모든 것을 태우겠다는 듯이 달려드는 순수한 마나의 불길.
조금이나마 영향력에서 벗어나 직격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솟구치는 마법은 엘렌의 손으로 만들어진 마법이다.
‘제길, 저 마법을 저렇게 움직인다고?’
방향을 틀어 김신이 있는 공중으로 날아오는 불길.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막을 수도 없을 것이다.
꽤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느껴지는 엄청난 열기.
그 모습에 김신은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렀다.
쐐액!
쏘아지는 검강과 하늘로 솟구치는 불길의 대결.
김신의 검강은 엘렌의 불길을 얼마 저지시키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화르륵!
검강 따위로는 저지할 수 없다는 듯이 달려오는 불길.
엄청난 열기가 느껴지고, 피부가 익을 것 같은 그 순간.
김신은 품속에 간직했던 마지막 한 수를 꺼내들었다.
딸깍.
회색으로 물드는 세상.
김신의 품속에 있던 회중시계가 회색빛으로 물든 세상을 다시 한번 되감기 시작했다.
***
다시 되감기는 시간.
갈라졌던 땅에서 솟구친 불길이 다시 땅으로 되돌아가고, 공중에 떠 있는 김신의 몸 또한 천천히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금이 간 땅이 수복되며 합쳐지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던 김신.
김신은 한유성이 엘렌의 손에 당한 그 순간부터 이미 회중시계를 사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완벽한 순간을 찾아내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어.’
원래 세운 계획은 회중시계의 한계지점인 10분까지에 전투를 모조리 익히고 그것을 바탕으로 빈틈을 노리는 것이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주고받은 공방은 눈으로 보기 힘들 만큼 빠르고, 근접전 또한 틈을 발견하기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김신은 되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가장 확실한 방법을 찾아냈다.
‘역시...’
엘렌과 전투하며 느꼈던 묘한 위화감.
김신은 그 위화감의 정체를 시간을 되돌리는 과정에서 확인했다.
되감기던 시간은 어느새 엘렌이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하던 때.
그의 몸에 마기의 색채가 점점 진해졌고, 김신은 그 모습을 보며 확신을 가졌다.
‘아예, 계획을 바꿔버리자.’
한유성이 게이트를 넘어가 유인하는 것도.
그로 인해 불리한 싸움을 시작하는 것도.
스르륵-
열렸던 게이트마저 어느새 닫혔고, 회색으로 물들었던 세상이 다시 색을 찾기 시작한 순간.
파칭!
깨지는 회중시계의 소리를 들으며 김신은 다시 말했다.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