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1.
검을 손에 든 채, 집중에 빠져든다.
호흡을 다스리며, 내공을 끌어낸다.
검강은 집중력의 산물이다.
검기를 수십 겹 쌓는다는 느낌으로 집중하는 것이 핵심.
오롯이 적만을 바라본다.
검기의 실린 의지는 곧 검강으로 변화되었다.
지잉!
검강을 만드는 것에 성공한 이후 벌어진 전투의 결과는 빠르게 나왔다.
-파이어 버스트.
쐐액! 퍼엉!
무엇이든 베어낸다는 명성에 걸맞듯, 보스가 사용하는 마법을 모조리 베어내며 파죽지세로 달려나가는 김신.
보스에게 극한의 집중으로 만들어진 검강을 막을 힘은 없었다.
“좋은 대련이었다. 잘 가라.”
결국에는 보스까지 베어버린 김신의 검.
파스스스-
사뭇 애처롭게 들리는 비명을 내지르며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보스.
사라진 4층 보스의 자리에서 나온 것은 하나의 반지였다.
‘마법사를 잡았는데 반지라?’
보스는 그 보스와 관련 있는 아티펙트를 주는 만큼 이 아티펙트에 어떤 기억이 깃들어 있을지 기대됐다.
“반지네요?”
아티펙트를 주운 김신의 곁으로 모여드는 5팀.
“잠깐만 기다려봐.”
김신은 몰려든 팀원들을 잠시 세워놓고, 빠르게 감정을 사용했다.
[사용자의 염(念)을 엿봅니다.]
***
왕을 바라보는 신하.
아니, 왕을 보필하며 그의 곁을 지키는 근위기사.
그 근위기사인 이한은 왕의 최측근이었지만, 왕을 죽였다.
“쿨럭!”
가슴에 검이 꽂힌 채, 힘없이 쓰러지는 파첸왕국의 왕.
핏발선 눈으로 이유를 묻는 그에게 이한은 서리가 내릴 정도의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당신이 내 어머니를 죽이려 했기 때문일 겁니다.”
후작가의 여식이었던 이한의 어머니를 강제로 범하고, 죽이려 들었던 왕.
이한은 왕의 농간 때문에 무너져버린 후작가문의 여식의 아들이자, 왕의 서자였다.
“그때. 주, 죽이지 못한 것이...이렇게 도, 돌아올 줄이야...”
이한은 피를 흘리며 싸늘하게 식어가는 왕을 왕좌에 앉아 내려다보며, 지난날의 삶을 회상했다.
무너진 가문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이한의 어머니와 이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이한을 키운 그의 어머니.
필사적으로 생을 불태워 이한이 3살이 되던 순간까지 버틴 이한의 어머니는 결국 병으로 쓰러졌고, 마지막 순간에 후작가의 인장이 새겨진 반지를 주며 이한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었다.
-왕이 너와 나의 삶을 이렇게 망쳐버렸어.
시간이 흘러 이한이 10살이 될 무렵.
마을 어귀를 돌며 마나에 재능있는 아이를 찾아다니던 한 마법사의 손에 끌려간 이한.
10년을 개처럼 구르며 마법을 배운 이한은 복수의 불씨를 태웠다.
‘왕을 죽인다.’
마법을 배우기 시작하며 육체적인 능력도 제법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한은 검의 길도 함께 걸었고, 결국 두 가지 능력 모두 출중하게 쌓아 왕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때마침 터진 몬스터들의 습격.
혼란스러운 왕국의 상황을 틈탄 그는 왕을 죽일 수 있었다.
2.
[유니크 아티펙트를 감정하였습니다.]
반지의 정체는 이한이 받은 후작의 인장이 새겨진 반지.
이한은 이 반지에 5서클 마법 배리어를 새겼다.
‘그래서 팀원들의 스킬이 안 맞은 거였나.’
실드와 다르게 엄청난 내구성을 자랑하는 배리어.
김신은 쓸 일이 없었기에 우선은 보관해놨다가 추후에 사용하기로 했다.
자잘한 정리가 끝나자, 김신은 5층으로 올라가는 게이트의 앞에 멈춰 섰다.
“안 올라가십니까?”
뒤따라오던 천명화의 물음.
김신은 고개를 돌려 답했다.
“잠깐, 뭘 좀 생각하느라고. 올라가자.”
5층에서 구원회의 뒤를 쫓고 있을 한설.
머지않아 팀원들에게도 사실을 말해줘야 하지만, 어떻게 설명할지 난감하기도 했다.
‘한설 씨는 찾았으려나?’
5층으로 올라간 다음, 어차피 정비하기 위해 길드로 돌아갈 것이지만, 그래도 궁금한 것은 사실이다.
빠르게 알아봐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김신은 5층으로 올라가는 게이트에 발을 올렸다.
공간이 뒤틀리는 듯한 기묘한 감각.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도착한 5층의 입구에서 김신과 5팀은 다시 복귀를 알리는 말을 내뱉었다.
“전송.”
길드로 복귀한 김신은 팀원들에게 정비할 것을 말하고는 곧바로 길드장실로 향했다.
길드장실에 도착하자, 무언가 분주한 느낌의 한유성이 열린 문 너머로 보였다.
‘뭔 일 있으신가?’
길드장실에 들어가자, 당장에라도 탑에 오를 듯한 복장을 한 한유성이 다가왔다.
“기다리고 있었네.”
기다렸다는 한유성의 말이 그의 행동 때문인지, 어째서 조금 불길하게 느껴졌다.
“흠...”
의자에 앉으면서도 연신 이마를 매만지는 행동을 한다.
김신은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안타깝게도 일이 터졌네.”
“무슨 일인 겁니까?”
들려오는 한유성의 답은 결코 좋지 않았다.
“5층을 수색하던 설이가 사라졌네.”
***
김신이 한유성과 대화하고 있던 순간.
탑의 거주구역에 자리 잡은 구원회의 아지트 내부.
사람을 가두기 위해 만든 어두운 공간 속에 힘없이 누워있는 한 여자.
그 안에서 마나를 억제하는 수갑을 착용한 채로 바닥에 쓰러져있는 한설은 차가운 바닥의 감촉에 놀라 눈을 떴다.
철컹!
“윽!”
손목을 묶고 있는 수갑과 그 수갑에 걸려있는 쇠사슬.
한설은 지금 자신에게 닥친 상황이 어떤지를 깨달았다.
‘붙잡혔다니!’
5층을 수색하던 중 느껴진 이상한 감각.
기묘한 감각을 쫓아 도착한 장소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빠지려 했었는데.
딱 거기까지가 한설이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송’이라고 작게 외쳤지만, 마나를 억제하는 수갑에 가로막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약간의 소리들.
반응이 있을 법한 소리가 울려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밖에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기묘한 상황에 한설은 조용히 고개를 내밀어 밖을 살펴봤다.
‘아무도 없어?’
비밀스러움을 중요하게 여기는 조직이 이토록 허술하다?
‘쇠사슬만 어떻게 끊으면 나갈만 할 거 같은데.’
각성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신경 써서 확인해야 할 것이 분명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려 쇠사슬이 매달린 부분을 살펴보니, 얇은 창살에 연결되어있는 것이 보인다.
저 정도는 마나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끊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뒤로 묶인 손으로 쇠사슬을 붙잡은 한설.
천천히 심호흡을 들이쉰 한설이 쇠사슬을 잡아당기려는 순간.
“그만하지. 어차피 소용없을 텐데.”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했던 창살의 너머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
감시자가 있다는 사실에 창살을 끊는 행동을 멈춘 한설은 바깥을 향해 말했다.
“누구냐!”
“알지 않나? 우리를 뒤쫓은 건 너일 텐데.”
남자의 말을 듣는 순간 한설은 알 수 있었다.
‘구원회!’
남자의 정체를 깨달은 한설은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날 왜 죽이지 않고 잡은 거지?”
사살이 아닌 납치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법.
떠보는 한설의 질문에 남자는 생각보다 순순히 답했다.
“목적? 그저 너의 가치가 필요했을 뿐이야.”
“가치?”
“수호길드의 5팀장. 김신이라고 했던가? 너는 그 헌터를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일 뿐이야.”
“뭐?!”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놀란 한설은 재차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김신 씨를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
미끼라 함은 그 가치가 있는 이를 뜻하는 단어.
자신의 가치와 저울질을 해본 결과, 한설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한설의 아빠인 한유성에게 말해 한설과 김신을 교환하는 것.
‘김신 씨가 위험해!’
아빠는 무조건 그 거래에 응할 것이다.
자식의 생사만큼 부모에게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
3.
침묵에 빠진 길드장실.
김신은 한설이 실종됐다는 말에 얼굴을 굳히며 답했다.
“언제쯤 연락이 끊긴 겁니까?”
“자네가 오기 하루 전부터일세.”
시간상으론 김신이 5층을 클리어하기 직전이다.
‘하필이면.’
하루만 더 빨리 귀환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탑의 내부에서 귀환하는 방법은 간단하기에 길을 잃거나 헤매서 그렇다는 경우의 수는 사실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금으로서는 구원회가 가장 유력하군요.”
“그렇지.”
5층을 탐색하자니, 적의 규모가 걸리고, 안 하자니 한설의 안전이 걸린다.
골치 아픈 상황에 한유성도 김신의 생각과 똑같은지 연신 이마를 쓸던 그때.
♪♩♬-
책상 위에 놓인 한유성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의 이름을 보니, 한설.
길드에서 전송한 한설이 모습은 드러내지 않고, 전화만 온 상황.
한유성이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자, 핸드폰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딸을 찾고 있나.
상황을 다 아는 상대의 목소리에 한유성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구원회.”
-정답. 상으로 자식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핸드폰 너머에서 한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신경 쓰지 마! 괜찮으니까!
한설의 목소리가 들린 이후, 다시 전화를 바꾼 구원회의 남자.
한유성은 그를 향해 으름장을 놨다.
“조금이라도 손을 댔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거야.”
-그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도 거래의 대상을 건드리는 취미는 없거든.
한유성은 아직은 무사하다는 말에 아주 자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했다.
“거래의 대상이라고 했나?”
-그래.
“뭘 원하지?”
무언가를 교환한다.
한유성은 무엇이든 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남자의 말에 한유성은 즉각 답할 수 없었다.
-댁네 길드의 5팀장. 우리는 김신을 원한다.
장소와 시간.
용건만을 말한 구원회의 남자는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까드드득!
전화가 끊긴 직후, 핸드폰의 액정에 금이 갈 정도로 강하게 움켜쥔 한유성.
“후우...”
김신은 의자에서 거칠게 일어선 한유성을 바라보며 방금 했던 대화를 곱씹었다.
‘굳이 나를 콕 집어서 말한 이유가 있을 텐데.’
비밀을 아는 것만으로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이미 구원회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천항 사건 이후 퍼졌으니까.
그렇다면 뭔가 특별한 무언가가 자신에게 있다는 소리.
조용히 생각하던 김신은 문뜩 생각난 것이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티펙트인가?’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곳이 없다.
구원회가 아무 연관 없는 신의를 납치한 이유도 그가 가진 회복의 녹옥 때문이었으니까.
‘녹옥과 연관이 있는 아티펙트라...’
곰곰이 기억을 되새기던 중, 아티펙트 하나에 담겨 있던 독특한 기억이 떠올랐다.
변화의 구슬.
툭툭-
가슴을 가볍게 치자, 촤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김신의 몸을 타고 가슴께에 뭉치는 변화의 구슬.
김신은 이 아티펙트를 손에 쥐고 조용히 기억을 더듬었다.
***
변화의 구슬을 손에 넣은 에트왈은 가장 먼저 이 구슬이 가진 힘에 눈이 먼 제국의 마법사들을 뒤쫓았다.
그들은 하나의 광신도 무리처럼 행동했는데, 마치 한 사람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맡기는 사람들처럼 행동했었다.
맹목적인 믿음.
비틀린 믿음은 잘못된 신념으로 변질되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잔혹하게 행동했다.
죽이고, 빼앗는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다름 아닌 변화의 박혀있던 다른 아티펙트.
각각의 독특한 힘을 지닌 아티펙트는 하나, 하나의 위력도 강했지만, 뭉친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대항하기 힘들 정도의 힘을 품고 있었다.
파괴를 담당하는 붉은 보석.
복원을 담당하는 녹색 보석.
그 기반을 만들 갈색의 보석과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을 조율할 변화의 구슬까지.
에트왈의 기억을 모조리 훑은 김신은 그제야 깨달았다.
소유하는 것 그 자체로 초월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아티펙트의 한 부분이 자신의 손에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