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1.
한유성은 공간이 일렁거리며 천천히 다른 장소와 연결되는 모습을 보며 손에 쥔 아티펙트를 확인했다.
“사용방법은 알려드렸던 대로 마나를 불어넣기만 하면 됩니다.”
“알고 있네.”
김신과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탑의 26층과 연결된 것인지, 보랏빛으로 물든 공간의 너머로 황폐화된 대지가 눈에 들어왔다.
한유성이 맡은 임무는 무사히 적들을 끌고 오는 것.
이쪽의 전장은 완벽하게 준비되어있기에 적들을 끌고 무사히 돌아오기만 한다면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안전하게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우웅.
아티펙트에 마나를 불어넣자, 천천히 몸을 감싸는 보랏빛 기류.
한유성은 그 상태 그대로 게이트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고, 그 순간 뒤에 있던 김신이 그를 향해 말했다.
“꼭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이런 위험천만한 임무에 자원하면서도 이상하리만큼 두렵지 않은 것은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딸이 곁을 지켜줄 것이라는 저 청년 때문이겠지.
저벅.
한유성은 조용히 게이트에 몸을 집어넣으며 김신의 말에 답했다.
“걱정말게. 딸이 시집가는 건 보고 갈 거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피식-
태연하게 답하는 김신의 모습을 보니, 괜스레 너무 긴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윽-
게이트의 안으로 들어가자 느껴지는 부유감.
그와 함께 보랏빛의 공간에서 어떤 기묘한 기운이 그의 몸으로 침습하려 했지만, 그를 감싸고 있는 보랏빛 막에 막혀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마나의 소모가 꽤 빠르군. 서둘러야겠어.’
김신이 말한 가장 좋은 경우의 수는 공의 존재의 파편을 가지고 있는 네 명만 탑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다.
‘기감이 뛰어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올 것이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준비할 것은 성공적인 유인을 위한 떡밥을 뿌려놓는 것.
한유성은 그 방법으로 손에 들고 있는 아티펙트에 마나를 더욱 많이 불어 넣었다.
우웅-!
더욱 밝게 빛나며 한유성의 몸을 확실하게 뒤덮는 보랏빛의 막.
선명한 보랏빛의 파동이 주변으로 퍼진 순간, 그의 뒤편에서 서늘한 감각이 느껴짐과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내 동료가 가지고 있던 그것을 들고 있는 거지?”
***
엘렌은 프란의 기척이 사라진 것을 느끼고 난 후로부터 계속 그가 사라진 구역을 수색했다.
한때 동료였던 자들을 수족처럼 부려 범위를 넓혀가면서.
하지만, 발견되는 흔적은 더 이상 없었고, 결국 그는 프란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 그가 사라진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느껴진 거대한 게이트의 파동과 그 사이에 있는 익숙한 프란이 가지고 있던 파편의 파장.
엘렌은 그 즉시 자리에서 사라지듯 빠르게 움직여 프란의 파장이 느껴지는 곳으로 움직였고, 그 파장이 느껴지는 장소에서 변이가 되지 않은 인간이 그가 가지고 있던 파편을 활성화한 모습을 보고 말았다.
“왜 내 동료가 가지고 있던 그것을 들고 있는 거지?”
사실의 정확한 확인을 위해 등을 보고 물었지만, 가만히 서 있는 인간은 자신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말이 없군.”
조용히 생각하던 그는 결국 프란이 죽었다고 단정 지었다.
누구보다 간절하게 기다렸기에 그것이 위험한지도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고, 그렇기에 함정이라는 것을 모르고 당했을 것이라고.
이 장소에 적응을 끝마친 자신들과 정반대인 안정된 마나가 주를 이루는 다른 세상.
26층에서는 파편의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서 마기를 사용하지만, 보충을 아예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반해 파편의 기운을 억누를 마기조차 채울 수 없는 다른 장소.
“흐흐흐, 결국 프란도 가버렸군.”
기다림의 미학이란 것을 까먹었으니, 눈앞에 저런 하찮은 인간들에게 당한 것이겠지.
조용히 읊조리던 엘렌의 시야에 눈앞의 인간이 게이트의 너머로 움직이려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인위적으로 열린 것이 분명한 게이트.
홀로 들어온 인간에게서 그가 찾던 다른 파편 두 가지 중 하나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전히 가장 중요한 공간과 공간을 잇는 파편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대로 보내면 불리한 조건만 가진 채로 전투를 벌여야겠지.’
조금이라도 유리한 전장을 만드는 것.
그가 인간이었을 적 가장 잘 하던 것이었고, 지금도 그 방법을 기억하고 있다.
생존이라는 숙원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어야 하는 법.
생각이 끝나자, 그의 손이 허공을 수놓았고,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는 기하학적인 문양을 만들었다.
────!
거대한 마기의 공명.
그와 함께 게이트를 향해 조용히 움직이던 한유성의 몸이 덫에 걸린 듯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움직이려는 한유성의 모습을 보며 엘렌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계획은 좋은데, 상대를 너무 얕봤어.”
2.
김신은 조금 떨어진 장소에 열린 게이트 너머로 한유성이 들어간 후 10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자, 마음속 한구석에 불안감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티펙트의 발동 즉시 자리를 이탈하는 것.
혹여 엘렌과 마주치더라도 다른 파편을 희생해 무사히 귀환하는 것인데, 아무런 조짐이 안보였다.
‘들어가야 하나?’
마음은 그렇지만, 사실 프란의 파편이 없기에 그마저도 하기 힘들다.
지독한 딜레마에 빠져 인상을 구긴 채 게이트의 너머를 노려보던 김신은 머지않아 게이트 내부에서 무언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
“길드장님!”
의식을 잃은 채 허공에 뜬 상태로 모습을 드러내는 한유성.
그의 뒤를 따라 모습을 드러낸 것은 프란의 기억으로 본 엘렌이었다.
조용히 12층의 풍경을 살펴보던 엘렌은 도처에 깔린 온갖 함정을 파악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이런 조악한 함정으로.”
그 모습에 주변에 있던 헌터들이 움직이고자 했지만,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었기에 차마 발을 떼지 못했다.
유인하러 간 헌터가 되려 인질이 되어버린 상황.
주변에 있는 원거리 스트라이커조차 한유성을 방패처럼 내세운 엘렌의 모습에 별다른 행동을 하지 못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흘러가는 상황을 파악하던 그때.
“마지막 파편은 네가 가지고 있었군.”
김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하는 엘렌의 모습에 김신은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일단 저놈을 여기에 가둬야 한다.’
한유성의 모습이 걸리지만, 어쩔 수 없다.
여기서 저놈을 놓치는 순간, 너무나도 불리해져 버리니까.
지이이잉!
게이트를 유지하고 있던 마나의 공급을 끊어버리자, 큰 울림을 퍼트리며 게이트가 닫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엘렌은 닫히는 게이트의 너머로 가는 대신 손을 들어 한유성이 들고 있던 프란의 파편에 마기를 불어넣었다.
우우우우웅!
프란에게 있던 파편에서 보랏빛 기운이 쏘아지며 닫히는 게이트에 닿은 순간.
────!
좁아지던 게이트의 입구가 그대로 고정되었다.
할 일을 다 끝냈다는 듯이 다시 김신을 향해 고개를 돌린 엘렌은 비어있는 왼손을 튕기며 말했다.
딱!
“여는 것은 불가능해도 닫히지 않게 할 수는 있지.”
그와 함께 게이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수많은 괴수와 잠식된 그의 동료들.
“모두 전투준비!”
계획의 실패는 헌터들을 최악의 전장에서 적과 싸우도록 만들었다.
***
쏟아져나오는 괴수들과 그것들의 사이에서 엄청난 무력을 선보이는 괴생명체들.
태진성은 달려오는 괴수들을 일격에 베어내며 김신이 있는 방향을 살펴봤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힘의 수준이 가늠되지 않는다.
그 말은 즉, 김신과 자신보다 한 단계 위의 경지에 있다는 의미.
쾅! 쾅쾅!
주변에 산재 되어있는 함정을 밟으며 달려오는 괴수를 베어내던 태진성은 자리를 박차고 김신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최소한의 가능성을 살리기 위해서.
눈앞의 저 괴물 같은 녀석 말고도 저 녀석과 비슷한 놈들도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 정도는 다른 S급 헌터들이 힘을 합치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탓!
높게 뛰어올라, 앞으로 쏘아지듯 날아간 태진성.
착.
부드럽게 김신의 옆으로 착지한 그는 수호길드장 한유성의 늘어진 몸을 옆으로 대충 던져버리는 엘렌의 모습을 보고는 살기를 뿜어냈다.
기와 마기의 대립.
자신의 기운에 의지를 담을 수 있는 김신과 태진성 두 사람의 모습에 엘렌은 처음으로 따분한 표정을 지우며 말했다.
“너희들은 제법 쓸만하겠군.”
마기의 개방과 동시에 주변이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키기기기기기깅!
김신과 태진성의 주변을 모조리 잠식하겠다는 듯이 침범하려는 마기.
그리고 그걸 막아내는 두 사람의 내공.
양립할 수 없는 두 기운의 맹렬한 대립은 엘렌이 날개를 펄럭이는 순간 끝났다.
파앙!
그야말로 찰나의 시간.
사라짐과 동시에 눈앞에 도착한 마족의 손톱이 태진성을 향해 짓쳐들어왔고, 태진성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공격을 흘려냈다.
채애앵!
“...!”
분명 제대로 흘려냈음에도 불구하고 손목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압박감.
공격을 흘려낸 태진성이 마기의 압박에 밀려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생긴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엘렌의 집요한 공격.
마기에 물든 손이 태진성의 목덜미를 잡아채기 직전.
채앵!
검강이 가득 맺힌 검으로 엘렌의 손을 쳐낸 김신이 재차 공격하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테니, 좀만 더 버텨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방법을 찾는다.
분명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그의 말을 들으니 정말로 버티기만 하면 방법을 찾아낼 것만 같은 느낌이 그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알겠네.”
그렇게 말한 태진성은 욱신거리는 손목을 한 바퀴 돌리며 다시 검을 집어 들었다.
3.
합격이란 같이 검을 내지르는 상대를 잘 알고, 호흡을 읽을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고급기술이다.
챙챙챙!
김신과 태진성.
두 사람은 그런 의미에서 서로가 검을 몇 번 나눠보지도 않았지만, 마치 물 흐르듯 움직이며 엘렌의 검을 받아내고 틈틈이 역습까지 시도했다.
그리고 그 전투의 한복판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있는 당사자인 김신.
그는 머리, 목, 심장 등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부위를 집요하게 노리는 엘렌의 공격을 최대한의 여력을 끌어내 쳐내며 눈빛을 빛냈다.
‘조금만 더.’
고수끼리의 전투는 말 그대로 한 호흡에 결정 난다고 한다.
상대의 틈을 찌를 수 있거나, 혹은 상대의 방심을 유도해 틈을 만들어내거나.
후웅!
그런 의미에서 지금 김신은 엘렌이 근접전투를 고집하는 것에서 희망을 엿봤다.
그가 도달하지 못한 마법적인 영역에서 싸우는 것이 아닌, 순수한 힘과 힘의 대결을 고집하는 엘렌의 모습에서.
‘경지는 한 수 위지만, 마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충분히 감당할 만해.’
연속해서 공격을 주고받는 김신과 엘렌.
눈으로도 쉽게 쫓기 힘든 공격에 호신강기를 두른 몸에도 상처가 하나, 둘씩 늘어났지만, 김신은 오히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어.’
품속에 잠들어 있는 반전을 꾀할 마지막 한 수.
김신은 눈빛을 빛내며 엘렌의 공격을 읽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