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6 (32)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 ==============================================================
곽약사가 입을 뗀 것은 두 번 정도 호흡이 지났을까?
“최선을 다하라?”
그는 웃고 있었다.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얻고자 하는 자와 지켜야 할 자, 누가 더 강하냐고 물었지?”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껏 그 어떤 상대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빠름이었다.
고구려가 발해의 시작이듯 고구려 무예가 발해 무예의 뼈대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뼈대를 계승한 자는 여럿이었고 그중 고영창에게서 호흡을, 고의화에게서 자세를 배웠다. 그 둘은 수벽타를 경지에 이르도록 수련한 고수들이었고, 그런 수련의 성과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스승들이었다.
그런데도 곽약사 앞에서는 고영창 스스로 한 수 아래라는 것을 인정했다. 나는 약간의 겸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최초의 한 수를 보면서 그것이 진실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가까스로 복부를 막아냈지만 묵직한 타격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반쪽짜리구나.”
“반쪽이라고?”
곽약사는 자신의 머리와 심장을 손바닥으로 차례로 짚었다.
“수벽타는 심무(心武)로 가기 위한 수련이지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마음 가는 곳에 몸이 가는 경지, 그것이 심무지. 몸이 축날 정도로 특정 부위를 가혹하게 단련하는 방식? 불필요한 힘을 빼고, 바람처럼 부드럽게, 마음을 비우고 흐름을 주시하며 찰나에 반응한다.”
그가 다시 움직였다. 그 움직임은 아까보다 더 빨라져 있었다. 지금껏 나는 많은 강자를 만났다. 그러나 누구도 이 자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주먹이 나의 방어를 뚫고 어깨를 치자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뒤로 정신없이 밀려났다.
“그리하여 마지막 일격은 마음으로 기운을 싣는다.”
고영창은 호흡을 강조했었다. 호흡을 모아 폭발적인 기세로 한점을 때린다. 그런 가르침에서 단지 호흡을 마음으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지만, 천지 차이의 결과를 보였다. 재능의 차이인가? 아니면 정말 심무라는 무예의 궁극이 존재하는가? 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이란 단어는 호흡이란 직관적인 단어에 비해 모호한 해석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깨달음의 다른 뜻일까?
“나는 지금껏 최선이란 말을 쓰지 못했다. 내 머리는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고 주장하지만, 내 심장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속삭이고 있기 때문이다. 얻고자 하는 자와 지키는 자의 차이도 알지 못한다. 얻지도, 지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놈이 그 뜻을 모두 깨우치고 있다고?”
내가 밀려난 것이 충격이었는지 아군이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것은 나 자신이었다. 유해섬을 상대한 후 그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자들의 수준을 낮춰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명만 가진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진정 가소롭구나.”
가슴이 내려앉는 심정이었다. 지금껏 이런 수모를 당한 적이 있었던가? 마치 지금까지의 내 노력을 하늘이 뒤집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뀌는 역사를 본래 궤도로 돌리려는 자정 작용 같은 시도랄까?
아니 그런 생각을 떠나서 내가 오만했던 것을 반성해야 했다. 역사적으로 척준경이 패배한 기록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더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 기록된 역사만이 역사일까?
금이 건국되고 고려에 사대할 것을 요구했을 때, 고려의 조야는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본래 여진이 고려에 사대했기에 자존심상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척준경은 사대할 것을 건의한다.
-금은 과거엔 소국이었기에 요와 고려를 섬겼으나 지금은 흥성하여 송과 힘을 합쳐 요를 멸망시켰습니다. 정치가 잘 이루어지고 군사가 강하여 날마다 강대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상대가 우리와 붙어 있습니다. 형세를 살펴 사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국이 대국을 섬김은 선왕의 법도입니다. 마땅히 사절을 보내 조회해야 합니다.
동북 9성 반환 이후 척준경의 대외 활약은 매우 미미하다. 그가 중앙 정계에 진출해서라는 이유를 댈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에는 그의 가치를 너무 썩힌 셈이다. 그 사이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 내가 곽약사와 마주쳤듯 그 역시 비슷한 경우를 겪었다면?
‘만약 그렇다면 그는 결론이 났고, 나는 아직 진행형이라는 차이뿐이군.’
그러나 두 번의 합으로 내게 승산이 많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선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보여야 하건만 곽약사는 조금의 허점도 보이지 않았다. 고영창이 그를 발해제일인이라고 서슴없이 부를 만했다.
참으로 허무했다. 손오공이 여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했듯 나 역시 그런 것이란 말인가? 그때였다. 아군 진영의 장수 중 한 명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소리쳤다.
“개, 돼지를 잡으면서 그렇게 떨리더냐!”
곽약사의 안색이 변했다. 그러다가 어이가 없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윤관을 힐끔 보니 거의 기절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내가 질 것을 예상하지 못했는데 일방적으로 밀리는 것도 그렇고, 하급자가 상급자인 나를 비난하는 모양새로 비치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 나와 소리친 그를 보며 참 공교롭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병마판관 왕자지(王字之)였기 때문이다. 본래 동북 9성을 얻는 과정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척준경이 구해주면서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이후 전투에서 척준경을 도와 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위험에 빠질 일이 없었으니 본래 소임에 충실하고 나는 까마득한 상급자일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나섰다. 대체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개, 돼지라고 생각해라. 인정을 손에 두고 있다면 죽는 것은 네 녀석이 될 것이다!”
나는 그대로 굳었다.
“어떻게 그걸…….”
내가 나임을 자각하기 전 처음으로 나란 사람을 세상에 드러냈던 사건을 떠올렸다. 이소와 자매를 만나는 계기가 되었던 그 사건.
왕위 계승에 관여하던 권신(權臣) 이자의를 상대로 계림공(숙종)이 일으킨 혈사가 아닌가? 이제 생각해보면 단종과 세조의 그것을 보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하지만 그때는 숙종의 즉위가 한미한 집안을 일으켜 세울 출세의 동아줄로 보았기 때문에 필사적이었다.
처음으로 살인하게 된 그 날, 고의화는 내게 지금 병마판관이 외친 말을 들려주었었다.
그의 말을 조언으로 삼아 나는 그날 마주친 모든 적을 개, 돼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검을 휘둘렀다. 비명이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듣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어찌 그걸 병마판관이…….”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병마판관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누이의 남편이 바로 왕국모 장군이다! 역적 이자의를 잡을 때, 대정 고의화를 궁으로 안내했던 서리(胥吏, 궁중 실무 말단)가 바로 나다!”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왕국모 장군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날의 혈사는 실패로 끝났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도움 중엔 병마판관 같은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나 무례한 행동으로 하극상의 멍에를 질 것을 각오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불과 한 호흡, 폐부에 담았던 숨의 기운이 다하기 전에 소년 장수는 다섯을 벴지. 그날, 나는 처음으로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소년 장수가 말한 개, 돼지가 아니라서.”
손에 사정을 두지 말라는 고의화의 조언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었다. 나를 가로막은 자들은 실전을 훨씬 많이 겪었을 것이 뻔한데도 기세에서 눌렸다. 그들은 나를 전쟁터에서 흔히 마주치던 병사로 보았고, 나는 그들을 사냥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자의는 또 어떻고! 그 이름값에 눌려 누구도 이자의를 공격하지 못했는데 망설임 없이 비호처럼 날아들어 가슴팍에 칼을 꽂은 것은 누구였지? 약관에 이르려면 한참 남은 앳된 얼굴의 소년 장수였다!”
병마판관은 이제 울부짖고 있었다. 우상으로 여기던 내가 너무 쉽게 무너진다고 생각한 것이었을까? 그러나 고수의 실력은 한 수로도 가늠할 수 있다. 나에게 쓰러진 숱한 고수들처럼.
“양을포는! 양을포는 어떻게 이겼나?”
양을포까지? 설마 병마판관이 요나라로 가는 사신단에도 끼어 있었던가? 그런데도 어째서 그의 존재를 몰랐을까? 그때의 나는 몇몇 인연 외에는 오직 무예에만 미쳐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수십 명에 이르는 미관말직까지 다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기억하는 것이 있다.’
객관적으로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한 양을포를 이겼던 방법을, 그리고 자신의 승리를 바라며 지켜보던 뜨거운 시선들을 기억했다. 숱한 시선 중에 지금의 병마판관이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군의 눈빛은 그때의 병마판관과 같았다.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어. 사람에 얽매어 중요한 것을 놓쳤다.”
나는 다친 어깨를 풀며 천천히 곽약사에게 다가갔다.
“때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절대 타협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때가 있다는 것을. 생각이 많아진 탓에 예전의 나를 나라고 인정하면서도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지.”
========== 작품 후기 ==========
초고입니다. 부족한 부분은 계속 수정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