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1.
머리로는 행할 수 있지만, 몸이 한 박자 늦게 따라오는 미묘한 간극.
그 간극을 없앨 방법은 수련이다.
“검을 휘두를 때는 호흡과 함께 뻗어라!”
“상단세의 핵심은 흔들림 없는 자세다. 하체에 더욱 힘을 줘!”
높은 담벼락 바깥으로 들려오는 목소리.
길드원에게 검술 지도를 하고 있는 태진성의 목소리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한계에 다다른 길드원들의 거칠어진 기합에 수련이 끝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태극검술길드의 웅장한 대문 앞에 서자.
덜컹!
문이 벨 누를 필요도 없이 스스로 열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전음.
-왔나.
난이도 높은 기술인 격공섭물(隔空攝物).
내공을 이용해 떨어진 곳의 물건을 조종하는 기술로 문을 여는 태진성의 모습에 소소한 감탄이 튀어나왔다.
대문에 달린 자그마한 버튼을 누를 정도의 섬세한 내공 수발.
열린 문을 통해 들어간 김신은 수련을 끝마친 길드원들의 인사를 받는 태진성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승급 축하하네. 바빠서 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방송은 봤다네.”
“감사합니다.”
“이제 자네도 길드를 만들 수 있겠어?”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길드를 만들어도 운영할 시간이 없을 것 같거든요.”
“그건 그렇겠지 워낙 바쁘니 말이야.”
연무장의 뒷정리까지 지켜보던 태진성은 전부 다 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몸을 돌려 자연스럽게 개인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깐, 연무장?
왜 이쪽으로 가는 거지?
“이쪽으로 가면 연무장 아닙니까?”
“맞네.”
간단하게 조언만 얻고 가려 했는데, 뭔가 이상하다.
그런 생각을 하길 잠시.
연무장에 도착하자 태진성이 몸을 풀며 김신에게 말했다.
“오늘 대련하러 온 거 아닌가?”
“대련이라기보다는 간단한 조언 좀 듣고자 했습니다만...”
“조언은 무슨. 이제 자네나, 나나 똑같은 경지를 밟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 나도 이 이상은 알고 있는 게 없어.”
그렇게 말한 태진성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서 다시 김신에게 말했다.
“아니, 애초에 내가 알려준 건 별로 없었는데 그걸 스스로 깨달은 걸 보면 자네도 참 괴물 같은 재능이긴 해.”
“그저 열심히 정진했을 뿐입니다.”
“노력, 노력이라···. 자네, 요즘 하윤이가 하루에 몇 시간을 수련하는 줄 아나?”
“태하윤 씨요?”
“그래.”
“몇 시간을 수련합니까?”
“12시간. 밥 먹는 시간과 쉬는 걸 빼고 순수하게 검을 휘두르는 시간일세.”
12시간.
그 시간이 모두 순수하게 검을 휘두르는 시간이라니. 입이 떡 벌어진다.
“···지독할 정도로 수련하시는군요.”
“원래 하윤이도 하루에 8시간밖에 수련하지 않았었네.”
변한 것엔 이유가 있을 터.
김신은 겉옷을 벗어서 연무장 옆 마루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이유가 뭡니까?”
“자네 때문이네.”
“제가 왜...”
“빛나는 재능을 따라가고자 하니, 노력할 수밖에.”
태진성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가 하는 이야기가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현경이라는 경지는 노력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경지라고.
그리고 태진성은 그런 김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원래 천재들은 자신의 재능을 모르는 법이라네.”
“제가 경솔했군요.”
“아니야. 재능이 있어도 노력을 하지 않으면 올라설 수 없었겠지. 어디까지나 그 경지는 자네의 손으로 움켜쥔 거니, 미안해하지 말게나.”
대화를 끝으로 몸풀기를 끝마친 후 연무장에 올라서 태진성을 마주 봤다.
“나나 자네나 이 경지에 맞는 기틀을 닦아야 하니, 대련이나 해 보자고.”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스릉-
대련용 검이 아닌, 진검.
김신은 서슬 퍼런 예기를 흩뿌리며 나온 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
초절정과 화경의 경계에 멈춰선 태하윤.
육체적인 성장은 이미 극한의 수련으로 인해 벽을 넘었지만, 정신적인 깨달음이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막혀있었다.
‘답답해...’
그러던 와중 김신이 왔다는 말에 태하윤은 김신을 쫓았고, 곧 그가 자신의 삼촌인 태진성과 대련하러 갔다는 것을 들었다.
“또 대련이야?”
수련, 수련, 수련.
올 때마다 삼촌만 만나서 대련하고 가버리는 사람.
태하윤이 그런 김신과 대화라도 할 방법으로 선택한 방법은 같은 경지에 올라서서 대련하는 것이었는데...
“화경에 올라 선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삼촌이랑 같은 경지까지 올라 선거야.”
절로 허탈함이 느껴질 정도로 차이가 나버린 상황에 한숨을 내쉰 태하윤은 마루에 앉아 멀찍이서 대련 중인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봤다.
챙챙!
힘을 빼고 하는 대련이 분명한데도 검격이 일 초에 십수 번씩 얽혔다가 떨어진다.
태진성이 사용하는 검은 유(柔)의 극치인 태극혜검.
대성한다면 그 어떤 공격이든 전부 되돌릴 수 있다는 검이다.
그에 반해 김신이 사용하는 검은 독특했다.
형(形)이 구체적이지 않다.
때에 따라 태극혜검처럼 공격을 모조리 흘리기도 하고, 한없이 빠르게 몰아치기도 하며, 막는 모든 것을 부숴버리겠다는 듯이 강하게 공격하기도 했다.
“형(形)이라...”
형(形)은 검의 방향이다.
방향이 틀어지면 위험할 테지만, 때때로 돌아가는 것도 옳은 것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태극혜검에도 엄연히 쾌의 묘리가 들어간 검세가 있으니까.
그동안 고수해왔던 더 빠르고 더 강한 동작이라는 고집을 내려놓고 조금은 유연하게 생각하자, 그동안 막혔던 부분이 자연스럽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2.
말이 대련이지 눈앞을 지나가는 태진성의 검을 보면 이건 거의 생사결(生死決)이라 생각할 정도로 매서웠다.
챙챙!
하지만, 지금 검과 검이 부딪치는 것을 보면 전과는 다르게 받아낼 법한 것도 사실.
“확실히 엄청난 재능이야. 얼마 전과는 다르게 이젠 제법 여유롭게 받아치니 말이야.”
그러한 변화를 체감한 것은 태진성도 똑같은 것 같았다.
“대련을 시작할 때만 해도 머리와 몸이 한 박자씩 따로 노는 것 같았는데, 이게 왜 이런지 알겠군요.”
“심(心)과 체(體)가 따로 노니 그런 거지.”
본디 곧바로 명상해서 깨달음을 정리해 체화시켜야 했지만, 그 당시에는 그 깨달음을 정리할 틈도 없었으니 그 미묘한 어긋남이 계속해서 몸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몸을 움직여서 조율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군요.”
“그렇지.”
계속해서 태진성과 공방을 주고받으며 심(心)과 체(體)의 미묘한 간극을 거의 다 줄였을 즈음.
────!
“...!”
뒤편에서 강력한 내공의 파동이 느껴졌다.
“뭐지?”
김신과 태진성 모두 검을 내려놓은 채로 뒤를 바라보자, 마루 위에서 가부좌를 튼 상태로 명상에 빠져있는 태하윤이 보였다.
“벽을 넘은 것 같군요.”
“그렇군. 자네 덕분이야.”
“예? 그게 무슨-”
질문을 하기도 전에 저 멀리 가버린 태진성.
대련을 시작할 때쯤부터 보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떤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연무장에서 떨어진 건물의 마루 위에 올라간 태진성이 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이제 점심을 먹고 오후 수련을 지도해야 하니, 자네에게 하윤이를 부탁해도 되겠나?”
“예, 뭐. 괜찮습니다.”
목표를 이뤘으니 남는 시간 정도야 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본 태진성이 돌아가고 난 후, 김신은 가부좌를 튼 채로 명상에 잠긴 태하윤의 옆으로 걸어갔다.
뽀얀 피부와 가지런한 눈썹.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가 매력적인 그녀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김신은 문뜩 태진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빛나는 재능을 따라가고자 하니, 노력할 수밖에.
이러니저러니 해도 태하윤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다.
‘다음에 또 검술길드에 오면 한 번씩 검이라도 나눠봐야겠네.’
조용히 그녀의 곁에서 앉아서 도봉산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꼬르륵-
고픈 배가 밥을 달라 소리치는 것을 느끼며 옆자리를 본 순간.
“배고파요?”
“...헛!”
언제 명상을 끝마쳤는지 한층 정순해진 기운을 내뿜고 있는 태하윤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언제 눈뜬 거예요?!”
“김신 씨 배에서 천둥이 쳤을 때?”
내 배에서 울린 뱃고동 소리에 명상에서 깼다니.
이거 미안하게 됐구만.
“저 때문에 집중이 깨진 거면-”
“아니에요. 깨달음은 이미 잘 갈무리했어요.”
“휴, 다행이네요.”
자리에서 일어난 태하윤이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제 깨달음에 도움을 줬으니 보답을 안 할 수가 없네요.”
“깨달음이요?”
깨달음을 얻는데 도움을 줬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니, 태하윤이 싱긋 웃으며 그 과정을 설명해줬다.
“···이렇게 시작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까 어느새 벽을 확실히 넘었더라고요.”
이상한 점이 있었다.
너무나도 빠른 체득과 환골탈태를 하지 않았다는 점.
“이미 환골탈태를 했었어요?”
“네.”
“그런 경우가 있긴 합니까?”
“신기하다고 하던데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극한의 수련으로 인해 육체적인 성취가 먼저 도달했다고 했다.
“신기하네요.”
“어쨌든 확실히 도움을 얻었으니, 밥이나 먹으러 가죠. 제가 살게요.”
“뭐, 사주신다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태하윤을 따라 일어선 김신은 하려던 말을 했다.
“아, 참. 다음에 방문하면 저랑 대련하실래요?”
그 말에 몸을 돌린 태하윤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좋아요. 기다릴게요.”
3.
태극검술길드와 수호길드를 오가며 태진성, 태하윤과의 대련과 토벌, 순찰을 번갈아 한지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그 결과.
둥실둥실.
김신의 앞에서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잡힌 듯 허공에 떠 있는 검.
김신은 그 검을 마치 손으로 휘두르는 것처럼 휘둘렀다.
휙휙!
내공으로 사물을 조종하는 격공섭물.
현경의 상징과도 같은 그 격공섭물의 묘리를 깨우칠 수 있었다.
“축하하네.”
“그간의 대련에 결과가 참 값지군요.”
“앞으로도 종종 찾아오게.”
활용할 방법이 다양한 기술을 익혔다.
일주일간의 노력을 뒤로 한 채 태극검술길드에서 나오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태하윤.
“이제 가는 거예요?”
“미묘하게 어긋난 부분이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이제 수련은 끝내야겠죠?”
“아쉽네요. 그동안 도움 많이 받았는데.”
아쉬움이 묻어나는 그녀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종종 들릴게요.”
“정말이죠?”
“예. 정말이요.”
태하윤과의 대련도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서 도움이 되었기에 나쁘지 않았다.
나름대로 도움을 줬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기분도 좋았고.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
[한유성]
“예, 전화 받았습니다.”
전화를 받아든 김신의 귓가에 한유성이 기다리던 소식을 알려왔다.
-자네가 찾던 석판을 입수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