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1.
구원회의 회장이 열어버린 게이트 때문에 서울을 비롯한 지방 도시의 도심지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길드에 소속된 헌터들의 도움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력 덕분에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공공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구원회의 수장이 사라지자 치안 또한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그렇게 서울을 뒤집어 놓았던 사건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 한유성은 연합의 회의실에서 연합장과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석판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감정이 되지 않는 석판 모양을 한 아티펙트의 행방을 대한민국 길드만이 아닌 다른 국가의 연합에도 전파해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연합장의 말에 한유성은 잠시 말하지 않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외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강력한 빌런 하나가 벌인 미친 짓이겠지만, 사실 이 이면엔 종말과 관련된 정보가 숨어 있다.
김신의 말로는 석판의 내용이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 정보의 노출을 최소로 해달라고 부탁받았지만, 어쨌든 석판이 다 모이고 내용이 해석된다면 탑을 오르는 것은 아티펙트를 위해서가 아닌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해서로 바뀔 것이기에 한유성은 그때를 위해서 미리 정보를 흘렸다.
“석판을 감정했던 감정사가 있는데, 그의 말로는 석판에 적힌 내용이 구원회가 주장했었던 종...아니, 재앙과 관련이 있다고 했었습니다.”
한유성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큰 문제다.
생각 이상으로 무거운 내용에 연합장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되물었다.
“내용을 밝혀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직 석판이 모이지 않았기에 자세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탑과 다가올 재앙이 관련 있다는 것 정도는 설명해 드릴 수 있겠군요.”
“그 말은 석판마다 다른 내용이 적혀있다는 이야기인 겁니까?”
“예, 맞습니다. 참고로 그 석판에 적힌 문자는 아예 해석이 불가하기에 내용을 알고자 하면 감정을 해야 하니, 더더욱 다른 나라에 말해서 석판을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미안한 부탁이지만, 석판을 구하는 과정에서 이 정보는 함구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탑과 재앙.
한유성의 말을 들은 연합장은 잠시 말없이 고민에 빠졌다.
“...”
그런 연합장의 모습에 한유성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를 보았고, 고민이 끝난 연합장은 고개를 들어 한유성과 눈을 마주쳤다.
“석판의 감정이 불가능하니 요구는 해볼 수 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탑에서 나온 아티펙트인 것을 감안하면 그냥 달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타당한 요구.
한유성은 이미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 있었기에 연합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받아야 할 아티펙트의 일부를 사용할 생각이니까요.”
“그렇다면 곧바로 건의해 볼 수 있겠군요.”
“최대한 빨리 부탁드리겠습니다.”
***
김신은 모르는 한유성과 연합장의 회동이 있고 난 후.
김신은 청계산 일대에서 5팀과 함께 게이트가 열렸을 당시 떨어졌었던 괴수들의 잔챙이들을 처리하고 길드로 복귀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며칠 사이에 확연히 는 팀원들의 실력을 본 김신은 대기실의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다들 많이 늘었네?”
“팀장님 안 계시는 동안 훈련을 좀 빡세게 했습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천명화.
김신은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명화가 저렇게 말하니 못 믿겠네, 인아야 사실이야?”
“응. 한우 오빠가 오빠 없을 때라도 미리미리 훈련 좀 해두자고 해서 그동안 비지땀 좀 흘렸지.”
잔챙이라고는 하지만 개체 별로의 등급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A~C급 수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리는 모습 없이 수월하게 토벌을 끝낸 팀원들의 모습에 김신은 송인아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고생했네.”
송인아의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이는 김신의 모습에 천명화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김신에게 말했다.
“팀장님 제 말엔 신용이 없는 겁니까...”
“...”
“왜 말이 없으신 거죠?”
“...”
“팀장님?”
“···미안.”
말없이 고개를 돌리는 김신의 모습에 천명화는 하늘을 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었다.
“하하하...”
한동안 그렇게 소소한 대화를 이어나가던 도중 김신의 핸드폰이 울렸다.
-길드장님.
발신인은 길드장님.
김신은 잠시 팀원들에게 손짓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예. 전화 받았습니다.”
-전에 말했던 부탁은 연합장을 통해 전달했네.
“감사합니다.”
-뭘, 어차피 감정도 못 하는 물건에 적당히 값을 쳐주겠다고 하니, 그쪽도 기분 좋게 받아 주더구만. 그리고 석판에 관한 정보를 아주 조금 알려주었다네.
“이유가 있습니까?”
-구원회가 사라진 이상, 아마도 연합은 일반 시민과 헌터의 위협거리가 없다고 생각할 걸세.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게이트 그 자체의 위협이 끝난 건 아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훗날의 위험에 대비하자는 차원에서 석판과 재앙이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네. 물론 연합장에게는 그 사실은 함구해달라고 했으니 괜찮을 걸세.
어차피 알아야 할 사실을 발언에 힘이 있는 한유성이 먼저 말했다는 것은 나쁘지 않다.
훗날 추가적으로 정보를 알려줄 때 조금 더 받아들이기 쉬울 테니까.
그리고 석판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려준 것이 아닌 귀띔 정도로 알려준 것이기에 더욱 나쁘지 않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자네가 발품 팔아 알아낸 걸 전달만 했을 뿐인데 고생은 무슨.
그렇게 말한 한유성은 곧바로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는 듯이 작게 탄성을 내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자네가 알아둬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네.
“어떤 겁니까?”
-S급 승급이 이틀 후로 잡혔네.
“예? 그게 그렇게 빨리 나오는 겁니까?”
-이례적이지. 그만큼 구원회를 진압한 자네의 공을 높이 사는 거야.
그 뒤로 소소한 대화를 주고받은 뒤 전화를 끊은 김신.
“···뭐해?”
주변에 몰려들어 귀를 기울이는 팀원들의 모습에 묻자, 천명화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팀, 팀장님. 승급하시는 겁니까?”
“아, 내가 아직 말 안 했구나?”
“진짭니까?”
“응, 구원회를 소탕한 것이 컸지.”
“그런데 왜 말씀을 안 해주신 겁니까?”
“바빴잖아.”
김신의 담담한 말에 옆에 서 있던 송인아가 김신의 팔을 찰싹 때리며 말했다.
“이 바보야! 그걸 바쁘다고 말 안 한 거야?”
“우리 방금까지 토벌하고 왔거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이렇게 좋은 소식을 전화로 들어야 했다고 푸념하는 송인아를 달래주며 고민했다
‘그나저나 이틀 후면 뭐해야 하지?’
2.
하루 동안 마시고 놀며 회포를 풀고 나니 어느새 날이 또 한 번 돌아 어느새 이틀이 지났다.
어느새 다가온 승급일.
시간에 맞춰서 준비하던 김신은 승급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기뻤다.
S급 헌터는 헌터들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헌터다.
한때는 꿈이라 생각했었던 자리.
골동품을 감정하며 몸이 멀쩡해지고 수련과 실전을 통해 점차 강해지는 것을 느끼며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렇게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며 지금까지 쭉 달려온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기쁠 수밖에.
실적, 실력.
두 가지를 증명하지 못하면 밟지 못하는 S급의 벽.
굵직굵직한 사건과 토벌에는 항상 그의 이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거다.
“이제 나가 볼까.”
약속된 장소는 연합의 건물.
S급 승급의 경우에는 다른 등급과 다르게 독자적인 방송을 송출하고, 시민들이 승급식에 참가할 수 있게 된다 했다.
새로운 영웅의 탄생.
시민들에게 S급 헌터가 지닌 무게감이 대단한 만큼 분위기를 환기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진행되는 거겠지.
집 밖으로 나오자 대기 중인 한 대의 차.
고급스러운 세단 앞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가 김신의 모습을 보고 다가와 물었다.
“김신 헌터님 맞으십니까?”
“예.”
“길드에서 준비한 차이니 뒷좌석에 탑승해주시길 바랍니다.”
“연합으로 가는 겁니까?”
“아뇨. 먼저 들릴 곳이 있습니다.”
“들릴 곳이요?”
“예. 오늘 승급식에 입을 옷을 준비해뒀습니다.”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차에 탑승하자, 곧바로 울리는 전화.
-한설.
김신은 미묘한 타이밍에 온 그녀의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예, 한설이에요. 저희가 보낸 차에 타신 건가요?
“아, 이 차를 보낸 게 한설 씨입니까?”
-네.
“지금 승급식에 입을 옷 찾으러 간다고 하는데 S급 승급식은 뭔가 다른가요?”
-다르죠. 아주 많이요. 솔직히 말하자면 승급하는 사람이 얼마 없기에 더욱 크게 이슈로 만드는 거예요.
“생각보다 부담스러운 자리였네요.”
-그래도 참아요. 부끄러운 건 한순간이니까. 어쨌든 지금 들릴 샵에 먼저 가 있을 테니 거기서 보도록 하죠.
도와주려는 한설의 목소리를 듣자, 승급식이 생각보다 부담스럽지 않았다.
“네. 거기서 봐요.”
전화를 끊은 김신은 의자에 기대며 차량의 천장을 봤고, 눈에 확 들어오는 모습에 조용히 탄성을 냈다.
“오...”
지붕에 마치 별처럼 촘촘히 박혀있는 조명이 보인다.
이건 또 안 세볼 수 없겠지.
그렇게 아늑한 승차감과 함께 조명을 세며 시간을 때우자 어느새 도착한 샵에 도착했다.
***
승급식에 입을 정장과 구두, 헤어스타일을 동시에 해결할 샵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한설.
그녀는 김신이 도착할 시간이 되자, 그와 통화할 때의 담담한 모습은 일절 없이 오히려 그녀 스스로가 더 떨리는 감정을 느꼈다.
‘정장은 맘에 들어 할까? 잘 맞아야 할 텐데. 근데 나 지금 왜 이렇게 떠는 거야!’
한유성의 S급 승급 당시에도 이렇게 까지는 떨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고개를 흔드는 사이 어느새 도착한 김신이 탄 차.
차에서 내리며 반갑게 인사하는 김신의 모습에 한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당황한 표정을 지우고 밝게 웃으며 답했다.
“오셨네요. 들어가죠.”
“옙.”
3.
역시 남자는 머리빨과 옷빨이다.
풀세팅을 끝마친 김신의 모습은 말 그대로 연예인 뺨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확 바뀐 김신의 모습을 감상하던 한설은 옅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 길드의 광고는 제가 아니라 김신 씨에게 들어오겠는데요?”
“네? 에이. 저는 그냥 평범한 외모의 S급 헌터지만 솔직히 한설 씨는 이쁘잖아요.”
“이쁘다고...”
김신은 얼굴을 붉히며 쑥쓰러워하는 한설의 모습을 보지 못 한 채, 계속해서 이어 말했다.
“사실 남자라면 한설 씨를 안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걸요. 근데 저는 제 외모를 대체 할 사람이 많으니까 아무리 봐도 광고는 한설 씨가 찍어야 해요.”
그렇게 말한 김신이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혼자서 무언가를 속닥거리는 한설의 모습이 보였다.
“좋, 좋아...”
그런 그녀의 모습에 김신은 그녀의 어깨를 슬쩍 흔들었고, 한설은 깜짝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며 김신을 쳐다봤다.
“괜찮아요?”
“아, 네, 네. 괜찮아요...”
“이제 출발해야 하는데 같이 가죠.”
“네?”
“같이 가자고요.”
“혼자 안 가고요?”
“자리는 넉넉한데 싫어요?”
같이 간다는 의미를 모르는 김신의 말에 가볍게 한숨을 내쉰 한설은 그에게 답했다.
“전 따로 갈 테니, 나중에 봐요.”
“옙. 알겠습니다.”
차에 타자 창문 너머에서 내뱉은 한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바보...
***
한설의 마지막 말을 곱씹으며 도착한 연합의 건물.
큰 행사가 있을 때만 열리는 부설된 건물의 문이 활짝 열려있었고, 그곳에 입구부터 쫙 깔린 기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많네.’
행사의 시작은 지금부터.
부담스럽긴 하지만, 이제부터 받아야 할 시선의 무게이기에 마음을 다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스윽-
부드럽게 열린 문을 통해 차에서 내리자, 눈앞에서 터지는 플래시와 함께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승급의 절차는 S급 헌터로 등록하는 것과 보상을 수령하고 소감을 밝히는 것.
그 외에도 다른 헌터들의 보상이 같이 껴 있었기에 건물의 근처에는 별동대로 출전한 다른 S급 헌터들도 꽤 보였다.
‘나도 이제 저 사람들과 같은 곳에 선 건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걷는다.
김신은 환호성을 지르는 시민들을 마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