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1.
당연한 말이지만, 상대의 수를 읽고 간파한 상황에서 지는 것이 더 이상하다.
스윽-
마지막까지도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강태구의 목 앞에 선, 김신의 검.
“졌습니다...”
패배를 인정하는 강태구의 말을 들으며 김신은 꽤 스릴 있던 대련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김신, 승.”
김신과 강태구의 싸움.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태진성은 승패를 알리면서, 좀 전에 봤던 김신의 마지막 한 수를 잊지 못했다.
‘순수한 검술 실력도 엄청난데, 태극검법을 다른 사람들이 대련하는 것만 보고 벌써 분석해서 파훼했다는 것인가.’
김신의 대응법이 그렇듯, 태극검법은 쾌(快)에 중심을 둔 찌르기와 눈을 속이는 환(幻)검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물론, 태진성이 익힌 태극혜검은 그러한 취약점을 보완하여 대성한다면 적수가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지만.
어쨌든, 태진성은 즉각적인 김신의 대응법과 특이한 검술을 본 순간 강한 호승심이 들끓었다.
‘새로운 검술을 알아보고 싶다.’
다른 검술길드의 길드장들과 대련다운 대련을 해본지도 한 세월이다.
검술에 있어서 스스로를 갈고 닦는 수련만큼 중요한 것이 대련.
그런 의미에서 태진성은 김신과 대련이 하고 싶었다.
‘경기는 이미 끝났으니, 시간은 충분하다.’
지금 가면 김신은 최소한 검술대회가 끝난 후에야 다시 볼 수 있겠지.
결심과 함께 고민을 끝마친 태진성은 연무장을 내려가는 김신을 불러세웠다.
“자네...”
“...예?”
연무장을 내려가려던 김신이 고개를 돌리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인다.
태진성은 그 모습을 본 순간, 아차 싶었다.
‘대련하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앞선 나머지 실수했구나.’
방금 격렬한 대련을 마친 김신.
게다가 그는 대회에 참가한 참가자가 아닌가.
태진성은 곧바로 목을 가다듬고, 김신에게 한 말을 정정했다.
“아, 아니네.”
태진성의 말에 김신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연무장을 내려갔다.
***
다음날.
알게 모르게 참가자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된 김신은 그들의 관심과는 상관없이 본선이 열리는 장소인 잠실 종합운동장으로 향했다.
지금 김신은 태극검술길드 소속의 참가자.
본선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같은 장소에서 있어야 했다.
“어디냐...”
미리 연락받은 대로 C-1구역을 찾아가니, 앞에 서 있는 태극검술길드의 태진성과 태하윤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아, 왔구만.”
“안녕하세요.”
짧게 태진성과 태하윤에게 인사를 하고 그들을 따라간 곳에는 넓은 칸막이가 쳐진 연습장이 있었다.
-하압!
챙! 챙챙!
본선 진출자들의 기합 소리와 검이 부딪치는 소리.
그들은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한 채, 검술연습을 하고 있었다.
‘남은 자리가 있나...’
김신도 들고 온 짐을 풀고, 연습장의 끝으로 가서 조용히 몸을 풀었다.
참가한 검술길드는 각각 매화검술길드, 태극검술길드, 사일검술길드.
세 개의 검술길드는 대표하는 검술이 전부 다 다른 방향을 추구했다.
‘환(幻)검의 화산, 유(柔)검의 무당, 쾌(快)검의 점창.’
검술대회 참여 목적이 수련이었던 만큼, 더욱 강한 상대와 겨뤄본다는 것에 참가의 의의를 뒀다.
2.
본선이 시작되고, 김신은 파죽지세로 예선전보다 더 쉽게 연승을 하며 준결승전에 도착했다.
3번의 대련에서 모두 10수 이내의 승리.
태극검술길드와 전혀 다른 위력적인 검술을 사용하는 김신의 모습에 대회 참가자들은 모두 긴장했다.
그리고 이어진 준결승전.
“김신, 이준석.”
사일검술길드의 2팀장인 이준석.
김신은 극쾌의 검술을 쓰는 그의 행동을 예상하며 대련용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준비.”
심판의 목소리에 따라 자세를 잡는 두 사람.
“시작.”
팟!
빠르게 치고 나온 상대의 찌르기로 시작한 공격.
카앙!
망설임 없이 명치를 향해 오는 검을 오른손에 쥔 검으로 튕겨내고 곧바로 목을 향해 올려쳤다.
쐐액!
상대 또한 이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시계방향으로 낮게 돌아 회피하며 김신의 다리를 베어왔다.
‘회피? 방어?’
찰나에 이뤄지는 선택.
채앵!
낮게 들어오는 검을 막아내며 흐름을 끊고, 태극검술의 묘리처럼 김신은 상대의 검을 타고 흐르듯 들어가는 찌르기를 선보였다.
스윽-
기겁한 상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빼는 바람에 검을 떨어트리진 못했지만, 최소한의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다섯 수의 공방.
수준 높은 상대의 모습에 김신은 입꼬리를 끌어올렸고, 상대는 더욱 신중한 모습으로 자세를 잡았다.
***
숨이 막힌다.
틈이 없다.
흔히들 압도적인 기량 차이를 가진 상대를 만나면 이런 단어를 쓰곤 한다.
‘대체 어떻게 되먹은 검술이기에...!’
찌르기를 해도 여유롭게 받아치며 베어오고, 연이어 공격을 해도 여유롭게 피한다.
끊어야 할 공격은 기가 막히게 끊는 바람에 이준석은 자신이 익힌 검술인 유운검법(流雲劍法)은 사용하지도 못했다.
‘흐름을 이어갈 길을 만들어야 해.’
흘러가는 구름처럼 공격이 이어질수록 빨라지고, 기세가 불어나는 유운검법.
이준석은 잠깐 생긴 대치상태를 이용해 김신의 자세를 훑어봤다.
‘검을 가로베기를 하기 좋은 방향으로 잡고 있다.’
검을 허리 높이에 비스듬히 쥐고 있는 김신의 자세.
‘다시 한번 찌르기로 시작을 해서...’
수십, 수백 번 연습한 그대로 이준석의 검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쐐액.
가장 처음은 찌르기.
‘막거나, 회피하겠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이미 그려둔 검로가 있었기에 이준석은 김신의 반응을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봤다.
‘움직인다.’
한 걸음.
발걸음을 내딛은 김신이 움직인 순간.
“...!”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김신의 움직임에 이준석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했다.
‘검을 향해 달려든다고?’
이미 이준석의 검은 김신의 지척까지 접근한 상태.
쐐애액!
놀랍게도 김신의 명치와 이준석의 검은 물과 기름처럼 종이 한 장의 거리를 둔 채, 미끄러지듯 빗겨나갔다.
“...”
오른손으로 검을 내지른 이준석과 그 검을 몸을 틀어 한 끗 차이로 피한 김신.
김신의 검은 이준석의 검과는 다르게 이준석의 목 바로 옆에 닿아 있었다.
준결승전이 끝나고, 김신은 연무장에서 내려가며 이준석의 마지막 공격을 곱씹었다.
‘특성을 쓰지도 않았는데, 상대의 공격이 느리게 보였어.’
그 감각과 함께 희미해졌던 벽이 확실히 김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좀 더 높은 실력의 상대와 대련을 할 수 있다면...’
김신은 감각을 최대한 잊지 않기 위해 태극검술길드 쪽에 마련된 연습장에서 결승전이 벌어지는 순간까지 검을 휘둘렀다.
3.
한편, 김신의 대련을 보던 태하윤은 그가 한 마지막 공격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한 거지? 설마...’
보고도 모를 공격.
분명 보고 피한 것이 아닌, 마치 상대방의 검이 어디로 날아들지 공격과 동시에 알고 있는 듯한 동작에 태하윤은 김신이 그녀와 같은 초절정의 벽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말도 안 돼.’
머릿속은 부정하지만, 이미 마음속에서는 김신이 해낸 동작이 그녀가 경험했던 것과 같은 감각을 통한 공격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0분 뒤 결승전이 시작됩니다.]
울려 퍼지는 방송에 다시 연무장으로 돌아간 태하윤.
태극검술길드 본선 진출자를 배려해 만들어 놓은 연습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김신의 모습이 보인다.
‘이상한 사람.’
도움을 받던 사람이 어느 순간 태하윤의 주변 사람들과 자신에게까지 도움을 주고 있다.
자신의 도움을 받던 사람의 성장은 도움을 주던 사람에겐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이기고 싶다.’
길드에 도움을 주었고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지만,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있는 검술은 지고 싶지 않았다.
“김신, 태하윤. 위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선 두 사람.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해오는 김신의 모습을 보니, 괜히 혼자만 그를 경계했다는 생각이 들어 우스워졌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승부에 집착한 걸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검술이 좋아서 연습해왔던 것뿐인데.
마음속에 짐을 내려놓으니, 어쩐지 기분이 가벼워졌다.
‘그래, 처음 검을 잡았을 때처럼 즐기자.’
미묘한 심경변화가 어떤 일을 일으킬지 모른 채.
태하윤은 검을 잡았다.
***
‘기세가 가라앉았다.’
반가운 마음에 웃으며 인사한 자신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태하윤의 들끓던 기세가 잠잠한 호수처럼 가라앉았다.
갑자기?
김신은 그녀의 변화에 오히려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일단 집중하자.’
지금 이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 중 각 길드의 길드장을 빼면 가장 강한 사람 중 하나인 태하윤.
김신은 자세를 잡는 그녀를 보며 마주 자세를 잡았다.
‘태극사검은...’
심상수련 속에서 대련한 태하윤의 검로를 떠올리며 취해야 할 행동을 생각한다.
“준비!”
다른 대회와는 다르게 조용한 분위기로 경기에 집중하는 검술대회.
좌중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김신이 검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시작!”
팟!
선공은 태하윤의 공격.
빠르게 달려오며, 허리에 찬 검을 발검한다.
쐐액!
“...!”
태극검법과 태극사검 그 어디에도 없는 태하윤의 검로에 김신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검을 들어 막았다.
카앙!
검을 타고 내려와 손끝을 울리는 찌르르한 감각.
저릿해지는 손끝을 풀 새도 없이 태하윤의 검은 김신을 몰아쳤다.
쐐액! 채앵!
놓칠뻔한 검을 다시 부여잡은 김신은 태하윤의 검로를 본 순간부터 다시 느껴지기 시작한 미묘한 감각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뭐지? 내가 지금 왜 이 감각을 다시 느끼는 거지?’
시간이 느려진 것 같은 느낌.
검과 몸이 하나가 된 것 같은 감각.
쐐액!
태하윤이 목을 향해 내지르는 매서운 검격을 피해내며, 김신은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몸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시키며 옆구리를 베어오는 태하윤의 검을 왼쪽 발을 한 걸음 빼는 것으로 피하고, 동시에 태하윤의 목을 향해 검을 날린다.
쐐액! 쐐액!
검로의 형(形)도 자세도 모두 제각각인 가장 자유롭고, 자신에게 맞는 공격이 서로의 몸을 향해 날아든다.
스릉!
앉은 자세 그대로 양손으로 검을 고쳐 쥔 태하윤이 김신의 검을 머리 위로 부드럽게 받아넘기고, 곧바로 그의 복부를 향해 찌른다.
탓!
김신은 복부를 노리고 날아드는 태하윤의 검을 오른발을 축으로 왼발을 뒤로 빼며 공격을 피하고 뒤로 물러난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그거였구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계속해서 붙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이 묘한 느낌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자신만의 검로.
자유롭게 변화하는 천마신공의 검술에도 검로는 있다.
화경은 그러한 검로를 자신만의 검로로 만드는 것이었고.
우웅-
벽이 무너지자.
김신의 몸을 타고 묵빛의 기가 자연스럽게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