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1.
과거 김신에게 도움을 받아 화경의 끝자락에 도달한 태진성.
이후, 벌어진 구원회의 소탕 작전에서 강한 상대를 만나 생사의 사투를 벌인 끝에 벽을 넘어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
현경(玄境), 그 그득한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생사의 사투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직접 검을 들어 부딪혀 알아보게.”
그러한 의미에서 태진성이 김신에게 이렇게 말한 이유는 간단했다.
말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현경에 오르기 위해선 생사의 갈림길에서 위기를 오가며, 그 끝에 있는 삶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자신과 비슷하거나 강한 상대와의 싸움을 통해 직접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태진성 또한 검사이기에 김신의 엄청난 성장을 직접 경험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진짜 하시는 겁니까?”
“때로는 말보다 행동이 더 가치 있는 법.”
단호한 태진성의 말에 김신은 검을 천천히 빼 들었다.
스릉-
부드럽게 발검하며 오른발을 한 보 뒤로 빼는 것과 동시에 기수식을 취하는 김신.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태진성은 그가 도달한 경지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세와 기운을 보아하니, 벽의 모습을 어렴풋이 본 것 같구나.’
삶을 아니, 전투에서의 마음가짐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다.
‘재미있겠어.’
가르침은 혹독하게.
김신의 자세를 바라보며 마주 자세를 취하는 태진성.
“망설임 없이 오게.”
타앗! 쐐액!
말이 나오기 무섭게 거리를 좁히며 내공이 담긴 검을 내 뻗어 태진성의 오른쪽 어깨를 노리는 김신.
그의 공격에 태진성은 가볍게 보법을 밟아 순식간에 옆으로 물러서며 김신의 검을 튕겨냈다.
채앵!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묵직한 검격.
‘그 짧은 사이에 중검(重劍)을?’
첫수에 내보인 찌르기에 쾌(快)와 중(重)의 묘리를 동시에 담은 김신의 모습에 태진성의 입술은 기분 좋은 호선을 그렸다.
‘헌터계에 새로운 S급 헌터가 탄생하겠어.’
그 생각을 끝으로 탐색을 마친 태진성.
그 또한 적을 만났다는 마음가짐으로 김신을 향해 검을 내뻗었다.
***
챙! 챙챙!
어지러이 흩날리는 검격.
태진성의 공격을 막으며 틈을 노리려던 김신은 순식간에 수십 합을 나누었음에도 쉽게 드러나지 않는 반격의 순간에 인상을 찌푸렸다.
‘검로는 눈에 익은데, 왜 틈이 안 보이는 거지?’
그 어떤 검술도 완벽하지 않다.
단지 개인의 기량과 수련을 통해 그 검술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가는 것뿐이지.
그런 의미에서 태진성의 검술은 견고했다.
수비를 취할 때는 그 어떤 성벽보다 단단했고, 공세를 취할 때는 그 어떤 공격보다 매서웠다.
‘진심이구나.’
공세에서 느껴지는 느낌으로 보아 태진성은 이걸 단순한 대련의 수준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음가짐.
김신은 전투에 임하는 검사의 자세로 태진성의 검을 받았다.
휙!
김신의 턱 끝으로 예리하게 찔러 들어오는 태진성의 검.
마치 마음가짐의 변화를 알았다는 듯, 태진성의 검은 더욱 매서워졌다.
스르릉!
수비하는 김신의 검의 위를 뱀처럼 타고 들어와 역으로 김신의 오른쪽 어깨를 찌르는 태진성의 검.
위험하다.
김신은 생각과 동시에 몸을 틀었으나, 오른쪽 어깨에 얕은 검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
살짝 베인 피부를 타고 흐르는 피.
멈춰선 김신을 따라 마주 거리를 두고 멈춰선 태진성은 대련의 종료를 알리는 말을 하지 않은 채 김신을 바라봤다.
더 할 것인가?
그런 의미가 담긴 그의 표정에 김신은 이 대련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마음가짐.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성태수와의 전투 직후, 좀처럼 감 잡지 못하고 그저 간질거리는 감각만 느낀 이유는 그때의 마음가짐을 다시 느끼지 못해서 그런 것이었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김신은 어느새 해가 져가는 모습을 보고는 놀랐다.
“축하드려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김신은 명상에 빠진 자신의 곁을 누가 지켜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하윤 씨? 태진성 님은요?”
“제가 삼촌한테 들어가라 했어요.”
“그러면 제가 명상에 빠진 순간부터 계속 곁을 지켜주신 거예요?”
“네.”
“고생하셨네요.”
“아니에요. 조용히 김신 씨 바라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걸요?”
“...!”
처음 봤을 때의 도도함은 어디 가고 시종일관 해맑은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에 김신은 차리기가 힘들었다.
추운 겨울을 버텨낸 후에 핀 꽃이 더 아름답다 했었나.
태하윤의 미소는 그녀의 도도함과 정반대되는 미소였기에 김신은 절로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태하윤의 얼굴을 마주 보던 김신이 있는 연무장에 다시 돌아온 태진성.
그는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을 신경 쓰지 않은 채, 김신을 향해 말했다.
“깨어났구만.”
“예, 태진성님의 가르침 덕에 놓칠 뻔했던 감각을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야. 그건 오롯이 자네의 노력이 빚어낸 결과일세.”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다.
단지 어렴풋이 보이던 벽을 이제 마주 보게 된 것이지.
조용히 김신을 바라보던 태진성은 순수한 궁금증이 담긴 질문을 했다.
“어떻게 위기가 닥친 것이 아님에도 그 감각을 다시 잡을 수 있었나?”
“한 번 겪었던 감각이어서 그렇습니다.”
김신의 말을 듣던 태진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수련이 아닌 실전으로 얻은 감각이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나 보구만.”
태진성의 경우 막혀있던 부분을 김신의 조언을 받아 해결하며 벽 앞에 도착한 것이고, 김신의 경우 먼저 실전을 거쳐 도착한 것이기에 그 속도는 더욱 빨랐던 것.
주변 정리를 끝마친 김신은 조용히 태진성과 태하윤을 향해 말했다.
“오늘은 이만 늦었으니 가보겠습니다.”
“쉬었다 가시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태진성과 아쉽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미는 태하윤.
김신은 그런 태하윤의 모습에 조용히 내일 있을 일에 대해 말해주었다.
“내일 길드레이드로 8층 등반계획이 잡혀있어서요. 팀장으로서 준비해야 할 게 많아요.”
“어쩔 수 없네요.”
고개를 끄덕이는 태하윤을 뒤로한 채, 김신은 태극검술 길드의 밖으로 나와 수호길드로 돌아갔다.
2.
길었던 밤이 지나고, 아침은 전날 있었던 일 때문인지 빠르게 찾아왔다.
평소와 다르게 팀 대기실에서 잠을 잤지만, 거대길드답게 설비가 아주 잘 되었기에 숙면할 수 있었다.
습관처럼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 눈을 뜨자, 배 위에 올라와 잠자고 있는 똘망이의 모습이 보였다.
‘벌써 이렇게 컸네.’
고개를 드는 과정에서 약간 뒤척였는지,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똘망이.
녀석은 곧 김신과 눈을 맞추고는 큰 눈망울을 껌뻑이며 기분 좋게 울었다.
-삐익!
김신 또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조심스레 내려놓고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아티펙트, 포션, 마석.’
해리엇의 가방 안에 모든 물건을 넣은 김신은 가방의 입구를 벌리며 똘망이에게 말했다.
“잠깐 들어가 있어.”
-삐익.
별다른 거부 없이 들어가는 똘망이.
내부공간 구석에 놓인 자그마한 집에 들어간 녀석의 모습을 확인한 김신은 팀원을 기다렸다.
머지않아 전부 시간에 맞게 도착한 팀원들.
김신은 팀원들을 가볍게 훑어보며 말했다.
“가자.”
“네!”
전송이라는 말과 함께 환한 빛무리에 싸여 탑으로 이동하는 팀원들.
김신도 팀원들의 뒤를 따라 8층으로 향했다.
***
사방이 푹푹 빠지는 늪지대인 8층의 배경.
울창한 나무들이 얽히고설킨 어두운 분위기 사이로 보이는 자그마한 마을.
8층의 시작 지점에 도착한 김신은 때맞춰 도착한 수호길드가 모여 있는 장소로 다가갔다.
“왔는가.”
“안녕하십니까.”
김신이 다가오자 반갑게 맞아주는 한유성.
고개를 숙여 인사한 김신은 모여 있는 길드원들의 모습을 잠시 훑어봤다.
‘확실히 이례적이긴 하네.’
구원회와의 전면전이라는 문제 때문에 모든 팀이 모였다.
보통의 경우 최소한 두 팀은 남겨두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번 토벌은 그 특수함이 남달랐다.
그러한 이유 때문일까?
한유성은 평소와 다르게 신중하게 팀별 포지션을 짠 후에 팀장들을 통해 계획을 전달했다.
‘5팀은 중간이구나.’
중간에 선 1팀을 기준으로 좌측과 우측을 맡는 2팀과 4팀 그리고 5팀의 뒤에서 후미를 맡은 3팀.
“그럼 출발.”
늪지의 위험은 어디서 나올지 모르는 보호색을 띤 파충류다.
김신은 길드레이드의 출발과 동시에 똘망이를 하늘 위로 날렸다.
-삐익!
세차게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올라가 정찰을 하기 시작한 똘망이.
그런 똘망이의 모습에 다른 길드원들이 잠시 놀란 모습으로 쳐다보긴 했지만, 곧 한유성이 했던 이야기를 생각하며 다시 앞을 바라봤다.
-새끼 그리핀 한 마리는 우리의 정찰병이니까 건들지 말도록.
정찰병의 존재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몰랐지만, 길드장의 명령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인 팀장들.
그들은 곧 김신이 테이밍한 똘망이의 힘을 알 수 있었다.
-2팀 기준 150m 전방에 거대한 뱀 형태의 괴수가 나무 사이에 숨어 있습니다.
발견과 즉시 무전으로 전달되는 정보.
늪지의 특성상 체력을 보존하는 것이 우선이기에 수호길드는 던전이 있는 장소까지 최대한 전투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고, 그랬기에 김신의 말이 더더욱 크게 와 닿았다.
-3팀 후미 방향으로 빠르게 접근 중인 괴수 두 마리.
3팀은 즉시 전투를 준비했고, 김신은 곧바로 지팡이를 빼 들며 생각했다.
파괴적이되, 소음이 크지 않고, 확실히 도와줄 수 있는 방법.
-키에에엑!
3팀의 앞으로 다가온 두 마리의 괴수는 3m의 거대한 몸집에 도마뱀의 외형을 닮은 괴수였다.
‘셀러맨더.’
블라이어의 기억 속에 있는 몬스터.
김신은 기억을 떠올려 특징을 파악한 후, 조용히 검을 빼 들었다.
깨달음을 얻은 직후의 변화를 확인할 기회.
내공을 끌어올리며 집중하자, 묵빛의 검기가 점차 선명해지며 검이 떨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웅──!
주변을 떨리게 만드는 엄청난 내공.
모든 준비가 끝난 김신은 3팀과 마주한 괴수를 향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벤다’, 라는 의념은 곧 김신의 의지.
전보다 빠르고 확실하게 자리잡은 검강은 바람을 가르며 괴수를 향해 날아갔다.
쐐애애액!
반월형의 검강.
김신이 날린 검강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목이 날아간 셀러맨더.
소리 없이 쓰러지는 괴수의 모습에 놀란 다른 한 마리의 괴수가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키이이익!
생각지도 못했던 공격에 입을 벌려 화염을 내뿜으려 한 셀러맨더.
하지만, 공격하려던 셀러맨더보다 김신이 날린 검강이 더 빨랐다.
서걱!
또다시 맥없이 쓰러지는 셀러맨더.
그 모습에 스킬을 사용하려던 한설이 김신을 보며 말했다.
“뭐, 뭐에요. 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