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1.
7장으로 구성됐다는 탑에 관한 비밀이 적힌 석판.
한유성은 김신에게 줬었던 석판과 같지만 미묘하게 다른 석판을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탑의 존재가 아티펙트를 주고 헌터들의 힘을 기르게 해주는 도구가 아닌, 지구를 삼킬 재앙이라던 김신의 말.
그가 했던 그 말을 곰곰이 곱씹던 한유성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등반인가.”
석판에 탑에 관한 단서가 적혀있을 것이라는 김신의 말을 듣고 두 장의 석판을 더 찾을 수 있었다.
“암울하지 않은 내용이라면 좋겠다만...”
막을 수 있다거나 혹은 막을 방법이 있다거나.
탑을 오르는 것만이 방법이라면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부디 안전한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문 너머에서 비서의 노크가 들렸다.
똑똑-
-5팀장님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주게.”
부드럽게 열린 문 사이로 기다리던 사내가 등장하자, 한유성은 들고 있던 석판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반갑게 맞았다.
“어서오게나.”
***
가벼운 인사와 함께 자리에 앉은 김신의 눈에 한유성의 앞에 놓여있는 두 장이 석판이 들어왔다.
“두 장입니까?”
“맞네. 한 장은 미국에서 다른 한 장은 중국에서 찾았네.”
“석판을 생각보다 쉽게 줬군요.”
“애초에 정보 자체도 없을뿐더러 감정도 못 하는 물건. 이번에 얻은 유니크 아티펙트를 제시하며 교환하자고 하니 바로 응하더군.”
찾으면 좋고 못 찾더라도 조만간 탑에 들어가려던 계획이었는데 운이 좋다.
석판에 적혀있는 정보와 그 석판을 소지했던 이의 기억을 읽어 장차 일어날 일을 알아내는 것.
지금까지 알아낸 두 장의 석판은 각각 탑이 재앙과 관련이 있다는 것과 재앙이 진행될수록 게이트에서 강력한 괴수가 나온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석판에 적힌 정보는 과연 무엇일까.
그걸 알아내기 위해 김신은 조심스럽게 석판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곧바로 확인해 봐야겠군요.”
“따로 가져가도 되네만.”
“감정에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니, 곧바로 확인해서 알려드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정보에 따른 등반계획을 짜려면 그편이 날 테니까요.”
한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익숙한 손길로 집어 든 석판을 천천히 훑어보자 눈앞에 뜨는 문구.
[사용자의 염(念)을 엿봅니다.]
머릿속으로 탑의 정보를 알고 있는 이의 기억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2.
1000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오며 세계수를 통해 ‘예지’라는 특별한 힘을 얻은 예언자 엘하임.
아르제니아 대륙에 닥친 게이트와 탑이라는 멸망의 씨앗을 본 그는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확인한 후로 미래의 누군가를 위해 석판을 남겼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멸망과정.
그 장대한 서사가 담긴 이야기를 7장의 석판으로 나누니.
탑의 등장과 함께 열린 게이트의 존재와 탑을 오르지 않으면 닥치는 재앙을 알리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중 지금 김신이 기억을 살펴보는 석판의 페이지는 세 번째 페이지.
이 석판의 내용은 탑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종말을 앞둔 세계엔 어둠이 드리우고, 그 어둠은 곧 세계를 삼킨다.
-모든 육신을 가진 생명체는 어둠 속에서 한 줌의 모래로 화하나, 정신은 그대로이니.
-영겁의 시간 동안 고통을 받으며 그들을 구원해줄 이를 찾노라.
엘하임은 예견한 멸망에서 살아남아 극복할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그가 있는 아르제니아 대륙에서는 이미 한차례 마왕이라는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터.
“용사의 부재가 이리도 크다니.”
대륙의 가장 강한 기사인 그가 없었기에 방법을 알아냈지만, 그 방법을 쓸 수 없었다.
멸망을 맞이한다면 모두가 영겁의 고통을 받으며 살아야 할 위기의 순간.
결국, 남은 것은 붙잡힌 자신들의 영혼을 구제해줄 이를 찾는 것일 뿐이었다.
탑에 묶인 영혼을 구제할 방법은 탑의 끝을 보는 것.
분명 그 길은 험하겠지만, 엘하임은 미래의 구원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탑에 남기고 간 석판에서 부디 그 답을 찾길 바란다.
이것이 세 번째 페이지에 담긴 기억의 끝이었다.
기억을 훑어본 후 다음 페이지를 보기에 앞서 잠시 생각을 정리해봤다.
세 번째 페이지의 내용은 김신이 아티펙트에 담긴 기억을 엿보기 시작한 후로부터 들었던 생각과 다르지 않다.
탑이 생긴 세계는 멸망을 맞이함과 동시에 탑의 층으로 바뀐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탑을 오르지 않으면 닥치는 멸망과 탑을 오를수록 강해지는 괴수.
이것이야말로 타임어택과 같은 상황 아닌가.
시간 내에 해결하지 못하면 무조건 지는 게임이다.
강해질 시간조차 여유롭지 않은 조건에 엘하임도 그가 살던 세계의 최강자인 용사를 믿고 있던 것이다.
“뭔가를 알아냈나?”
말없이 생각에 빠져있으니 그 모습을 본 한유성이 물었고, 김신은 고개를 들어 한유성에게 답했다.
“여기에 담긴 석판의 내용은 탑의 각 층이 멸망을 맞이한 세상이라는 걸 암시하고 있습니다.”
“탑을 오르지 않으면 재앙을 맞이하는 것으로 모자라 그 끝에는 탑의 층으로 남는다?”
“아이러니한 상황이긴 하지만, 어쨌든 오르면 무언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김신은 그렇게 답한 후 다시 시선을 다음 석판으로 옮기며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적힌 것이 석판이니, 이번 석판은 방법이 적혀있기를 바라야겠죠. 혹여 찾지 못한다고 해도 등반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니 부딪쳐 봐야 할 겁니다.”
순서대로 배치하자면 첫 번째 페이지는 탑의 존재와 재앙의 관계.
세 번째 페이지는 탑을 오르지 못하면 맞이하는 최후.
네 번째 페이지는 탑을 오르면 생기는 일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는 탑과 관련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일 확률이 높고 그 외에 페이지에는 엘하임이 설명하려 했던 탑의 환경과 등반하는 방법이 적혀있을 확률이 높을 터.
김신은 침중한 표정을 지은 채로 생각에 빠져있는 한유성을 뒤로 한 채 다음 페이지를 집어 들었다.
***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계가 맞이할 종말을 적어놓은 엘하임의 예언서는 그 최악의 결말을 피할 방법 또한 적어놓았다.
탑을 오르는 방법과 층에 대한 설명.
-탑의 다섯 번째 층은 다른 층과는 다르게 그 세계에서 가장 강했던 존재를 잡는 것이 아닌, 특수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
물고기, 꽃, 나비, 새.
탑의 다섯 번째 층은 재앙을 맞이하는 그대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장소이며, 가장 위험한 층이기도 하다.
오르는 순간 그대가 사는 세계에 게이트가 열리기 때문이다.
탑을 오르는 이에겐 휴식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더 힘든 시련을 닥치게 하는 장소.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탑은 공평하지 않다.
힘을 얻는 것은 대가가 필요하고, 그 대가는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될 것이다.
바로 옆의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면 계속해서 시련을 헤쳐나가라.
다섯 번째 페이지의 석판은 말 그대로 지금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정보가 적힌 페이지였다.
앞으로 등반할 10층에 대한 정보가 적혀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동시에 등반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페이지이기도 했다.
10층에 오르는 순간, 지구에는 게이트가 열린다.
이미 한 차례 구원회의 회장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기에 힘든 이 상황에 다시 게이트가 열린다니.
물론, 엘하임이 적어놓은 석판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게이트가 열리는지 적혀있진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준비는 더욱 확실하게 해야하는 법.
“이번 석판의 정보는 생각보다 크군요.”
침중한 표정을 생각에 잠겨있던 한유성이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구체적인 정보가 적혀있나?”
“예.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리 좋지도 않습니다.”
좋지 않다는 말에 얼굴이 굳는 한유성에게 피할 수 없는 미래를 알려주었다.
“10층에 오르는 순간, 지구에 게이트가 열릴 겁니다.”
3.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던가.
하지만, 한유성은 김신의 말을 듣고 차마 그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게이트? 게이트가 열린다고?”
“석판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될 겁니다.”
“위치는 특정할 수 있나?”
“알 수 없습니다.”
대피하고 대비해도 언제나 피해는 있다.
단순히 건물만 무너진다고 해도 그들의 삶이 터전이 무너지는 거니까.
“출현하는 괴수의 등급은?”
“그 또한 직접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직접 부딪혀봐야 한다는 말이군.”
“그래도 미리 알고 대비할 수 있으니, 예전처럼 큰 피해가 있진 않을 겁니다.”
“그래...대비를 할 수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구만. 2년 전과 같은 상황은 없을 테니 말이야.”
지금으로부터 2년 전.
5층을 등반한다고 말이 많았던 그때, 열렸던 S급 게이트.
처음 열렸던 S급 게이트에 처음 보는 형태의 괴수였다.
체고 20m의 거대한 개의 형태를 한 세 개의 머리가 달린 괴수.
켈베로스라 이름 붙은 그 괴수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고, 건물의 파괴는 물론 늦게 그 사태를 깨닫고 토벌하러 간 헌터들 까지 큰 피해를 입었던 사건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때와 다르게 이번에는 석판이라는 정보를 이용해 미리 대비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큰 피해는 막을 수 있다.
정보의 공유가 필요하지만, 나 하나 살자고 다른 나라, 다른 이에게 피해를 입힐 순 없는 노릇 아니겠나.
그리고 한유성이 한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무언가를 생각하던 김신이 자신을 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다른 걸 떠나서 다른 길드와 다른 나라의 연합에 정보의 공유와 함께 지원을 요청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어쨌든 탑의 10층에 오르면 열리는 게이트에 대한 대책은 내가 다른 길드장들과 상의해서 준비할 테니, 자네는 먼저 10층을 등반하게나.”
“길드레이드로 안 하십니까?”
“탑 등반을 왜 길드레이드로 하는지 아나?”
“화력을 모아서 최대한 피해를 안 입으려는 거 아닙니까?”
“그걸 아는 사람이 지금 내게 왜 길드레이드를 안 하냐고 물어보는 건가?”
“...?”
내뱉는 말의 뜻을 파악하지 못했는지 눈을 끔뻑이는 김신.
눈앞에 있는 김신은 가끔 이렇게 사람을 멍하게 하는 재능이 있다.
“자네와 자네의 5팀이 화력이 부족하나 생각하나 아직도?”
이제는 자신이 직접 싸운다 해도 쉽사리 승패를 장담하기 힘든 수준의 실력의 김신.
그는 그런 강한 힘을 가지고도 여전히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제야 말의 본의를 알았는지 김신은 씨익, 미소지으며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그건 아니죠. 저희 팀은 강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