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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49화 (249/257)

00249  (31) 박인방증(博引旁證)  =========================================================================

그러나 아메리카는 아직 먼 이야기였다. 내 생애에 다다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뿐이었다. 그래도 대항해시대의 촉발은 나의 개입으로 생각보다 빨리 열릴 것이니 생전에 아메리카를 밟아보는 기대를 했다.

그렇게 양나라로 돌아와 그동안 있었던 일을 검토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기쁜 소식을 접했다. 내가 없는 사이 요시치카와 히카리가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소식이었다. 아무래도 타향살이를 하면서 정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떠나면서 일본에 대한 여러 가지 과제를 던졌는데 그것을 함께 수행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의 결합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현재 일본은 어린 천황을 대신해 상황이 섭정하는 원정(인세이, 院政)시대다. 원정하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율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본다. 쉽게 말해 법은 있는데 그 법을 지역 영주들이 제대로 지키지 않고 마음대로 움직이는 무법천지였다는 말이다.

아직 무사 계급이 통치하는 막부 시대 전이라 그런지 천황이나 휘하의 섭정, 관백 등은 법이나 관례에 구속을 당하였다. 그런 구속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은퇴한 상황이 공식 명령보다는 비공식적으로 행동에 나섬으로써 지방 영주들을 잠잠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런 효과가 나오기 위해서는 상황 자신이 힘이 있어야 했다. 강력한 무사 집단이 수족이 되어주어야 했는데 요시치카의 가문도 그중 하나였다. 그렇게 무사 가문의 힘이 세지면서 결국 막부 시대를 여니 그 서막이 지금인 셈이다.

어쨌거나 현재 원정의 주인인 시라카와 상황은 최고의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 시라카와 상황에 반기를 들어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요시치카는 의욕을 보였다. 자신을 내쳐지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지키려던 가문이 시라카와 상황의 견제책으로 풍비박산 나는 것을 보고 복수를 다짐했기 때문이다.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히카리의 가문이 이에 동조했다. 현대에서 보자면 그들은 14세기에 들어 황량했던 야마구치를 1만 가구 이상이 거주하는 거대 도시로 성장시키고 일대를 지배했던 경험이 있었다. 무로막치 막부 쇼군의 관저를 규모 면에서 압도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풍부한 철광산을 독점하면서 해상 무역의 이득을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내가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부터 벌써 그런 움직임은 시작되고 있었다.

그들은 백제인이라 자처하는 만큼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우고 싶은 욕구에 가득 찼다. 그런 상황에서 다타라 씨족인 히카리가 일본 4대 본성 중 하나인 겐지가의 후예와 혼인했다. 이것은 국가를 만드는 정통성이 갖춰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어떻게 포장하느냐만 남아 있는 셈이다.

나는 불교를 그 방법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생각 이상으로 잘 먹혔다.

이 시기 일본은 본지수적설(本地垂迹設)이 나온다. 일본의 토속신과 부처를 융합하기 위한 이론이라고 보면 된다. 인도에서 건너온 부처와 보살이 일본에 흔적을 남기니 그것이 바로 일본의 신들이라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토속신 체계 안으로 불교를 섞을 수 있는 이론이었기에 상황과 천황은 밀어붙였다.

토속신과 부처의 결합은 신사 건립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황실 역시 신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천황의 조상신이라고 주장하는 아마테라스가 부처 중 최고라고 여겼던 비로자나불과 동일시된 것이 그런 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니 근현대사가 떠오르며 열이 받기 시작한다.

일제가 조선을 합병하면서 서둔 일 중에 하나가 조선 신궁을 만드는 것이었다. 나이 든 어른들은 알지도 모르겠지만, 예전 남산 식물원이 있던 자리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조성한 조선 신궁엔 두 명의 신을 모셨는데 하나는 아마테라스이고 다른 하나는 메이지천황이다. 아마테라스야 단군 개념으로 이해하면 되겠지만, 인간인 메이지천황을 일본인들이 무슨 명목으로 모셨을까? 바로 조선 개척신의 자격으로서였다.

개척이 무슨 뜻인가? 거친 땅을 일궈서 쓸모 있는 땅으로 만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일본이 조선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랬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자 가장 먼저 한 것은 신사의 중요 제사 물품들을 옮기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지엄한 신들이 훼손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 그렇게까지 해야 할 근거가 무엇인지 정말 궁금하지만 그들의 정신세계가 그러하다면 지금부터라도 바꿔야 했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간단했다.

부처가 천황보다 높다. 그 하나였다.

신과 부처가 하나가 되어 신불이라는 독특한 체계로 방향을 잡은 일본 종교에 선택지를 더 주는 것이다. 정통 불교를 표방하던 사람들 입장에선 신불의 해석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한 수고를 해줄 사람은 송과 고려에 넘쳐났다. 진정한 불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지옥에라도 가겠다는 승려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송의 대혜종고나 고려의 교종 계열 승려들이 적극적이었다. 이들의 논리나 이론은 이미 국제적인 수준이었으므로 일본의 신불 사상을 논파할 수 있는 여러 교리가 일반 백성도 읽기 쉬운 단어들로 이루어진 한 권의 책으로 발간될 수 있었다. 그 내용을 보니 마치 수십 년 뒤에나 출현할 지눌법사가 불교의 기본을 가르친 책의 내용과 흡사했다. 기본을 중시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마디로 자비의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이제 논리가 완성되었으니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나는 유럽으로 떠나기 전에 일본 해적의 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방법이 있다고 금문우객 곽여에게 운을 띄었다. 그 정도 언질이면 알아서 잘하리라 생각했다. 내 예상대로 그는 남도 수군을 움직여 요시치카의 세력을 사세보에 결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예전 나의 통역관으로 일본으로 왔던 역관이 관리를 맡았던 섬에서 요시치카의 부하들이 웅크리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그들이 움직이게 된 것이다. 다타라 가문의 지원도 잇달았다.

사세보가 근거지가 된 것은 그곳이 천혜의 항구이면서 규슈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후쿠오카로 가기 위한 최적지이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해상 자위대의 기지가 자리잡은 곳이지만 지금은 그 중요성을 인식하는 자들이 없어 그저 한적한 어촌에 불과할 때다. 사세보를 점령하고 사가 현 일대를 얻으면 나가사키도 손에 들어오고 규슈 제일의 곡창지대를 선점하는 효과가 있다.

후쿠오카와 일전을 겨뤄볼 만한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상황과 천황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이미 한 차례 경험이 있던 요치시카인지라 사람들은 요시치카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미나모토 가문이 용도가 다 되었다고 생각하여 다른 무사 가문을 칼로 삼아 팽해버린 마당이었기 때문이다.

후쿠오카는 3개의 소국으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이들은 중앙 정부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았고 이들을 통해 규슈 전체를 통제하는 형태였다. 훗날 규슈 남부는 서양인들의 도래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지만 아직은 중국과 고려와 교역을 할 수 있는 북부만큼의 값어치는 없는 상황이다.

요시치카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남부를 공략했다. 일본 제일의 무장이 부처를 모시고 돌아왔다는 소문은 상대적으로 도래인이 많은 규슈에서 제법 잘 먹혔다. 더구나 임성태자의 후손이라는 다타라 가문의 여식이 함께하지 않는가?

요시치카의 재출현 소식을 들은 시라카와 상황은 분노하여 무사 동원령을 내렸고 대대적인 출병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상황이었다.

결국, 한 번은 넘어가서 도움을 줘야만 했다.

이제 중국으로 넘어와 채왕 조사가 역사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채왕 조사를 중심으로 삼고 나를 수족으로 삼아 새로운 송을 열려던 세력들이 일제히 구심점을 잃게 된 것이다. 그들은 양나라에 완전히 귀속되지 않으면서 상황을 쟀다.

대단한 명문가들이 일개 고려 장군 출신 밑으로 들어오기란 어려웠을 것이니 이해했다.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앞당기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이자겸이 임안(항주)을 얻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채경을 실각시키며 송 조정의 권력 다툼을 부추기고, 청성 장문인의 시체를 이용하여 항주인의 자립심을 일깨우는 데 성공하자 안 그래도 가혹한 수탈에 지친 항주인이 이곳저곳에서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10만에 달하던 금군은 3만으로 축소된 상태였다. 대리가 차지한 차마고도를 회복하기 위해 동관이 몸소 출병했기 때문이다.

동관은 이번 기회에 공적을 세워 채경을 대신해 새로운 최고 권력자가 될 욕심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항주 주변에 배치된 수십 만의 향군이 3만의 금군을 보조한다면 별일이 없을 것이라 여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수십만의 향군은 그냥 농사꾼에 불과하다. 대개가 서류상의 숫자로만 남아 있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오히려 반란에 가담했다. 이자겸은 오월국의 시작이 그러했듯 염상을 비롯한 상인들을 끌어들였다. 고려와 일본과의 삼각 무역만 유지할 수 있다면 엄청난 이득이 나올 것이니 오월국을 세워 그 이득을 독점하자는 유혹은 상당히 잘 먹혔다. 염상 중 큰 손인 혼강룡 이준이 내 명령으로 이자겸을 알게 모르게 돕고 있었기 때문에 더 수월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똑같은 반란군이더라도 돈이 있고 없고는 무척 큰 차이였다. 병장기와 처우부터 차이가 났고, 가로막는 군대는 돈을 주고 매수해버렸다. 각지에서 일어나는 농민 반란이 피 흘리며 투쟁하는 사이 이자겸의 오월군은 봉기한 지 이틀도 되지 않아 임안을 손에 넣었다.

오월국의 재창(再創)과 더불어 양나라, 대리와의 장강 동맹을 제의했다. 남부의 삼국이 영세불멸하자는 것이었다. 이미 그 정도는 입을 맞췄으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송의 수탈에 대항해 일어난 반란 세력들로서는 참으로 허탈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반란의 주동(主動)들은 나름의 야욕이 있었겠지만 빠르게 시정(是正)이 발표되자 주축을 이루던 농민들이 급속히 이탈하기 시작했다.

황급히 회군하려던 동관의 금군은 기회를 놓쳤고 장강 이북으로 넘어갔다. 기가 막히게도 서하가 군사 행동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서하의 4대 황제인 숭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했는데 양씨 일족이 정치를 독점하여 그 폐해를 목격했었다. 그러다 내가 요나라 어전에서 양을포를 죽이면서 친정에 나설 결심을 했고, 양씨 일족을 모두 권좌에서 내치면서 비로소 황제다운 실권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나름 현명한 황제여서 군사 행동이 적을수록 서하가 안정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송이 흔들리자 욕심이 났다.

송의 영토를 슬금슬금 침범하기 시작한 것이다. 장강 이남 3국은 장강이란 방어선이라도 있지만 서하는 아니었다. 촉으로 향하다가 후퇴하던 동관이 부랴부랴 북진해야 하는 이유기도 했다.

본래 만인지적 한세충이 그곳에 있어 막아내야 했지만, 그가 내 휘하로 들어왔기에 서하를 상대하는 송의 전력은 훨씬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동관의 금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송의 10만 군대가 서하의 15만 군대를 물리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송군 15만이 서하군 10만을 이겼다고 해도 인정해줄 텐데 대체 무슨 요술이라도 벌어졌단 말인가?

그러나 한 사람의 출현 소식을 듣고서 이해가 갔다.

옥기린 노준의가 나타난 것이다. 요나라를 막기 위한 최전선에서 잠시 몸을 빼내 서하를 상대한 그의 전공은 실로 눈부셨다. 천하제일인이 있다면 옥기린 노준의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는 소문은 허명이 아니었다.

20일의 기간 동안 홀로 다섯 명의 이름난 장수를 죽이거나 사로잡고, 수백 명의 적병을 감당하며 송군의 기개를 끌어냈으니 그야말로 대장부가 따로 없었다.

그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였을 것이다. 언제고 노준의와 나와의 대결이 꼭 이뤄질 것이라고 말이다. 대업을 가르는 마지막 순간에 필연적으로 만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역사가 나에게 주는 마지막 장애라고 할까?

물론 청성검을 제외한 사문의 일원이나 이선 같은 존재들이 내 앞길을 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청성검과 노준의를 모두 겪은 나로서는 경중의 차이는 분명했다. 숙명이라는 단어를 감히 쓸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어쨌거나 노준의의 활약으로 서하는 물러났고 송은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송은 분위기를 일신한다며 물러났던 채경을 다시 재상으로 임명했다. 장상영이 그 소식을 듣고 송의 국운이 다했다고 탄식할 정도였다.

본래 역사대로라면 장상영은 채경이 복귀하자마자 탄핵당하고 쫓겨난다. 그러나 지금은 재상이 되어 자신이 꿈꿨던 개혁을 원 없이 펼치고 있으니 그에게도 나에게도 지극히 좋은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고려의 소식이 있었다. 이자겸이 떠난 고려는 짧은 혼란을 겪었다고 한다. 이자겸을 따르던 자들이 우왕좌왕했기 때문이다. 애써 쌓은 기반을 버리고 중국으로 건너갈 것인가 아니면 고려에 남을 것인가의 고민이었다.

그와 함께 이자겸의 자리를 노리는 자들 간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이합집산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인주 이가가 당대의 세도가이긴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가문이 여럿 있었다. 그 가문들이 크게 두 파벌을 이룰 것이라 예상했는데 맞아 떨어졌다. 지금까지는 권문세가 간의 권력다툼이라면 이제는 지역 다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서경파와 개경파의 대립이 그것이다.

서경파의 약진은 예종의 속내와도 연관이 있다. 본래 별무반의 결성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 9성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여진족과 손을 잡고 요나라를 치기 위한 목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모든 물자와 전력이 북쪽에 집중되면서 중심이 되는 서경파의 입지가 강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것을 오히려 좋아할 만한 남부 토호들은 탐라국 사건을 겪으며 지리멸렬하거나 이자겸을 쫓았다.

서경파인 묘청과 정지상은 북벌을 통한 제국의 부흥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것은 서경 천도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반면 개경파는 김부식을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북벌은 일시적인 것이며 황폐하고 산만 많은 땅을 얻어보았자 실익이 없다는 주장을 했다. 요나라가 고려를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일정 수준의 공세까진 찬성하며 이후 협상을 통해 고려가 통제 가능한 갈라전(함흥에서 두만강 유역까지) 정도의 영토를 받는 것을 목표로 하자고 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파벌 다툼은 금나라가 자리 잡는 20년 후는 되어야 시작될 터였다. 아마도 정국의 중심이었던 이자겸이 사라지고 별무반이 요나라를 목표로 삼으면서 대립이 앞당겨진 듯했다.

그렇다면 적절히 이용해야 했다. 어차피 고려도 한 번은 가야 했다. 안수궁주와의 혼례 문제가 남아 있기도 했고, 별무반 출정 시기도 거의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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