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1.
정자 내부에 앉아있는 의문의 남자.
태하윤은 김신에게 남자를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길드장님이십니다.”
떡 벌어진 어깨에 한 갈래로 묶은 머리.
딱 봐도 검사의 포스가 줄줄 흘러넘치는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헌터랭킹 13위의 검사, 태진성이었다.
“저분이 태진성님?”
“네. 맞아요.”
살면서 몇 번 볼일 없다는 사람 중 두 번째로 보는 S급 헌터의 모습에 김신이 떨리는 마음으로 정자에 도착하자, 태진성이 몸을 일으키며 김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녕하신가. 태극검술길드의 길드장 태진성이라고한다네.”
“저는 수호길드의 5팀장 김신이라고합니다.”
“자네의 이름은 소문으로 들어서 알아. 안 그래도 한 번 보고 싶어서 먼저 이곳에 와있었네.”
“저야말로 검을 쓰는 사람으로서 태진성님을 보니 놀랍습니다.”
“그런가?”
태진성은 김신을 향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스물 중반의 나이에 초절정의 경지라?”
“...!”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박에 김신의 경지를 꿰뚫어 본 태진성.
김신은 태진성의 말을 듣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화경(化境)이라고?’
보통 경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최소 한 단계 이상 높은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그렇다면 태진성의 경지는 최소 화경이상.
내공마저도 무려 최소 1갑자가 넘는다는 이야기다.
‘퍼스트게이트 이후, 10년 만에 화경이라니...’
과장을 조금 보태서 태진성의 재능은 무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대체 얼마나 괴물인거야.’
김신은 자신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한 태진성을 열망에 찬 눈으로 봤다.
그것을 바로 알아본 태진성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클클, 나를 보니까 어떻게 이 경지에 도달했는지 궁금한가 보구만?”
“예.”
원래 태극검술길드에 온 이유는 혹시 있을 수 있는 천마신공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
하지만 태진성의 경지를 확인한 순간, 김신은 그의 깨달음이 궁금했다.
‘벽 그 너머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는 기회야.’
초절정의 경지이후, 멈춰버린 성장.
김신 보다 높은 경지의 도달한 사람이 지구엔 흔하지 않은 만큼, 이번 만남의 기회가 그에겐 소중했다.
그리고 그런 김신의 타오르는 눈빛에 태진성은 단호한 표정으로 답했다.
“하지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여기에 초대 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태극검술길드의 길드원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으로는 안 되겠습니까?”
“그것에 대한 부분은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지 않았는가.”
“그럼 어찌해야합니까?”
김신의 말에 태진성은 턱을 괴며 답했다.
“만약, 내가 자네를 도와준다면 자네는 내게 무엇을 해줄 수 있지?”
등가교환(等價交換).
김신은 태진성의 요구에 깊게 생각했다.
‘지금 내가 가진 패 중 가장 값진 것이 뭐지?’
근래에 번 돈.
‘태진성은 이미 차고 넘칠 만큼 있겠지. 기각.’
아티펙트.
‘줘도 쓸 수가 없잖아. 기각.’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진 생각의 끝에 나온 결론.
‘가장 좋은 건, 상대의 경지를 높여주거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것인데, 지금 내 경지가 낮으니, 무언가를 해주기가...!’
곰곰이 생각하던 김신은 불현 듯 떠오른 좋은 방법에 태진성을 보며 질문했다.
“음, 그렇다면 제가 태진성님의 막힌 부분을 해결해드린다면 어떻습니까?”
자신보다 낮은 경지의 김신이 한 말에 태진성은 기세를 끌어올리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직 깨달음조차 얻지 못한 자네가 내게?”
감정의 요동과 함께 김신을 압박하는 태진성의 내공.
김신은 화를 내는 태진성의 모습을 보며,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속는 셈 치고, 한 번만 말씀해보십쇼.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고, 자신보다 모자란 사람에게도 배울 부분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김신이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무당파(武當派)의 장문인인 송무백과 무윤이 맞붙었던 전투에서 무윤이 그를 보며 생각했던 것을 바탕으로 조언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정신적인 깨달음이 아닌, 검술과 초식에 대한 조언.
만약 태진성이 화경의 벽에 도달했다면 차마 꺼낼 수도 없는 이야기겠지만, 아무리 재능이 넘쳐난다고 해도 10년이란 세월에 현경(玄境)의 경지에 도달하기란 요원했기에 김신은 이 말이 먹힐 것이라 확신했다.
“...”
그리고 그런 김신의 생각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 듯, 조용히 생각에 빠진 태진성.
그는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2.
퍼스트게이트 때부터 활약해온 태진성.
그는 각성 초반엔 별 볼 것 없는 육체강화계열 헌터였지만, 탑에서 얻은 무공서에 적힌 무공을 익히면서부터 엄청난 발전을 이뤄냈다.
태극신공(太極神功)과 태극혜검(太極慧劍).
심법과 검술서로 이루어진 두 가지의 무공서는 [육감]이라는 특성만을 가진 태진성을 최강의 검사로 만들어 주었고, 그는 명성과 모아온 돈으로 또 다른 검술서를 구매해 태극검술길드를 만들었다.
그렇게 역경을 뛰어넘어 스스로의 한계를 부수고, 길드를 일구어 낸 태진성은 김신 처음 본 순간 그의 경지를 간파하고는 관심을 가졌다.
‘나를 뛰어넘는 재능의 소유자라, 흥미롭군.’
태진성은 스스로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모든 길드원에게 태극신공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중 대부분은 이해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난해한 무공인 태극신공.
태진성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스스로 무공에 자질이 있는 헌터를 구별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그 중 가장 특출 난 이들에게만 신공을 알려주었다.
그런 그의 앞에 조카인 태하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한 김신을 데려왔고, 태진성은 그를 본 순간 그가 가진 문제를 단박에 꿰뚫어봤다.
‘기(氣)는 완성이 되었는데 체(體)가 그것을 못 담는구나. 어찌 이리도 기형적인 성장인가. 흐음, 기본이 안됐구만.’
[가속]의 영향을 받아 급속도로 성장한 김신.
내공과 다르게 내공을 담는 그릇인 육체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순수한 노력이 필요하다.
‘아마, 수련이 아닌 전투만을 해왔기 때문에 수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못 느꼈겠지.’
내공으로 강화된 육체능력만을 사용해왔기에 정작 내공을 사용하지 않아야 할 체(體)의 성장이 막혀있었다.
성장을 위해서 조언을 구하는 김신과 그런 김신을 보며 시종일과 여유 있는 태도를 고수하던 태진성.
그는 김신이 꺼낸 말에 잠깐이나마 흔들렸던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고, 화가 났다.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고, 자신보다 모자란 사람에게도 배울 부분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김신의 말을 듣는 순간, 화경의 한 부분에서 정체되어 있던 태진성은 뜨끔한 기분과 함께 의문이 생겼다.
‘무엇을 믿기에 그리도 당당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일까?’
태진성은 김신의 말에 불신을 담아 답했다.
“만약 내가 자네가 해준 조언을 듣고도 배운 게 없다면, 자네는 그 말에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수호길드를 포기하고 이곳에 몸담겠습니다.”
예상 밖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태진성.
그는 김신을 마주보며 말했다.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나?”
“예.”
너무나도 당당한 김신의 태도에 태진성은 가볍게 혀를 차며 답했다.
“지금의 내 경지는 자네가 알다시피 화경(化境). 검을 휘두를 때, 비울 것은 비우고, 놓을 것은 다 놓았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뭔가 미련이 있는 것인지, 더 이상 진전이 없네.”
태진성의 말에 고민을 하던 김신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언에 앞서. 우선, 태진성님이 수련하시는 걸 볼 수 있겠습니까?”
3.
무당파의 12대 장문인 태극선인(太極仙人) 송무백(宋武佰).
무윤의 기억속의 그는 무윤마저 인정할 정도로 상당히 이례적인 재능을 가진 무골(武骨)이었다.
‘타고난 무재(武才)가 엄청나, 무당파의 최연소 장문인의 자리를 꿰찼다라. 흥미롭군.’
정파의 위선자가 협(俠)을 지킨다는 의미로 마교의 신도들을 학살하며 시작된 정마대전(正魔大戰).
“무당은 휠지언정 쓰러지지 않는다.”
“그래, 쓰러지지 않고 내손에 죽겠지. 그래도 넌 정파의 위선자 중에선 가장 협(俠)을 잘 지켰다.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주지.”
“...죽여라.”
서걱!
그 싸움에서 송무백은 무윤에게 태극혜검을 비롯한 무당파의 모든 무공을 써도 이기지 못했었다.
***
김신은 무윤의 기억을 바탕으로 태진성이 하는 무술을 단박에 알아봤다.
‘역시 지금 수련하는 무술은 태극혜검(太極慧劍)이구나.’
태극혜검의 묘리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부드러움을 이용한 이화접목(移花接木)의 수다.
한계를 넘어선 공격조차, 흘려내고 더 나아가 공격의 흐름을 뒤바꿔 공격한 자의 힘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검술.
아직 김신의 경지가 낮았던 탓에 태진성의 검술에 모든 부분까지 세세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있었다.
‘역시, 태진성의 검술은 확실히 송무백의 검술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야.’
태극혜검은 부드러움을 이용한 공격을 해야 하는 무술이지만, 태진성은 전혀 그 묘리를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흠...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어쨌든 태진성의 검술에서 문제점을 발견한 김신은 그의 수련이 끝날 때까지 생각을 고르며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태극혜검은 어떤 검술입니까?”
“그걸 어찌...!”
“우선 제 말에 대답해주십시오.”
김신의 말에 놀란 태진성.
그는 김신의 이어지는 말에 얼굴을 가볍게 찌푸리며 검을 집어넣고 답했다.
“부드러움으로 이기는 검술.”
“그렇군요.”
대답을 듣는 것까진 성공했으니,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태진성의 문제를 기분 나쁘지 않는 선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하니까.
김신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해야 할 단어를 신중하게 골라가며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부드러움은 상대의 공격을 흘려내고, 비우는 의미가 아닙니까?”
“맞네.”
단어의 선택이 나쁘지 않았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하는 태진성.
김신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흘려낸다는 것은 다르게 표현하자면 힘을 다른 방향으로 돌린다는 표현으로 바꿀 수도 있겠죠?”
“그렇겠지.”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태진성의 모습에 김신은 쐐기를 박는 말을 날렸다.
“그렇다면 그 힘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면 결국에는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김신의 말에 담긴 의도를 눈치 챘는지, 놀란 표정 지으며 말없이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시작하는 태진성.
김신은 정자에 앉아 조용히 그를 쳐다봤다.
“후...”
조언이란, 상대방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말로 거들어 주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 결과를 찾을 수 있게 이끌어야 한다는 거다.
“다행이다.”
김신은 자신의 설명이 태진성에게 제대로 전해졌다는 것에 안도했다.
태진성이 명상에 들어 간지 어느덧 5시간이 흘렀다.
꽤 긴 시간동안 태하윤과 자리를 지키며 태진성의 명상을 지켜 본 김신.
해가 지고 달이 높이 떴을 쯤, 쏟아지는 졸음과 뻐근한 느낌에 잠시 기지개를 켠 그의 시선에 명상에서 깬 태진성의 모습이 보였다.
‘뭘 하시는 거지?’
조용히 일어난 상태 그대로 옆에 두었던 검을 뽑아든 태진성.
스릉-
나무 앞으로 다가간 그는 밑동을 향해 가볍게 수평 베기를 했다.
스윽- 톡.
아주 작은 소리만 들릴 정도로 가볍게 맞닿은 검과 나무.
하지만, 그 결과는 평범하지 않았다.
스으윽-
귀신처럼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나무를 통과하는 태진성의 검.
그 모습에 놀란 김신은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볐다.
바로 그때, 믿지 못하는 김신의 귓가에 쐐기를 박는 태진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군.”
만족한 태진성은 곧장 고개를 돌려 김신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럼 이제 내가 조언을 해줄 차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