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7 (32)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 [완] ==============================================================
문득 숙종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범상치 않은 기품의 계림공이 곡주에 나타났을 때, 운명처럼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자객을 잡는 데 일조하자 계림공은 나에게 물었다.
“나를 지켜보고 있었더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이유를 물었고,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제가 볼 수 없는 높은 곳은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였습니다.”
그 질문에 계림공은 재미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나에게 그들의 세상을 말해주었다.
“고니가 호수에 떠있으면 그 자태가 우아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가라앉지 않기 위해 물밑에서는 쉴 새 없이 다리를 움직여야 하지. 네 녀석이 본 높은 곳이란 바로 그런 곳이다.”
나는 대체로 성격이 온순하고 정이 많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한 성격은 현대 사회에서 모범생이자 직장인의 전형이란 소리를 들었고, 한나라 말기엔 인애(仁愛)의 표상이 되었다.
대학생들의 독재 반대 데모가 한창이던 80년대,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된 명문대생들도 데모에 숱하게 참가했었다. 그들의 인터뷰 중 하나가 떠올랐다. ‘우리는 대체로 성격이 온순하고 참을성이 강합니다. 제도권이 가르쳐준 공부방식이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투사가 되겠다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 질문을 받은 기자가 되물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학생은 ‘시대 탓일 겁니다.’라고 답했다.
시대 탓이라니? 어쩌면 핑계처럼 들릴 수 있는 그 답이 기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수긍을 일으켰던 것을 생각하면 그 시대를 관통하는 함의(含意)가 그 대답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관용과 인애는 어디까지 적용되는 것일까? 나는 지금껏 그것이 정도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개인적으로 지켜왔다. 그러나 그런 내 뜻과 무관하게도 자매가 죽어야 했다.
자매가 죽고 이소가 두려움에 떨었을 때,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맹세했었다.
“약속하마. 오늘 이후로 내 눈앞에서 내가 아는 어떤 누구도 죽지 않게 만들겠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복건으로 건너가 불패라는 이름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약속한 모든 것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 쓰러질 수 없었다.
“죽지 않는다? 그것이 네놈의 결의인가?”
맹세처럼 중얼거린 말에 곽약사가 반응했다. 곽약사는 내 기도가 변한 것을 눈치챘는지 신중해진 태도를 보였다.
“부모님은 내가 성격이 온순하고 정이 많은 아이라고 말했지.”
한 걸음을 내딛자 전신에서 나조차 제어할 수 없는 힘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가후도, 여포도, ……그리 말했었다.”
온순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 투사가 되어야 했던 까닭, 틀에 박힌 알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나가기 위한 진통은 그저 울음과 호소, 공감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는 개인과 개인의 대결이었지만 나에겐 이 시대에서 행한 모든 행위의 마지막 변곡점(變曲點)으로 보였다.
그래서 놓을 수 있었다. 끝까지 둘은 하나라고 말하면서도 결국 이준경이지 척준경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필요한 것은 어린 시절의 진짜 척준경이었다. 설령 이 선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준경이 아니게 된다 하더라도…….
-능승강적자(能勝强敵者), 선자승자야(先自勝者也).
강한 적을 이길 수 있는 자는 먼저 스스로를 이기는 자이다.
가후가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었다. 아신아를 강조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하니 아신아의 본래 뜻은 더 큰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나를 믿는다. 스스로를 먼저 이겨내는 자는 내가 꾸는 꿈, 이상(理想)이 결국 내가 아니더라도 충실히 이뤄질 것을 믿는 것이다. 본을 보인다는 것도 결국 그런 것이 아닌가?
민 제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해서 나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민 제국의 흔적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때를 기억하고 그때의 이상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노력을 하는 자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역사는 옛날 일을 입맛대로 편집하여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토대를 두고 지난 일을 읽어내고 정의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나는 척준경이다.”
곽약사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비슷한 감정을 나 역시도 느꼈다.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방관자였다. ‘그’ 역시도 이랬던 것일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심무를 느꼈다는 것은 확실하군.”
곽약사는 칼을 빼서 칼집을 저만치 던져버렸다. 그러자 양쪽 모두 웅성거림이 심해졌다. 칼집을 던진다는 것은 목숨을 건 승부를 펼치겠다는 무언의 행위였기 때문이다.
“무예란 자기의 몸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수련이다. 망인(고영창)이 항상 강조하던 말이지.”
“고영창은 단 한 번도 나를 넘지 못했다!”
곽약사가 먼저 도약하여 무서운 기세로 칼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부딪치기 전에 압력이 느껴졌다. 아까의 나였다면 피하는 것을 택했으리라.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아니었다. 어느새 칼을 뽑아 맞상대를 선택한 것이다. 허공에서 누르는 힘과 그것을 떨치기 위한 힘의 격돌, 칼이 두 힘을 이기지 못하고 단숨에 산산이 조각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격돌 직후 나와 곽약사의 표정은 정확하게 상반되었다.
“내 칼이 좀 좋은 칼이지.”
중원 최고의 대장장이라 할 수 있는 굉천뢰 능진이 망간 합금으로 만든 칼은 비슷한 공법으로 만든 송 황실의 보검을 제외하면 단단함으로 대적할 칼이 거의 없었다. 곽약사의 칼 역시 보검이라 부르는 종류겠지만, 그 정도에는 미치지 못했다.
나는 칼을 던졌다. 밀리던 내가 승기를 잡자 환호하던 아군은 유리한 상황을 스스로 팽개치자 알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것은 상대인 곽약사도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나는 입고 있던 갑옷을 벗어 던졌다.
“사실 이건 좀 사기지. 신병이기에 가까우니까.”
“병기의 이로움을 제대로 사용한다면 그것 역시 심무다.”
그러면서도 맨손 박투를 거절하지 않겠다는 듯 곽약사 역시 기꺼이 갑옷을 벗어 던졌다. 서로 자세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호흡이 한순간 폭발적인 힘을 만들었고, 그 힘은 어떠한 의식의 통제 없이 마치 야수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불과 일각 전의 나였다면 그 힘을 제어하려 했겠지만, 야수를 가둔 빗장은 활짝 열려 있었다.
마치 한 마리의 사슴을 사냥하기 위해 전력으로 뛰는 호랑이 같다고나 할까? 모든 신경과 힘이 오직 그 하나에 집중되었다.
내 주먹이 곽약사의 가슴을 노렸다. 곽약사 역시 단단히 방어했다. 그러나 한순간의 짧은 격돌이 끝났을 때 신음을 터트리며 뒤로 물러난 것은 곽약사였다. 그런 곽약사를 향해 내가 말했다.
“자기의 중심을 알고 자기 몸의 올바른 쓰임을 아는 자는 강하다. 그리고 그 강함은 상대적인 것이다. 고영창이 해준 말이지.”
“그래서 나보다 강하다는 말인가?”
“이제야 내 몸의 쓰임을 정확히 깨달았다는 말을 해주려던 것뿐이다.”
나는 그저 씩 웃으며 쉴 새 없이 곽약사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척준경이 금나라에 사대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은 그 자신이 약해서가 아니라 고려가 당하지 못할 것을 예견했던 것임을.
곽약사의 안면이 부어올랐다. 오른팔이 꺾였다. 왼쪽 무릎이 부러졌다.
“믿을 수 없다. 네놈은 혹여 귀신인가?”
귀신이라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척준경 그 자체였으니까 말이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까지 내가 처한 상황 자체가 어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었던가? 꿈이라면 그럴듯한 이유가 되겠지만 말이다. 구운몽처럼.
*
“후보 단일화를 하잔 말씀이십니까?”
피습 사건을 의연하게 대처하면서 인기가 높아진 나에게 어쩌면 예상했던 제안이 들어왔다. 제1야당인 국민당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를 제안한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나는 국민당의 김원봉 대통령 후보자와 각자 일인의 보좌관을 배석한 오찬을 가지고 있었다.
‘김원봉, 올해 60세,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사람이다. 나와 같은 재선 의원이지만 경력은 이미 비교할 수 없는 분. 조사할수록 미담만 나와서 검찰도 손을 들었다는 소문이 있지.’
젊게 보이기 위해 염색을 하던지 가발을 쓰라고 측근들이 권유했지만 자연스러운 것이 좋다며 반쯤 빗겨진 백발을 고수하고 있는 모습이 흡사 시골 노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소탈했다. 학생 시절부터 그분의 활약상을 보았기에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이기도 했다. 차라리 이런 분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어떨까 생각한 적도 많았다.
문제는 대표적인 개헌 반대론자라는 것이었다. 혹독했던 독재 정권을 경험해서인지 아직은 개헌이 시기상조라는 모습을 보였다. 그분 입장에선 그것이 옳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대통령 출마 후 여러 차례 미래 세대를 위한 개헌이 필요하다고 열변을 토한 바가 있었다. 그것을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는 없었다.
내가 1위에 조금 뒤지는 2위 지지율을 계속 유지하자 제1야당인 국민당 입장에선 난감한 상황이었던 것 같다. 명색이 제1야당이 후보를 중도 사퇴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선거에서 지면 야권 정권 교체보단 제1야당 타이틀을 지키는 것에만 급급했다는 비난 여론을 받을 테니까 말이다.
그들이 들고 온 제안은 개헌 여부는 단일화 후보에게 선택권을 주고 탈락한 후보 측에겐 국무총리직과 정부 요직의 절반을 지명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 정도야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김원봉 후보자가 개헌해도 좋다는데 찬성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그러나 단일화를 위한 방안을 들었을 때 절대 지지 않을 방안을 들고나와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우리 측이 내세운 것은 단일화 여론 조사였고, 국민당이 내세운 것은 각 당의 당원 참여 절반, 국민 참여 절반의 비율로 여론 조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당원이 월등하게 적은 신생 제3당의 입지를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안이었다. 그것을 염두에 두었는지 절충하듯 세대별 가중치를 둔 단일화 여론 조사 카드를 내밀었다. 선거에서 패배하더라도 이 이상 양보는 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세대별 가중치를 둔 단일화 여론 조사는 10년간 세대별 투표율의 가감에 따라 1표의 가치를 나눠 매기자는 것이었다.
청년층의 지지는 내가 앞선다고 해도 노년층에선 김원봉 후보자의 인지도를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 단일화 여론 조사는 인기투표에 가까운 결과가 나올 것이 뻔하다. 최근 바람을 타고 있는 나를 이기기가 쉽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니 고심해서 제시한 방법이리라.
단일화를 위한 시간은 촉박했다. 앞으로 두세 번의 짧은 만남밖에 기회가 없었다. 오늘은 제안을 제시하고 듣는 것까지만 하자는 조언을 받았지만 나는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과연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최선의 재목인가? 나는 나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김원봉 후보자도 몇 가지 결격 사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세간에서 바라보는 나에 대한 우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김원봉 후보자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 역시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간의 눈싸움은 거의 동시에 터져 나온 육성(肉聲)으로 끝이 났다.
“이 의원, 사실 단일화 방안에 대한 내 솔직한 심정은…….”
“받아들이겠습니다.”
양쪽이 어떤 의미로든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은 당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미안함을 드러낸 것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런 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으니까 말이다.
“저는 김원봉 후보자님을 평소 존경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되시기에 충분한 분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대통령이 되고자 한 것은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국민, 더 나아가 세계인을 위한, 우리가 사는 지구촌을 위한 상생의 길 말입니다.”
“지구촌……. 허허허, 실로 오랜만에 듣는 말이군요. 요새는 세계화니 글로벌리즘이 더 흔하게 쓰이던데.”
“국익도 못 챙기면서 지구촌 운운하는 몽상가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꿈이 지금 당장 이룰 수 있는가? 꼭 지금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 그것이 대통령이어야만 이룰 수 있는 일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사실 국회의원들이 제 역할만 했더라도 우리는 더 나아졌을 것입니다. 김원봉 후보자님이 양극화 해소와 서민 빈곤 생활 해소를 위해 공약한 부자 과세법과 서민금융 공약 역시 선후를 가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훌륭한 공약이기도 하고요. 저 역시 지지합니다. 단지 우리가 부딪치는 것은 안보와 외교, 기업 처우에 대한 몇 가지 문제였을 뿐이지요.”
“이 의원 자네…….”
김원봉 후보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치 내가 선선히 후보직을 양보할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차피 집권해도 야당들의 연립정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원활한 국정운영이 불가능한 상황이니 현실적인 계산으로 미리 지분을 최대한 챙길 속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몇 가지 문제라고 했지만, 핵을 둘러싼 문제나 기업 과세 문제, 외교 정책을 바꾸는 문제는 매우 민감하고 핵심적인 공약에 속했다. 그것이 다른 당과 우리 당의 차별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진심이 통한다면.’
내가 먼저 내려놓고 내 진심을 알린다면 유권자들은 어떻게 화답해줄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무모한 선택일 수 있겠지만, 나에겐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모든 경험의 총체(總體)이며 결과를 낼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불씨를 던졌지만, 그 불을 피우고 그 불을 이용하는 사람이 꼭 나일 필요는 없다. 과거에도 지금도 나는 불씨를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 같은 평범한 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한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감히 버릴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 유력 일간지 일면엔 나와 김원봉 후보가 손을 맞잡고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는 소식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
“졌네.”
노준의가 목숨처럼 여기던 흑죽봉이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가 바닥에 꽂히자 노준의는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환호든 탄식이든 가득 메워야 할 넓은 공터는 바람만 그득했고, 나는 노준의가 놓친 흑죽봉을 주워 그에게 내밀었다.
드넓은 연무장엔 오직 둘뿐이었다. 이 연무장은 결코 평범한 곳이 아니었다. 요나라의 다섯 수도 중 남경의 황궁 위사가 모여서 훈련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즉, 이곳은 남경의 궁성이었다. 후일엔 북경이라 불리는 곳.
“일사가 꺾이고, 동경이 고려, 발해, 여진 연합군의 손에 떨어진 이후 남은 사문의 장문인이 대결을 신청하여 합공했으나 처참하게 패배. 이선의 초청으로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화산논검으로의 길이 열렸지만, 자네는 무림인이 아니라며 거절했지. 그러면서 이선에게 전장에서 대결한다면 거부하지 않겠다고 했지. 그 호기에 중원의 모든 무림인이 놀랐다. 그리고 나 역시 직감했다. 나도 질 수 있겠다는 생각.”
곽약사가 쓰러진 날, 그를 따르던 발해인들은 모두 고영창의 휘하로 모였다. 이미 그렇게 약속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발해 수복의 가능성이 가장 큰 이에게 힘을 몰아주기로 되어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곽약사는 살아서는 발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앞잡이 노릇을 했고, 죽어서는 발해의 미래를 걱정한 충의지사가 된 셈이었다. 요, 송, 금을 자유자재로 오가면서 두둑한 대접을 받았던 처세술이 유감없이 발휘된 셈이다.
요나라가 저 멀리 추운 북방으로 도망치고 일부는 야율대석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자 약속대로 새로운 국가들이 연이어 생겨났다. 아구다의 금나라가 그러했고, 발해가 그러했다. 무엇보다 최대의 수혜자는 고려였다. 고구려의 국내성 터를 되찾음으로써 선조의 유훈을 지킴은 물론 고구려의 실질적인 계승자임을 천하 만방에 과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진정한 최초의 제국이 탄생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서경파의 약진으로 나타났다. 아니 이제 겨우 균형을 맞췄다는 편이 맞았다. 고려에서 가장 강한 세력들은 대개 신라계였고 안정된 남부의 경제력이 뒤를 단단히 바쳤지만, 북방 개척이라는 어명 아래 상당수의 소작농을 이주시켜야 했다. 별무반을 예종이 틀어쥐고 있는 이상, 불만을 제기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자겸이 예상했던 결과가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이자겸이 존재했다면 방해하기 위해 갖은 수를 썼겠지만, 이제는 소국인 오월국을 지키기 위해 매일 같이 머리를 싸매고 있는 통에 건강이 악화하고 있는 소문이 들렸다. 권신일 때의 입장과 왕이 되어서의 입장은 천지 차이임을 그는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진 것이 분한가?”
내가 내주는 흑죽봉을 건네받은 노준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나는 군인이네. 개인의 승패보다 국가의 국운에 더 관심이 있지. 우리는 숙원이던 연운 16주를 되찾고 장성 이남을 모두 탈환했으니 더는 바랄 것이 없네.”
“장강 이남을 되찾고 싶은 마음은 없나?”
“장강 이남을 모두 주고서라도 찾고 싶을 만큼 연운 16주는 중요한 곳이었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네. 자네라면 강주에서의 승기를 몰아 개봉으로 향할 수도 있었어. 내가 눈여겨보고 있던 장수들이 모두 자네에게 투신했지. 그런데도 자네는 그러지 않았어. 오월국을 그대로 놔두고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 대리국도 마찬가지고. 오대십국으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싶었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았다는 것인가?”
“송의 장군으로서 이유야 어쨌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지. 그리고 오늘이 내가 자네를 편하게 대할 마지막이라는 것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우리는 그저 스치는 바람의 시원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 연무장 한쪽에서 한사람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갑자기 나타난 것인지 모를 정도였지만 나나 노준의나 별로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송문고정검을 등 뒤에 맨 장신의 도사, 그는 바로 입운룡 공손승이었다. 내가 지금의 현실을 현실이 아닌가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 정도로 그의 도술은 내가 아는 상식을 깼다.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송도 고려도 양나라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겠군요.”
나도 노준의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머쓱한 분위기임에도 공손승은 쾌활했다. 사실 대꾸할 말이 별로 없긴 했다.
“스승님이 직접 이선에게 가셨습니다. 인세에 존재해서는 안 될 반령(反靈)이라며 종남산을 나서려던 이선을 설득하기 위해서지요.”
이선이란 존재가 진짜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공손승의 스승인 나진인이 직접 움직여야 할 정도로 존재감이 컸다. 나진인은 수호전에서 사실상 신선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의 도력이 중원 제일이라는 뜻이다. 그런 자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움직였을 때는 상대 역시 그에 상응하는 자라는 결론이다.
그나저나 반령이라니? 있어서는 안 되는 영혼이란 뜻인가? 그들은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나를 이런 상황에 빠지게 한 무언가와 연결된 것인가?
의문에 빠진 나를 보며 공손승이 빙그레 웃었다. 마치 내 고민이 무엇인지 짐작하는 사람 같았다.
“사실 삶이란 개인에게 있어 진짜일지 모르지만, 타인에겐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닥쳤을 때만 그것이 삶이 되는 셈이지요. 그리고 그 삶의 영역이 겹쳤을 때 보통 두 가지 선택합니다. 하나는 타인의 영역만큼 물러나거나 아니면 타인의 영역을 빼앗던지요.”
“같이 영역을 공유할 수는 없는 건가?”
“삶이란 외길입니다. 반복이 없지요. 그리고 완벽히 같은 인생도 없지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빼앗거나 빼앗기거나를 반복하니까 말입니다.”
심오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긴 여정의 끝이 보이는 것 같달까?
“스승님께서 한 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
하긴 조건이 없다면 이선을 막자고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 신선이라 불려도 무방한 그가 나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다면 더는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말입니다. 같은 꿈을 꾸는 것은 당신만이 아닙니다.”
놀랐어야 하지만 이상하게 차분해졌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아는 현대는 누군가 꾼 꿈의 결과물일 수도 있었다. 그것이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미국인인지는 또는 전혀 예상 밖의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약속하지.”
쉽게 대답이 나오자 공손승은 재미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나는 천하제일인이라 공인받고 있고, 송나라 휘종이 자신의 딸을 주려 하고 있으며, 제국의 반열에 오른 고려의 부마이자 오월국의 부마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덧 동아시아 최대 선단의 주인이기도 했다. 죽기 전에 아메리카를 밟아본다는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는 셈이었다.
더 욕심을 부린다면 대항해시대 이상의 제국주의 시대를 열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한 지 오래였다. 그렇게 쌓인 약속들이 나의 족쇄가 되었고 곽약사와의 대결에서 밀리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결국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았고, 나를 다시 찾았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맴돌다가 서쪽으로 사라졌다. 다시 시선을 돌리니 공손승은 사라지고 난 후였다.
“술은 마시나?”
“잘 마시지 않지만 오늘은 마실 수 있을 것 같군.”
나와 노준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깨동무를 하고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참으로 화창한 날씨였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문화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선서를 마치자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는 후보 단일화 여론 조사에서 불과 1.2% 차이로 아깝게 자리를 내준 김원봉 후보자의 모습도 보였다.
내가 겪었던 모든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내가 죽기 전에 이 기이하고 벅찬 이야기들을 한 편의 소설로 남겼으면 하는 바람이 갑자기 들었다. 어쩌면 그 소설을 접하면서 자신만의 삶을 찾아갈 사람도 분명히 나오리란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경험이었지만 그 경험이 나를 변화시켰고 이제 더 많은 사람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그것이 옳은 길인지 그릇된 길인지는 나도 모른다. 단지 확실한 것은 내가 아는 역사란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할 필연성의 장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들의 결단과 참여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될 가능성의 장이라는 것을, 그 가능성이 우리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것임을 믿는 것이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제 우리는 동아시아 시대를 열고, 더 나아가 세계적인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건강하고 미래지향적인 이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도전을 극복한 저력이 있습니다. 위기마저도 기회로 만드는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선조를 기리는 것처럼, 먼 훗날 후손들이 오늘의 우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대통령 이준경.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에겐 최고의 영예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인생을 줄곧 봐왔던 여행자라면 내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줄곧 강조하지만 나는 주변에 평범하다고 믿는 자들과 같은 부류였다. 그중에는 나보다 더 나은 인성과 재능으로 세상을 바꿔놓을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있으리라 믿는다. 나 같은 사람도 했는데 여러분이라고 못할 것은 없으니까.
그것이 내가 여기까지 달려온 단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完]
========== 작품 후기 ==========
사실 팔리지 않을 글이란 걸 알면서도 한번쯤은 이런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무모하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포부만 크고 부족한 글을 지금껏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몇년을 끌었던 완결을 내고나니 이유야 어쨌든 시원섭섭합니다.
이제 이쯤에서 저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이준경과 마지막 작별을 하고자 합니다. 그가 걸어나갈 길은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닐겁니다. 그 길까지 그려보고 싶지만 저 또한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다음 작은 예고해드렸다시피 '삼국지 마행처우역거'이고, 오늘 게시판을 생성하였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 저도 신나고 독자분들도 신나는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그 이후는 다시 써보고 싶었던 글을 끝까지 달려봐야겠죠. 우리의 마음은 남쪽을 향한다 2부를 계획하고 있는데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생각입니다. 쓰고 싶은게 워낙 많아서.
정말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