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1.
3부두의 한쪽 면이 전부 보이는 높은 컨테이너 크레인 위에 서 있는 김신.
그는 화경에 오른 뒤에 사용할 수 있게 된 전음입밀(傳音入密), 특정 대상에게만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는 기술을 통해 유석만에게 포위가 허술한 지점을 계속해서 알려줬다.
“컨테이너 코너를 돌자마자, 한 명이 숨어있습니다.”
김신의 말을 듣고 난 뒤, 곧바로 컨테이너 위에 조용히 올라간 유석만이 마치 카멜레온처럼 컨테이너의 모습과 동화되었다.
‘오호...’
슬금슬금 컨테이너 앞으로 걸어가, 품에 든 칼로 일격에 빌런을 즉사시키는 유석만.
김신은 생각보다 뛰어난 대인전을 보여주는 유석만의 모습에 김신은 조금은 위험하지만, 더 빠른 탈출 루트를 함께 알려줬다.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지금 길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크게 우회해서 돌아가는 길과 반대편 컨테이너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빌런을 처지하고 직진하시는 길입니다.”
상황을 계속해서 주시하며 똘망이의 시점으로 보이는 화면 또한 놓치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거지.’
계속해서 부두의 바깥 방향.
즉, 바다가 있는 방향으로 신의를 끌고 가는 빌런들.
김신은 의념으로 똘망이에게 놓치지 말고 따라다닐 것을 말한 뒤에 잠시 고민했다.
‘내가 알아내야 할 것은 하나가 아니야.’
신의의 생사는 확인했지만, 아직 가장 중요한 비밀통로는 알아내지 못했다.
‘위험 부담이 커졌다고 몸을 빼자니, 그것도 어렵지.’
하지만, 지금은 유석만의 발각으로 몸을 내빼기가 어려운 상태.
김신은 약간의 발상 전환으로 현 상황을 보다 쉽게 헤쳐나갈 수 없나 생각했다.
‘저 사람을 이용해 볼까.’
어차피 지금 쫓기는 것은 유석만이지 김신이 아니다.
그렇다면 시선이 집중된 유석만에게 도움을 줘서 탈출시키고, 역으로 한산해진 내부를 돌아다니며 비밀통로를 알아내는 것 또한 한 가지의 방법.
고민을 끝내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느새 3부두의 끝자락까지 도착한 유석만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면 조금만 더 수고해 주십쇼.’
한 마디로 꿩 먹고 알 먹고.
짧은 시간이지만, 유석만의 은신 능력을 높게 평가한 김신은 조심스럽게 마나를 끌어모았다.
***
귀신같다.
딱 그 한마디의 단어가 어울릴 만큼, 귓가에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적재적소에 들린다.
-곧, 3부두 끝자락에 도착하는데...
어둠이 내려앉은 컨테이너 옆에 놓인 드럼통 뒤에 숨어 있는 유석만이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앞을 바라봤다.
꽤 많은 숫자의 빌런들이 물샐 틈이 없이 출구 쪽을 틀어막고 있는 게 보인다.
‘시발...’
유석만의 생각과 정체 모를 남자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는지, 이번엔 조금 더 과감한 도전을 해오길 권했다.
-제가 잠깐이나마 빌런들의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충분히 당신의 능력이면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 겁니다.
무엇을 해줄지는 몰랐지만, 유석만은 남자의 말에 조금은 기대하는 마음이 생겼다.
‘살아 돌아만 가면 내가 뭐든 한 가지 부탁은 들어드리겠습니다.’
임무를 받은 헌터를 찾아내서 꼭 보답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유석만의 귓가에 계속해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
-다만 이번에는 무조건 위치를 들키실 겁니다. 그러니, 뒤쫓아 오는 빌런에게서 무사히 도망치십쇼. 건투를 빕니다.
어떻게 해도 발각당하게 될 것이라면 차라리 빌런들이 뒤따라 오게 만드는 게 더욱 좋은 선택일 터.
유석만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일어날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3부두의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드럼통이 넘어지는 소리.
쿵탕쿵탕!
3부두 전체를 휩쓰는 소리와 중간중간 들려오는 빌런들의 비명에 잠시 시선이 쏠린 틈을 타, 유석만은 전력으로 출구를 향해 달렸다.
‘나가서 주택단지까지만 들어가면 된다.’
좁은 골목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골목길에서 그의 능력은 마치, 사막에서 바늘 찾는 수준으로 엄청난 효율을 보여준다.
그렇게 유석만이 전력으로 달려 출구에 도달했을 쯤.
“저 새끼 잡아!”
남자의 말처럼 한참 뒤에서 유석만의 모습을 발견한 빌런들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어림도 없지.’
빌런들과 유석만의 신체 능력은 비슷하다.
그렇다면 출구 바로 바깥에 있는 주택단지로 들어가는 것은 자신이 먼저다.
‘어디 한번 잡아보라고.’
유석만은 빙긋 웃으며 인천항의 출구로 몸을 날렸다.
2.
컨테이너 크레인의 높이는 50m 이상.
‘이 정도면 감지당할 위험은 없겠어.’
우웅-
김신은 조심스럽게 모은 마나로 3서클 마법 윈드커터를 사용해 빌런의 시선을 돌렸다.
-야! 이 새끼 어디 있어! 빨리 찾아!
빌런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와 그로 인해 생긴 빈틈.
김신은 유석만이 하는 일련의 행동을 크레인 위에서 지켜보다가, 그가 출구를 통해 나가며 생긴 경계의 공백을 틈타 1부두의 내부로 침투했다.
‘절반에 가까운 빌런이 저 헌터한테 시선이 쏠렸는데도 여전히 많긴 하구나.’
잠시 컨테이너 뒤에서 똘망이의 시선과 동일한 캠의 화면을 보던 김신은 신의를 데리고 간 빌런들이 바다와 연결된 계단 앞에 서서 무엇인가를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뭘 하는 거지.’
김신은 계속해서 캠을 통해 빌런들이 하는 행위를 지켜봤다.
뒤에 서 있던 빌런이 계단 위에 서서 스킬을 사용하는 행동을 하자, 막혀있던 벽이 허물어지며 큰 통로가 생겼다.
눈이 절로 커지는 광경에 김신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래서 비밀통로를 못 찾은 거였어.’
바다로 이어지는 계단 바로 앞에 설치된 비밀통로.
그마저도 시멘트를 반죽하는 듯한 특성을 가진 빌런의 존재가 없다면 사용할 수도 없다.
‘얇은 벽으로 막혀있다면, 마법으로도 어떻게든 해볼 만할 것 같은데.’
길이를 알 수 없는 비밀통로인 만큼 빌런도 처음부터 시멘트를 뚫으면서 갈 일은 없을 것이 분명할 거다.
그렇다면 추측 가능한 한 가지의 방법은 이동할 때마다 특정한 빌런의 힘으로 입구를 여닫는 것일 터.
캠의 화면에서 눈을 뗀 김신은 똘망이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물류창고로부터 빌런이 신의를 끌고 간 장소까지는 대략 500m.
절반 가까이 유석만에게 시선이 끌렸다고 해도 다른 부두보다 훨씬 많은 수의 경계인원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다니는 빌런들은 혹시나 다른 헌터가 있나 싶어서 더더욱 곳곳을 샅샅이 살펴봤고.
뚜벅뚜벅-
바로 그때.
김신이 몸을 숨긴 컨테이너 근처로 다가오는 빌런 하나.
김신은 컨테이너 위에서 조용히 기다렸다가 내공을 뭉쳐 쏘아내는 흑영탄(黑影彈)을 이용해서 빌런을 소리 없이 암살했다.
슈욱- 푹!
미약한 바람 소리와 동시에 빌런이 실 끊어진 연처럼 힘없이 무너진다.
김신은 그런 빌런의 옷깃을 붙잡아 컨테이너 위에 눕힌 다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
중간중간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위를 날아다니며 계속해서 상황을 알려주는 똘망이와 기감의 조화로 김신은 들키지 않고 무사히 비밀통로 앞에 도착했다.
가볍게 손으로 표면을 쓸어보니, 역시나 단단한 시멘트의 질감 그대로다.
‘환영 비슷한 건 아니고.’
아마 처음 추측했던 시멘트를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진 빌런의 소행으로 보인다.
‘먹히려나...’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자, 김신은 미리 기감을 풀어 주변 빌런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지금 하려는 것은 디그를 벽에 사용하는 것.
본디 디그 마법은 바닥을 움푹 파이게 하는 마법이다.
‘그걸 반대가 뻥 뚫린 공간에 사용하며 어떨까.’
확인해야 하기에 반드시 안에는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기왕이면 은밀하게 들어갔다가 나오는 게 최선인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김신은 속으로 통하기를 바라며 수인을 맺어 캠으로 봤던 장소에 조심스럽게 1서클 디그 마법을 사용했다.
풍덩!
“...!”
파낸다는 행위를 뜻하는 것처럼 디그 마법은 얇은 시멘트벽을 말 그대로 ‘파냈다’.
맨홀 크기로 뚫린 구멍 사이로 가볍게 내공을 운용시켜 내부를 바라본 김신.
‘꽤 깊은 거 같네.’
사람이 살짝 몸을 숙이고 가야 하는 150cm 정도의 높이를 가진 둥근 원형의 통로엔 빛 한 점 없이 어두웠고, 적막함만이 흐르고 있었다.
철썩-철썩-
내부로 들어가니, 뒤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김신은 혹시 모를 전투에 대비하며 똘망이를 불러들였다.
‘이리와.’
계속해서 김신을 보고 있었다는 듯이 열린 구멍을 향해 곧바로 들어온 녀석을 가볍게 쓰다듬어 준 김신은 목 앞에 달린 녀석의 캠을 적외선 촬영 모드로 바꾼 뒤에 품에 안고 걸어 들어갔다.
3.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길을 얼마나 들어갔을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라이트조차 켜지 않았지만, 그게 원인이었는지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같은데.
어느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
중간중간 바람이 통하는 소리가 김신이 있는 곳까지 울리는 것을 보면 이 비밀통로는 어떤 큰 공간과 연결된 것 같았다.
빌런의 목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똘망이를 내려놓은 김신.
‘최대한 마법은 안 쓰려 했는데 어쩔 수 없겠네.’
빌런의 목소리가 안 들리는 거리까지 물러선 김신은 천천히 마나를 끌어모아 익숙한 마법의 수인을 맺으며 4서클 마법, 디텍트를 사용했다.
우웅-
조금은 큰 마나의 흐름과 함께 푸르게 물드는 김신의 눈.
디텍트는 사용 시에만 마나의 흐름이 있고 유지하는 데 드는 마나는 거의 없는 마법이다. 공격마법과는 다르게 소음은 전혀 없었고.
그러니 아마, 거리는 충분히 벌렸으니까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스윽-
트인 시야를 유지한 채 다시 조용히 접근하자, 예상대로 마나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한 채로 벽 뒤에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 명이 뭉쳐있고, 한 명은 순찰 중인가.’
디텍트는 생명체의 형상만을 보여주는 마법.
그로 인해 김신은 마법이 걸려있는 자신의 시야와 똘망이의 캠을 번갈아 보며 앞으로 걸어갔고, 곧 비밀통로와 연결된 공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하철?’
열차가 지나다니는 철로.
그 열차에 동력을 불어넣는 전기선.
중간중간 다음 역의 이름이 적혀있는 기둥까지.
바람이 통하는 거대한 공간의 정체는 다름 아닌 지하철이 오가는 통로였다.
‘이러니 귀신같이 사라졌다고 하지.’
헌터들이 토벌에 실패한 이유.
그리고 빌런들이 굳이 인천항에 똬리를 튼 이유.
복잡하게 연결된 비밀통로는 시멘트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특성을 가진 빌런이 만든 비밀 땅굴이었던 거다.
‘지금 있는 위치가 신포역과 인천역의 사이인가.’
역과 역 사이에 있는 어딘가.
고개를 내밀어 지하철 통로를 살펴보니, 철로 중간중간에 김신이 들어온 곳과 같은 비밀통로들이 뚫려있었다.
‘일단 한 가지 비밀은 알아냈고.’
영원히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됐던 빌런 소탕의 단초.
그 엄청난 비밀을 알아낸 것에 김신은 감흥 따윈 느끼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갔다.
‘신의가 끌려간 곳을 알아내야 해.’
분명 멀진 않을 거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인이 되는 통로가 지하철인 만큼, 빌런은 지하철 근처에서 많이 벗어나서는 안 될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면 솔직히 좋지도 않다.
“왜 갑자기 헌터 새끼가 쳐들어와서 이 꼭두새벽에 순찰을 돌아야 하는 거야?”
투덜거리며 주변을 돌아다니는 빌런들.
지하철 내부에 깔려있는 감시망을 피해 신의를 찾아야 하는 것이었기에.
작전을 생각하자면 수색을 쉬이 포기할 수도 없다.
신의의 위치를 알아내느냐 마느냐는 분명 길드가 취해야 할 행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니까.
고민을 끝낸 김신은 조심스럽게 똘망이를 집어 철로 위에 있는 전선에 올렸다.
‘똘망아. 위로 올라가.’
인천 주변은 전기가 끊긴 지 오래이기에 지하철의 동력원 또한 전기가 끊긴 지 오래다.
-삐익.
조용히 김신의 의사에 답한 똘망이가 어둠이 짙게 깔린 철로의 동력원 위에 몸을 숨겼고, 김신은 다시 캠을 보며 생각했다.
‘신의가 있는 장소만 알아내고 빠지자.’
현재 시각 2시 25분.
아직 밤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