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1.
김신의 의념으로 만들어졌던 묵빛 공간이 사라지자, 태진성이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믿기 힘들구만.”
“예?”
“자네도 알지 않는가. 내가 지금 무얼 말하는지.”
경지상승에 대한 이야기.
아직 깨달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긴 했지만, 어쨌든 축하하는 것이기에 김신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답했다.
“감사합니다.”
“아닐세. 자네 스스로가 도달한 경지이니 말이야.”
그렇게 말한 태진성은 잠시 조용히 서서 생각했다.
도움을 받을 것이 없으니, 이제는 그가 태극 검술 길드에 오던 발길을 끊을 것인가.
고민을 끝낸 태진성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김신의 속내를 떠봤다.
“그나저나, 이제 내가 자네에게 도움을 줄 수가 없어서 아쉽구만.”
“아닙니다. 제가 태진성님에게 도움받을 수 있는 것은 비단 경지에 관련된 것만 있겠습니까? 깨달음을 체득하는 것과 그것 말고도 검사에게 대련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니 종종 찾아가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 김신의 입에서 나오자, 태진성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렇게 하게. 내 언제든지 자네를 기다릴 테니.”
***
강력한 소수와 다수의 전투.
탑의 9층과 연결된 포탈을 통해 이동한 별동대의 피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경상자 7명.
기습이라는 전략과 사령관이라 볼 수 있는 회장의 부재.
간부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별동대의 집요한 공격에 얼마 못 가 죄다 쓰러졌기에 지휘계통이 마비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태진성과 한유성이 활약해주었기에 상황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끝났다.
구원회와의 전투는 끝났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
“우선 남은 괴수들부터 토벌하도록 합시다.”
한유성이 한 말처럼 구원회는 대부분 소탕되었지만, 아직 괴수들이 많이 남았기에 별동대는 주변으로 괴수들을 소탕하러 갔다.
“저는 여기 남아서 조각상을 복구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걸 복구할 방법이 있나?”
“확답은 드릴 수 없지만, 충분히 해 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각상에서 나오는 불길해 보이는 검은 기운이 닿은 동식물들이 계속해서 변이하는 것을 보면 조각상의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는 이상은 토벌 자체가 임시방편일 뿐이다.
그런 김신의 생각을 읽었는지, 한유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답했다.
“몸을 추스르면서 방법을 찾아보게.”
“감사합니다.”
그렇게 김신은 흩어지는 별동대를 뒤로한 채 홀로 조각상의 앞에 남았다.
누워있는 여성을 조각한 조각상.
사각형의 사원 중앙을 가로지른 조각상의 크기는 컸고, 파괴된 부분은 조각상의 크기를 생각해보면 그리 크지 않았다.
‘먹힐까?’
김신이 생각한 방법은 사라진 회장의 품에서 나온 회복의 녹옥을 이용한 복구 방법.
물론 그냥 사용할 생각은 아니었다.
파괴의 홍옥과 회복의 녹옥 그리고 변화의 구슬과 갈색의 보석.
창조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전설의 아티펙트를 이용해 복원을 시도한다는 계획.
김신은 계획의 실현에 앞서 가게의 비밀장소에 숨겨진 변화의 구슬을 가져오기 위해 회장이 남긴 또 하나의 아티펙트인 차원의 파편을 손에 들었다.
조용히 살펴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뜨는 문구.
[사용자의 염(念)을 엿봅니다.]
김신은 잠시 아티펙트에 담긴 기억을 살펴봤다.
2.
공(空)의 영역에서 살던 어떤 존재는 자아를 얻음으로써 공(空)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비어있다는 말은 그 어디와도 통한다는 의미.
세상에는 비어있는 공간은 너무나도 많았고, 공(空)의 영역에서 살던 존재는 그러한 공간을 넘어 다니며 이곳저곳을 누볐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 존재가 살던 영역은 일반적인 생명체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공간이기에.
무엇도 없기에 살아남지 못한다.
무엇도 없기에 존재하지 못한다.
공의 영역에 살던 존재가 자아를 얻은 것 자체가 인간에게 아니, 모든 생명체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미지는 곧 두려움.
이성(理性)과 논리(論理)로 판단할 수 없는 존재의 등장에 인간은 그 존재를 불가사의한 신(神)으로 받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공의 영역에 마나라는 기운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곧 그 마나는 변질되어 버렸고, 그렇게 생긴 변질된 마나는 다시 공간을 넘어 다니는 공의 존재의 출현과 함께 세상에 퍼져 그곳을 오염시켰다.
생명을 가진 생명체를 비틀린 존재로 바꿔버린 힘.
바로, 마기라는 형태로.
공의 존재는 나타나는 곳마다 재앙을 일으켰고,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며 그가 남긴 재앙을 딛고 일어섰다.
그가 남긴 재앙의 흔적인 괴이한 존재를 물리칠 수 있도록 강해졌다.
또다시 시간이 흘러.
힘에 눈을 뜬 인간은 곧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고, 마침내 공의 존재를 상대했다.
악신을 타도한다.
결국, 인간은 그 존재를 쓰러트렸다.
문제는 거기에서 발생했다.
공의 영역을 다스릴 존재의 부재.
곧 공의 영역은 그들이 살던 공간을 잠식했고, 기괴하게 바꾸어 버렸다.
그중 공간을 다루는 힘을 가진 파편을 손에 넣은 인간 아니, 인간이었던 그 무언가.
회장의 변한 모습과 비슷하게 바뀐 그들은 이성이 남아있을 때 생각했다.
다가올 새로운 재앙에 앞서 위험하지만 강대한 힘을 가진 공의 존재의 파편을 이성이 있는 이들에게 전달하자고.
그들은 불안정해진 공의 영역에 차원의 파편을 비롯한 여러 가지의 아티펙트를 집어넣었다.
***
[초월등급 아티펙트를 감정하였습니다.]
기억을 훑어본 김신은 표정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공의 영역?’
차원의 파편을 이용해서 가게에 있는 변화의 구슬을 가져오려고 기억을 훑어본 것인데, 생각 이상의 엄청난 사실을 알아버렸다.
지잉-
손에 쥔 보랏빛 아티펙트를 사용하자, 눈앞에 열리는 게이트.
너머에 있는 가게의 비밀 공간에서 변화의 구슬을 꺼내온 김신은 바닥에 아티펙트를 늘여놓으며 차원의 파편에 대한 고민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지금은 불길한 기운을 계속해서 뿜어내는 조각상에 대한 복원이 문제였기에.
과거 변화의 구슬을 통해 봤었던 기억.
그 기억에는 봉인되었던 아티펙트의 봉인을 푼 것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원래 합쳐져 있던 아티펙트를 누군가 인위적으로 나누어 흩어놓았다는 것.
신(神)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아티펙트였던 만큼, 노리는 사람이 많기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이었겠지.
잠시 딴생각을 한 김신은 앞에 놓인 네 가지의 아티펙트 중 가장 먼저 변화의 구슬을 집어 들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아티펙트.’
변화의 구슬의 진정한 사용 방법은 융화(融和).
다른 세 가지의 아티펙트를 변화의 구슬 옆에 가져가자, 마치 김신의 몸을 뒤덮었던 것처럼 천천히 다른 아티펙트를 삼켰다.
파괴의 홍옥에 이어 회복의 녹옥 그리고 마지막으로 갈색의 보석까지.
다른 세 가지의 아티펙트를 감싼 변화의 구슬은 천천히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마치, 왕관과도 같은 형상으로.
파괴의 홍옥과 회복의 녹옥 그리고 갈색의 보석이 세 방위에 자리를 잡았다.
스르륵-
모든 과정이 끝나고 자리에 남은 것은 신비한 빛을 뿜어내는 은색의 왕관.
김신은 그렇게 합쳐진 아티펙트를 들어서 천천히 머리에 썼다.
“,,,!”
착용과 동시에 느껴지는 엄청난 고양감.
네 가지의 아티펙트를 전부 사용해본 김신이었기에 본능적으로 아티펙트의 진정한 힘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파괴는 창조에 가장 필요한 요소 중 하나.
창조에 있어서 영생이란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모든 생명체는 끝이 있어야 후손을 남기고 주어진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기에.
회복은 그렇게 탄생한 생명체가 주어진 삶을 살 수 있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기반을 담당하는 갈색의 보석은 그들이 살아갈 세상을 만들었다.
변화는 모두를 아울렀다.
그렇기에 지금 김신은 이 아티펙트가 어떤 물건인지 깨달았다.
더없이 위험하고 더없이 치명적인 신의 도구.
평범한 사람도 큰 힘을 가진 사람도 모두 사용할 수 있다.
단지, 생명체를 창조한다면 인과(因果)의 영향을 받아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르지만.
‘인과를 다룰 수 있는 경지에 오르기 전에 사용한다면 이것마저 재앙이 될 여지는 충분하다는 건가.’
생명을 다룬다는 것 외에는 재앙에 가까운 힘을 끌어낼 수 있는 아티펙트.
김신은 악용할 생각이나 생명체를 창조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 힘을 이용해 지금도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조각상을 복원시킬 생각이었지.
심상(心想)으로 생각한 그대로를 구현하는 아티펙트.
김신은 천천히 조각상의 복원을 생각했고, 파괴의 홍옥에 의해 파괴되었던 조각상의 부서졌던 부분이 회복의 녹옥에 의해 다시 시간이 감기듯 복원되었다.
우웅-
김신의 손끝에서 나오는 녹색의 빛.
은은하게 퍼지던 녹색의 빛이 사그라들자 검은 기운을 내뿜던 조각상은 원래의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
3.
괴수의 토벌을 끝내고 돌아온 별동대.
김신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한유성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우선 급한 불은 끈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한 건가?”
한유성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이곳에는 모여 있는 사람이 많았기에 김신은 최대한 사실을 숨기고 말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회복의 녹옥을 사용해봤는데, 적용되더군요.”
“사람이 아닌 사물도 회복시킬 줄이야. 신기한 아티펙트로군.”
그 뒤로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그럼 이만 정리가 끝났으니 돌아가야 하지 않겠나?”
모인 사람들은 지금도 전투를 하고 있을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기 위해 귀환하고자 했고, 김신은 차원의 파편을 사용해 모두를 차례대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남은 마지막 사람인 한유성.
김신은 돌아가려는 한유성을 붙잡고 말했다.
“저는 조금만 더 이곳에 있다가 돌아가겠습니다.”
“왜 그러나?”
“해야 할 일이 남았습니다.”
9층의 보스가 없다.
이 말은 회장이 보스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열리지 않았다는 이야기고, 다른 무언가를 해야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열린다는 이야기다.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자, 한유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리하지 말게.”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게이트를 넘어간 한유성.
김신은 그가 사라지자, 게이트를 닫고 다시 조각상의 앞으로 돌아갔다.
거대한 조각상.
그리고 그 조각상에서 나오던 검은색 기운.
석연찮은 것이 많은 조각상의 모습에 김신은 조각상의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그렇게 모든 부분의 관찰이 끝나자 눈앞에 뜨는 문구.
[사용자의 염(念)을 엿봅니다.]
‘역시나.’
하나의 아티펙트인 조각상의 숨겨진 비밀.
김신은 9층을 등반할 수 있는 비밀이 담긴 조각상에 담긴 기억을 살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