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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55화 (255/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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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

뜻이 어려운 글도 자꾸 되풀이하여 읽으면, 그 뜻을 깨우치게 된다.

연예계에선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어 있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물론 나는 연예인이 아니고 정치인이고 제법 유명한 편이긴 했지만, 극우에 의한 피습 사건은 전국적인 인지도를 쌓을 만했다.

더욱이 피습 직후 깨어난 상황에서 보여준 침착함하고 이성적인 대처가 국민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마흔 넘은 애송이가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선 것에 분노를 느껴 애국심에 나섰다는 범인의 발언은 다른 나라에선 40대 총리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데 우리는 왜 그러지 못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까지 불러일으켰다. 그 여파로 나는 지지율 3위에서 1위와 별로 격차가 나지 않는 2위까지 올라갔다.

그러자 당선 가능성이 없다며 외면했던 사람들이 나를 만나기 위해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들을 소홀히 대할 수는 없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이후 바쁜 일정이 계속되었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보좌관이 물었다.

“무리한 일정을 고집하시는 것 아닙니까? 아직 몸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다고 의사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힘들어.”

나는 몸을 깊숙이 파묻고 팔짱을 꼈다. 한 시간은 더 가야 선거 사무실에 도착하는 터라 모자란 잠을 보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목소리는 어느덧 몽롱해졌다.

“그래도 과거에 비하면 힘든 것도 아니지. 그 어떤 과거라도 말이야.”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말해달라며 되묻는 보좌관의 음성이 들렸지만 나는 이미 꿈나라로 향한 상태였다.

*

늙고 병약한 호랑이라도 맹수라는 것을 잊지 않은 듯했다. 아구다의 여진과 고려, 송이 50만에 가까운 대군을 이끌고 북상을 시작하자 요나라 역시 70만의 대군으로 맞섰다. 엄청난 대군이었지만 여진이 금을 세우고 불과 수만의 기병으로 공격했을 때도 모래알처럼 무너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하니 그때의 역사보다도 월등한 전력 앞에서 요나라가 어찌 버틸 수가 있을까?

사방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 역시도 파죽지세였다. 고려군의 총사령관이 선봉에 나서는 것을 노려 수십 차례 공격해왔지만, 그것이 오히려 아군의 피해를 줄였다. 나의 용맹이 널리 알려질수록 양나라의 안정과 결속 또한 탄탄해졌다.

요나라가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것은 건곤일척의 회전뿐이었다. 그들은 세 갈래 갈린 전장 중 한 곳을 목표로 삼아 궤멸적인 타격을 준비했다.

남경으로 향하는 송을 먼저 공격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뜻밖에도 요의 주력이 선택한 것은 내가 이끄는 고려 별무반이었다. 고려군이 이 모든 사단의 원인이라고 진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설령 내가 항우처럼 천하무적을 자처한다고 하더라도 한신의 십면매복 앞에서는 맥을 못 출 것이란 계산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상치 못했다.

적의 주력이 이쪽으로 올 것이란 소식에 잔뜩 방어 준비에 여념이 없던 장수들이 위계(僞計)에 속았다며 펄펄 뛸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나타난 적은 고작 3천의 기병이었다.

그래서 나도 저들의 거짓 정보에 속은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저들이 가장 만만하다고 여기는 송나라를 먼저 공격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3천의 기병을 이끄는 장수가 천천히 앞으로 나와 자신을 밝히자 나는 속셈을 눈치챌 수 있었다.

“우리는 발해 기병이다. 그리고 나는 곽약사다.”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해 주변을 살피기로 했던 고영창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쩌면 상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영창과 발해군은 최소한 하루 거리 떨어진 곳에 있으니 지금으로선 어떤 도움도 될 수 없었다.

곽약사의 명성은 고려에도 알려진지라 그의 등장에 고려군은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이내 나를 보는 기대감에 불타오르기 시작한 것은 내가 지지 않으리란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자신감을 이용하기 위해 곽약사가 이제야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영창은 자신보다 곽약사가 강하다고 말했다. 발해 제일인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그런 만큼 자신의 실력에 대단한 자신감이 있을 것이고 그런 실력을 바탕으로 이번 일을 계획했을 것이다.

나만 꺾는다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러한 생각이 담긴 눈빛이 나를 향했다. 그러한 생각을 읽었으면서 감히 자신과 일대일로 대적할 생각이 있느냐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그런 계획을 알고 있더라도 내가 피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내가 움켜쥔 주먹을 통해 느꼈기 때문이리라.

뭔가 엄청난 대결이 벌어질 것을 양군은 짐작한 듯이 서서히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기이한 열망이 단숨에 주변 온도를 끌어올린 듯했다.

앞으로 나가는 나를 윤관은 말리지 않았다. 나라는 사람을 여러 차례 겪어온 그인지라 이번에도 이길 것이라 확신한 모양이었다.

곽약사가 말에서 내려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런 그를 발해 기병들은 만류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자신들의 무신이 절대 지지 않을 것이란 여유가 담겨 있었다.

단 한 번도 꺾이지 않았던 두 자루의 창이 서로의 강도를 겨루는 모양새가 되었다. 모두가 긴장감에 숨을 죽였다.

“무엇을 약속받았나?”

내 질문에 곽약사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말만 했다.

“나는 본래 발해 철주 사람이네.”

“왕지(王地)로 철주를 주기로 했나?”

철주를 주고 왕으로 삼는다. 그 정도는 되어야 곽약사가 적극적으로 움직일 명분이 되지 않겠는가? 곽약사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말만 늘어놓았다.

“제국(요)은 위기가 생길 때마다 발해의 주린 백성을 모집했다. 이들에게 부귀영화를 약속하고 자신들의 창으로 삼았지. 고영창이 그러했고, 나 역시 그러했다. 그리고 뒤로 보이는 3천 발해 기병과 해주자사(海州刺史) 고선수(高仙壽) 대인이 그러하지.”

“해주자사 고선수?”

발해 기병 중 유독 곽약사만 보였건만 그가 떨어져나온 자리에 또 따른 장수가 있음을 알았다. 그 장수의 이름이 고영창과 같은 고씨이니 분명 발해의 높은 귀족이리라 짐작되었다.

“고선수 대인의 지체는 공봉관에 불과한 고영창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것은 즉, 고영창의 발해군은 고선수 대인의 한마디면 모두 돌아선다는 뜻이다. 그것이 우리가 고려군을 선택한 첫 번째 이유이다.”

별무반에도 기병이 있긴 하지만 발해 기병의 실력엔 비교할 수 없다. 평야에서 일방적인 전투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아구다가 불과 3,700명의 기병으로 10만의 요나라 군대를 물리친 출하점 전투가 떠올랐다. 역사적으로도 소수가 다수를 상대로 승리한 사례로 종종 나올 만큼 엄청난 전투다.

불패의 명성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던 나를 상대로 설마 그런 방식을 들고나오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곽약사 자신이 나를 꺾을 수 있다는 자신감만 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방법이라고 여겨졌다.

“두 번째 이유는 내가 자존심상 결투를 회피하지 않을 것이란 거겠지. 내가 패배하면 고려군의 사기는 형편없이 떨어질 것이고 그때를 노려 공격한다면 소수로도 엄청난 전과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고려군이 패퇴하면 송과 여진도 별반 힘을 쓰지 못하리라 판단했겠지.”

지금 상황으로만 보면 분명 정확한 판단이다. 여진이 홀로 요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판단이었겠지만 말이다.

지금쯤 여진이 빠른 전진과 더불어 닥치는 데로 흩어진 여진족을 규합하며 금나라의 초석을 다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커진 아구다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솔직히 고려군의 전력을 생각하며 아구다를 주력으로 놓고 우리가 보조를 맞추는 것이 현명했고, 실제로도 나는 무리하지 않는 행보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이름값이 너무나 컸기에, 그리고 그런 이름값의 약점을 잘 알기에 곽약사는 나를 승부수로 택했으리라. 그렇다면 그의 착각으로 끝내주는 것은 나의 역할일 것이다.

“발해인이 요나라에 빌붙어서 왕이 되고 싶었나?”

“고려인이 복건의 왕이 되었는데 나라고 왕이 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나는 껄껄 웃었다.

“그러나 나는 송에 빌붙지 않았지.”

“나 역시 요나라에 빌붙지 않았다.”

곽약사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우리는 계약을 했을 뿐이다.”

“용병이라는 건가?”

내 질문에 곽약사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허리춤에 걸린 반월형 검(겸, 鎌)을 잡아 자세를 잡았다. 내가 호승심을 느끼고 당장에라도 대결에 나설 것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팔짱을 낀 채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도 계약하자.”

곽약사는 묵묵부답이었다.

“내가 철주를 주지.”

곽약사의 발이 한 발 나를 향해 내딛어졌다. 대결 의사도 밝히지 않았는데 먼저 손을 쓰는 것이냐며 우리 쪽 장수들이 비난을 던지자 곽약사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오롯이 나를 향했다. 자존심도 없느냐는 그런 질타가 담겨 있었다.

“누가 약속하든 철주를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었나? 아니면 그 약속을 고려인과는 하지 않겠다는 맹세라도 들어 있나? 그것도 아니면 첫 번째 계약자와의 신의 때문에?”

곽약사의 인생 역정을 보면 요에서 송으로 다시 금으로 옮겨 다니며 두루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 그가 떠날 때마다 뒤에선 배신자 소리를 들었지만, 그가 떠난 곳은 이내 망하고 말았다.

“알만해. 나를 이길 수 있다는 그 자신감이 나와 계약을 거부하는 이유겠지. 오은이 나를 강남제일인으로 인정했고, 하북삼절의 이탁이 나에게 막혔다. 무엇보다 이선 사문 일사 중 청성검 유해섬이 꺾였다. 그런 나를 꺾는다면 천하에 그 명성이 진동할 것은 분명한 일. 왕이 아니라 그 이상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곽약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요나라와 해주자사 고선수를 철저한 계획으로 설득하여 이곳까지 왔겠지만, 그 본심은 더 큰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들켰으니 말이다. 어쩌면 곽약사는 과거의 나를 보는 것인지도 몰랐다. 강한 자가 천하를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구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항우는 천하를 얻지 못했지.”

서양과 아랍 양쪽에 악마가 출현했다고 할 정도로 충격을 안겨준 사자심왕 리처드는 어떠한가?

압도적인 개인의 힘으로 천하는 얻어질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사실 매우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역량에 이른 자는 쉬이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생각이 실패의 원인이 아닐까?

그러므로 강함의 정의는 재정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얻고자 하는 자와 지켜야 할 자, 누가 더 강할까?”

나는 팔짱을 풀고 한 걸음 내디뎠다. 곽약사는 움찔했다.

“강함은 결국 더 강한 것과 부딪쳐 부러지고 말지.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야. 그리고 이 자리에서도 증명되겠지. 그것이 각자 신념의 옳음까지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더 강함이 원하는 신념을 지킬 수는 있겠지.”

그와 내가 세 걸음을 앞에 두었을 때, 다가가기를 멈췄다. 근육의 미세한 떨림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게.”

========== 작품 후기 ==========

고려편은 77페스티벌 전에 완결이 될 예정입니다. 77페스티벌에 맞춰 새로운 주인공에 새로운 이야기로 '삼국지 마행처우역거'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초심으로 돌아가 재미있게 써보는게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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