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1.
10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자구책으로 회중시계의 힘을 빌려 위기를 탈출했다 하지만, 사실 시간을 돌렸다는 것은 어차피 겪었던 일을 다시 겪는다는 것.
무의미 한 거 아니야?
라고 물을 수 있겠지만, 지금의 김신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죽인다.”
팟!
10분 전의 상황과 동일하게 움직이는 회장의 움직임.
보고 파악하면 늦지만, 김신은 이미 공격이 어디로 올지 안다.
촤악!
처음 김신이 어깨를 베였을 때와 똑같이 섬뜩한 피육이 갈라지는 소리가 울렸다.
“...?”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
김신의 어깨가 갈라진 것이 아닌, 김신이 어깨를 노렸던 회장의 오른쪽 팔이 길게 갈라져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것.
그 모습에 분명 자신이 우위라는 것을 아는 회장의 얼굴이 미미하게 기울어졌다.
“왜? 뭔가 좀 이상해? 사실 나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는 동안 회장이 취했던 모든 동작을 눈여겨본다.
이것이 김신이 거꾸로 흘러가는 시간 동안 그가 취한 동작을 눈여겨본 결과였다.
“...”
갈라졌던 피부가 스르륵 붙으며 회복된다.
그 모습을 보는 김신은 괴물 같은 회복력에 고개를 저었지만, 그가 취할 동작은 이미 안다.
그의 호흡과 발의 움직임, 그리고 피격 직전 느껴지는 섬뜩함까지도.
검을 몸 앞으로 세워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의 공격을 따라잡을 자세를 취한다.
제대로 보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그가 움직이기 전에 미리 예지한 것과도 같은 모습으로 공격 경로에 검을 가져다 대면 되니까.
‘10분의 시간 동안은 회장의 공격에 카운터를 먹일 수 있다.’
휘둘러서 공격하는 것이 아닌 만큼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 못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롭게 시작된 전투에서 김신이 목표하는 바는 10분간의 카운터와 그 이후의 10분을 버텨내는 것.
‘부디, 이번엔 다른 결과를...’
공격의 경로를 알아도 도망칠 수는 없지만, 새롭게 얻은 10분이라는 가능성이 생겼으니 거기에 도박을 걸어보는 수밖에.
‘분명 기감이 예민한 길드장은 알아챘을 거야.’
할 수 있다면 팔 하나 정도는 날려봐야지.
그렇게 생각한 김신은 다시 방향을 트는 회장의 모습을 보며 그의 공격이 어디로 날아올지 예측했다.
***
베이고, 또 베인다.
분명 지금 김신의 수준에서는 자신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팟!
잔상만 남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 김신의 옆구리를 노리는 회장의 손톱.
검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그의 공격을 김신은 반보 옆으로 이동함과 동시에 검을 수평으로 세우는 것으로 받아쳤다.
‘이상해.’
마치 공격이 닿는 지점을 미리 알고 움직이는 듯한 대처.
몸을 뺏긴 채, 제 3자의 입장에서 전투를 바라보는 회장이었지만, 이 돌이 지닌 힘과 변한 자신의 수준, 그리고 그렇게 늘어난 힘으로 김신과 자신의 차이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을 건드리지조차 못한다니.
“···죽인다!”
내면에 갇힌 회장의 자아가 내뿜는 감정의 변화.
그것을 감지한 진화의 돌은 김신을 더욱 강한 적으로 인식하고 더욱 빠른 공격을 감행했다.
맹렬한 공세에도 꿋꿋하게 최소한의 간결한 움직임으로 공격을 막아내는 김신의 모습이 보인다.
그렇게 1분, 또 1분.
어느새 시간은 10분이 흘렀다.
2.
어렵게 얻은 시간을 최대한의 노력을 통해 무사히 막아냈다.
물론, 처음과는 다른 행동에 공격의 방향이 미묘하게 달라진 회장의 공격이 사이사이 섞여 있었지만, 무인의 눈썰미는 그 짧은 시간에 그가 취하는 행동의 패턴을 꽤 자세하게 파악했다.
‘확실히 이성이 없어진 만큼 공격의 투로는 단순해. 변수가 거의 없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움직이지 않고, 극한의 집중력을 유지하며, 그의 움직임을 봐야 대처할 수 있는 정도다.
‘그래도 최선의 결과를 만들었다.’
어쨌든 처음 생각하고 목표한 것이 시간을 버는 것인 만큼, 지금의 상황은 예상보다 더 좋다.
아직 보석의 권능이라는 방법이 남아있으니까.
10분간의 전투로 무언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는지 검붉은 마나를 잔뜩 끌어 올린 채 공격을 시작하는 회장의 모습이 보였다.
팟!
투로가 단순하면 예측할 수 있다.
이 말은 공격해올 방향과 부위가 눈에 훤히 들어온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알고 맞아줄 수는 없는 법.
김신은 미리 수인을 맺어 준비했던 마법을 회장이 오는 경로 위에 깔아놨다.
‘그리스.’
예상대로 오른쪽 발을 잘못 디디는 바람에 앞으로 쭉 밀려오는 회장의 모습.
김신은 빠르게 검을 내뻗었다.
쐐액!
회장의 가슴을 오른쪽 위에서 대각선으로 길게 베어 들어가는 검격.
회장은 빠른 반사신경으로 다가오는 김신의 검격을 막으려 했지만, 김신은 이미 거기까지 예측했다.
‘라이트.’
김신의 왼손에서 밝게 빛나는 빛 덩어리.
라이트에 마나를 과하게 불어넣자, 생성된 빛 덩어리는 아주 밝은 빛을 뿜어내며 폭발했다.
“...!”
어두 칙칙한 공간 속에서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밝은 빛에 회장은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바로 지금이다.
김신이 예상한 회장의 행동은 여기까지.
판을 깐대로 행동해주자, 김신은 대각선으로 휘두르던 공격의 경로를 비틀어 회장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날아가던 검격이 휘청이며 회장의 목으로 향했다.
서걱!
생각했던 것보다는 얕다.
일격에 베어내려 했지만, 생각보다 얕았던 검격은 회장의 목을 반절 파고드는 것으로 끝났다.
검을 회수하며 즉각 뒤로 물러선 김신은 베인 목을 부여잡고 있는 회장의 모습을 봤다.
“크르르륵.”
짐승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낮은 소리가 회장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대체 뭐야.”
각성자라도 방금 그 공격은 목의 반절이 베였기에 즉사할 것이 분명할 공격이거늘 회장은 피를 흘리기는커녕 오히려 멀쩡해진 상태로 김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인다!”
달려드는 회장의 모습에 다시 품에 있는 보석을 꺼내 들려는 찰나.
쐐액! 콰앙!
어디선가 날아온 검강이 김신에게 접근하던 회장을 가격해 뒤로 날려 보냈다.
익숙한 기운과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
“고생했네. 한계 이상의 힘을 끌어내 오랫동안 버텨준 자네 덕에 수월하게 잔당을 소탕할 수 있었네. 이제 이 싸움의 마무리를 지어보자고.”
태극검술길드의 태진성.
그가 김신의 곁으로 다가왔다.
***
태진성의 지원은 위태로워졌던 저울의 균형을 맞추는 것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이쪽으로 가져오게 했다.
현경에 이른 검사의 완숙한 검술과 검강.
사선을 여러 번 넘어본 노련함은 태진성이 회장의 공격을 그리 어렵지 않게 막아내도록 만들었다.
챙챙!
짧은 사이에 열 번이 넘는 공격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었지만, 몸 곳곳에 자잘한 상처를 입은 회장과는 다르게 태진성의 모습은 옷의 끝자락이 찢어진 것 빼고는 멀쩡했다.
“확실히 집중해도 쉽사리 막기 힘들 정도로 빠른 공격인데 이걸 막아내는 것은 물론 반격까지 하다니. 역시 자네는 놀랍군.”
김신의 옆으로 물러서며 회장의 수준을 파악한 태진성의 말에 김신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빼고는 별로 힘들어 보이시지 않습니다?”
김신의 말에 가볍게 웃음을 내뱉은 태진성은 다시 회장을 향해 달려가며 김신에게 말했다.
“틈을 만들어 보겠네. 자네에게 나머지를 부탁하지.”
“예. 알겠습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김신은 태진성에게 버프를 걸어주며, 회장의 뒤를 노렸다.
3.
원거리, 근거리, 서포트.
김신은 그 어떤 위치에 세워놔도 모든 역할을 기대 이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회장과 태진성과의 전투에서 김신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은 원거리 서포트.
파지지직!
지팡이의 증폭효과를 받아 맹렬하게 스파크를 흩뿌리는 라이트닝 스피어를 회장의 등을 향해 날린다.
지지지직!
검붉은 마기와 충돌해 위력이 급감했지만, 전기라는 속성 자체의 효과는 남아있었다.
움찔!
몸이 반응하는 아주 잠깐의 경직.
찰나의 순간을 나누고 나누어 싸우는 상대와의 전투에서 잠깐의 움찔거림은 치명적이었다.
촤악!
“크아악!”
김신의 버프를 받아 한층 더 빨라진 검격과 마법으로 인한 틈을 노리고 베어낸 회장이 옆구리.
태진성은 오히려 그 잠깐 사이에 틈을 만들어 버린 김신의 모습에 속으로 웃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저리 쉽게 하다니.’
그저 시선만 끌어줘도 혼자서 그 어떤 역할이든 수행해낸다.
그야말로 다재다능(多才多能)
태진성은 김신의 공격에 맞추어 회장을 천천히 패배라는 절벽으로 몰아갔다.
***
위기와 기회는 언제나 한순간이다.
흐름이란 것이 그렇게 무서운 이유다.
김신의 적절한 마법 공격과 검강을 이용한 공격.
거리를 두고 태진성이 만든 빈틈을 집요하게 노리거나, 아니면 대놓고 강력한 공격을 해 태진성이 공략할 수 있는 틈을 만들어 버린다.
거리를 두고 공격하는 김신에게 달려가자니, 태진성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무시하고 태진성과 합을 나누자니, 계속 틈이 생긴다.
그야말로 어찌할 수 없는 진퇴양난.
회장은 앞에서 검을 나누는 태진성보다 오히려 김신이 더 거슬렸다.
자신보다 약한 것이 분명한데 공격을 쉽게 받아내고, 또 반격까지 한다.
심지어 이제는 거리를 두고 해괴망측한 이능을 사용해 집요하게 틈을 만들려고 한다.
자아는 깊숙한 곳에 잠겨 이성은 없지만, 내면에 잠든 회장의 감정에는 진화의 돌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크아아악!”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등에 달린 날개를 이용해 태진성의 공격을 한차례 받아낸 회장은 날개를 깔끔하게 포기하고 김신을 향해 쏘아지듯 내달렸다.
“어딜!”
회장이 몸을 돌리자마자 반응한 태진성이 검을 내질렀지만, 회장은 마기를 쏘아내는 것으로 맞받아쳤다.
콰앙!
정순한 내공과 탁한 마기, 상반된 두 힘의 싸움은 주변에 뿌연 먼지를 일으켰다.
“...!”
가려지는 먼지의 너머로 보이는 태진성의 당황한 표정.
회장은 먼지에 휩싸여 모습이 완전히 가려지자 곧바로 몸을 틀었다.
또다시 찰나의 시간.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닌, 김신에게 달려간 회장은 그를 향해 태진성에게 했던 것처럼 다시 한번 마기를 뭉쳐서 날렸다.
후웅!
붉게 타오르는 구체.
터질듯한 마기가 담긴 구체는 분명 직격 한다면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그것이다.
마기가 가득 담긴 공격을 김신이 막든 막지 않든 상관없다.
막으면 공격하고 막지 않고 피해도 따라가 공격한다.
그렇게 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회장의 눈에 들어오는 김신의 표정.
미소.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김신은 회장을 보며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