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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44화 (244/257)

00244  (30) 화룡점정(畵龍點睛)  =========================================================================

그런 나를 향해 칼날이 날아들었다. 손에 쥔 은접시는 이럴 때를 위한 것이었다. 일일이 쳐내며 산자르에게 다가갔다.

산자르 역시 졸음을 견디며 일어났다. 그는 도망치기보다 나에게 맞서는 것을 택했다. 버티다 보면 내가 쓰러지리라 확신한 모양새였다. 움직임이 격렬할수록 빠르게 수마가 몰려오는 것을 보니 그의 선택은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네놈에게 기대한 것이 있었다.”

내 말투는 졸렸지만 살기를 담고 있었다. 처음으로 내 등에 칼을 꽂는 데 성공한 무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를 발로 차버리고 등에 꽂힌 칼을 뽑아들었다.

“네놈이 셀주크 제국의 술탄이 되리라 여겼지. 비단길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꺼이 왕의 체면을 버리고 네놈의 부탁을 따른 것이다.”

칼과 칼이 허공에 부딪히자 비명처럼 양 칼날이 산산이 부서졌다. 손잡이만 남은 채 서로를 쳐다볼 찰나 나는 재빨리 손잡이를 산자르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그가 몸을 피하는 사이 나는 재빨리 다가가려 했지만, 무희들이 벽을 쌓았다.

“젠장…….”

점점 수마가 밀려왔다. 산자르를 단숨에 인질로 잡아 빠져나가려던 계획이 틀어지고 있었다.

“컥!”

그때 무희 중 하나가 주변을 베며 내게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배신에 산자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정말 믿을만한 이들을 배치했는데 그중에서 설마 배신자가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눈치였다.

수마가 몰려오면서 반쯤 눈이 풀린 산자르를 부축하고 있던 무희 하나가 품에서 씨앗 같은 것을 꺼내 먹이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나에게 재빨리 다가온 무희도 품에서 그와 유사한 씨앗을 건넸다.

내가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들고 이유를 묻기도 전에 그녀는 자신이 들고 있던 칼까지 건네주며 말했다.

“호로파(fenugreek)에요. 격렬하게 땀을 낼수록 해독 작용은 배가 되지요.”

호로파의 씨앗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것이 함유된 요리는 종종 먹었었다. 방광과 신장 질환에 좋다는 말과 함께. 씨앗에 담긴 혈중농도 조절 효과가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호로파 씨앗이 수마와 싸우고 있는 나와 산자르에게 매우 효과적인 해결책이었던 모양이다. 산자르가 서슴없이 먹는 것을 보니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해독제로 준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무희가 건네준 호로파 씨앗을 잘근잘근 씹었다.

호로파 씨앗은 따뜻한 성질이 있다더니 이내 몸이 후끈해지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독성을 땀이나 소변으로 배출하는 과정이다.

나는 무희에게 감사하다고 할 틈도 없이 곧장 공격했다. 첫 번째로 가로막는 무희의 팔을 비틀곤 칼을 빼앗아 내 뒤에 바짝 붙은 무희에게 전달했다. 그녀는 금세 칼을 받아 들고 내 뒤를 지켰다.

지켜야 할 곳이 한 곳 사라졌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힘을 쏟아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추풍낙엽처럼 나는 무희들을 뿌리쳤다.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자 땀을 비 오듯 쏟는 산자르의 얼굴이 보였다. 해독 작용의 결과일 것이다.

그는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수백 명의 친위대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나를 엄호하던 무희마저 친위대의 손에 잡혀 산자르에게 끌려갔다.

순식간에 내가 인의 장막에 갇히고 나를 돕던 무희의 생사마저 자신이 좌우한다고 생각하자 산자르는 여유를 되찾은 듯했다.

산자르는 무희를 쳐다보다가 손뼉으로 세차게 얼굴을 후려쳤다. 무희의 볼이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의 하렘에 감히 딴마음을 먹는 계집이 있었을 줄이야. 대체 저놈과 무슨 사이인가!”

“10년 전…….”

무희는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알라무트가 무너졌습니다. 하사신이 돼야 했을 소녀가 자유를 얻었지요.”

“설마 네년이?”

“고작 몇 푼 되지 않는 돈에 눈이 멀어 부모는 소녀를 알라무트에 팔았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부모가 설마 자신을 두 번 버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요. 집에 돌아가자 반갑게 맞아준 것도 잠시 절 노예 상인에게 팔았지요.”

“그 노예 상인을 죽이고 네년을 구해준 것이 나다!”

산자르의 음성이 갈라졌다. 그는 자신 역시 생명의 은인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당신이 노예 상인을 죽인 것은 내가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은인임을 강조하며 나를 마음껏 탐했습니다. 나는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은인에겐 아직 대가를 치르지 못했습니다. 나는 율법을 충실히 따랐을 뿐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갚아라.”

그녀는 죽음을 각오한 듯 눈을 감았다.

“산자르!”

그런 그녀의 모습이 더 얄밉게 보였는지 이성을 잃은 산자르의 칼이 그녀의 목을 향해 날았다. 나는 산자르에게 달려들었지만, 인의 장막을 뚫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부족했다.

산자르의 칼질에 이름도 모르는 무희의 목이 허공으로 치솟았다가 이내 바닥에 널브러졌다. 잘린 목에서 뿜어진 피가 산자르의 옷을 적셨고 그에 비례해 산자르의 눈에 어린 광기는 더욱 짙어진 것 같았다.

“내 하렘을 욕보인 네놈을 절대 살아서 돌려보내지 않으리라!”

산자르의 절규를 신호로 끊임없는 공격이 들어왔다. 그러나 절규를 하고 싶은 것은 나였다. 저 무희가 나를 돕지 않았더라면 나는 꼼짝없이 이곳에서 죽어야 할 운명이었다. 대체 이것은 무슨 역사의 장난이란 말인가?

‘산자르가 어떤 자인지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산자르가 훗날 차지할 셀주크 제국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눈을 감았다.’

산자르는 분명히 셀주크 제국의 마지막 황혼이었고 불꽃이었다. 그의 군사적 재능은 의심할 여지 없이 뛰어났지만, 최후는 부하들의 변심이었다. 인간적인 매력이 부족했다는 뜻이다. 현대에서도 잘나가던 경영자가 독선을 드러내면서 회사가 망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딱 그 짝이었던 셈이다.

자신을 지지해줄 사람이 사라지면 군사적 재능마저도 물거품이 된다. 요나라가 멸망한 후 잔당을 이끌고 중앙아시아까지 쫓겨온 야율대석이 산자르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겼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나는 산자르를 너무 과대평가했는지도 모른다. 역사적인 군주였기에 그와 함께 손을 잡고 싶었던 마음도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잘못을 인정해야 했다. 내가 너무 감상적이었음을.

베고 또 벴다.

이내 온몸이 피 칠갑이 되었지만, 나의 칼은 멈추지 않았다. 인의 장벽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어느새 나의 칼은 산자르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 잠깐!”

내가 휘두르는 칼을 한두 번 막아내던 산자르는 다급하게 휴전을 제의했지만 이미 나의 결심은 굳어진 상태였다.

서걱!

너무나 많은 인명을 베느라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기계적인 팔놀림에 산자르의 목은 깨끗이 잘려나갔다. 그의 눈은 죽음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치켜뜬 채였다.

“으아아아!”

나는 있는 힘껏 포효했다. 나를 살리고 죽은 무희를 애도하는 뜻을 담고 있기도 했다. 궁전을 떠들썩하게 만든 포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산자르가 죽임을 당했다는 공포 때문이었을까?

피 칠갑을 한 채 궁전을 빠져나오는 나를 공격하는 자들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빨리 사라지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럴 법도 했다. 산자르가 사라진 이상 호라산의 술탄이 누가 될 것인지를 놓고 피비린내 나는 사투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바그다드를 완전히 벗어나 유럽인 일행이 머무는 곳에 도착하자 그들은 전신에 피를 둘러쓴 나를 보며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내가 빠르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이곳을 서둘러 떠나야 한다고 말하자 그제야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종일 이동했을까? 우리를 추격하는 대규모 무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뒤로 쳐져 선발대를 잡아 상황을 살피니 답은 금세 나왔다.

서로 바그다드의 지배자임을 주장하는 가운데 나를 잡는 자가 바로 호라산의 술탄이라는 방법이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수백 명의 친위대가 내 손에 죽었다고 해도 그건 필시 동조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판단을 내린 그들은 수십, 수백 배의 군대를 동원하면 나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생각은 일정 부분 맞았다. 나 혼자 도망치는 것이라면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피해를 주고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베네치아와 제노바인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귀중한 자원들이었다.

일단 이를 악물고 최대한 빠르게 달리기를 독려했다. 바그다드에서 바스라까지가 대략 570km 정도라면 우리가 이틀 동안 기를 쓰고 달려 도착한 곳은 바그다드 남동쪽에서 180km 정도 떨어진 아팍이란 소도시 외곽이었다. 1/3 정도 온 셈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더는 남하할 수 없었다. 뒤쫓던 적들이 맨눈으로 보일 만큼 거의 쫓아왔기도 했고 그에 더해 동쪽에서 접근하는 새로운 군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화살을 쏴대며 시내로 유인했다. 그들의 깃발을 보자 나는 내심 욕이 나왔다.

‘하마단! 제기랄, 또 그녀인가!’

하마단의 기병들이 왜 참전했는지 알 수 없지만, 호라산의 추격 부대와 보조를 맞추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팍 시내로 진입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가두기 위한 전술이 확실함에도 다른 길이 없었다. 종일 달리면서 일행은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지쳤기 때문이다.

도시는 오래전에 폐허가 된 듯 인적이 드물었다. 그나마 머물던 사람들도 우리가 출현한 것에 놀라 도망치고 말았다. 최대한 높은 곳을 찾아 도시의 중심부로 향하자 주변엔 운하가 존재했던 흔적이 보였다.

고대 유적을 보는 느낌일까? 중심부에 자리한 언덕으로 향할수록 그리스 신전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스 신전과 다른 점이라면 요새처럼 제법 단단한 벽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다 올라와서 주위를 살피니 머무르기에는 딱 좋은 곳이었다. 중앙의 작은 우물엔 신선한 샘물이 솟았고, 주위 평원보다 30m 정도 높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입구도 우리가 올라온 곳뿐이었다. 한 마디로 수성에 적합한 지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장기전으로 갈 경우 식량을 마련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말을 잡아 식량을 마련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일단은 휴식이 먼저였다. 유럽인들에게 쉴 것을 명령하는 사이 나는 벽 위에 올라서서 우리가 포위되는 것을 지켜봤다. 독 안의 쥐라고 생각했는지 적들도 휴식을 선택했다.

유적인지 요새인지 모를 이곳에 호기심이 솟았는지 잠시 휴식을 취하던 유럽인 몇몇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고고학에 조예가 있는 자들이 있었는지 뭔가 굉장한 발견을 했다는 듯 나에게 와서 자신들이 발견한 것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이곳이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최고의 도시 중 하나인 ‘니푸르’란 말인가?”

고대 도시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니 뭔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이 우리의 목숨을 살려줄 수는 없었다. 자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나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곳이 엔릴의 사원이라고? 수메르어로 그렇게 쓰여 있다는 말이지?”

목숨이 경각에 처해 있지만 않다면 굉장한 고고학적인 발견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참으로 공교롭단 생각이 들었다. 엔릴은 수메르 신화에 나오는 최고신이다. 그리스 신화로 치면 제우스쯤 되는 셈이다.

엔릴은 바람의 신이었고, 더 나아가 폭풍의 신이기도 했다. 비와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천둥과 우레를 무기로 쓰니 제우스와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심지어 인간의 타락에 노한 제우스가 대홍수를 일으켰듯이 엔릴도 같은 이유로 대홍수를 일으킨다.

그러한 엔릴의 사원에 머무르게 된 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지금은 신화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누엘이 말했다.

“셈족은 엔릴을 벨(왕)이라는 이름으로 숭배하였습니다. 신앙의 중심지는 바로 이곳이지요. 셈족은 여러 분파로 갈라졌는데 페니키아인이 그중 한 갈래입니다. 지중해 연안 국가 중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제노바와 베네치아 역시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우리는 신을 믿습니다. 신의 행적은 대부분 신화적이지요. 그러나 신이 독생자를 내리시면서 신화는 실재(實在)가 되었습니다. 그 실재가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끼치는 영향은 없을지라도 이미 약속하신 행하심이라는 것이지요.”

“내가 독생자라도 된다는 말인가?”

너무 나아간 것 아닌가 싶어 실소가 흘렀다. 그러나 마누엘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기적은 독생자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자들이 있긴 하다. 선지자라고 불리는 이들. 그중 가장 유명한 이로 엘리야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신의 도움으로 번개와 불을 뿌려 수많은 적을 죽이고 요르단 강의 물을 가르는 기적도 선보인다. 그뿐만인가? 살아서 불타는 말이 끄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불사의 인물이기도 하다.

더구나 엘리야는 쿠란에도 언급되며 존경받는 인물이다. 동방정교회도 위대한 선지자로 그를 부른다. 유대인들은 엘리야를 그리스도보다 앞서 메시아의 역할을 해냈다고 믿는다. 그쯤 되면 중동 지역의 신화 같은 존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휴식을 마치고 입구로 몰려오기 시작하는 적들을 보며 칼을 다시 잡았다.

“그럼 곧 ‘세미한 소리’도 들리겠군.”

바람, 지진, 불이 지나간 후에 엘리야는 신의 음성인 세미한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요란한 소리가 아니라 침묵에서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와도 치환된다. 민중의 역사가 바람과 지진, 불처럼 요란하게 흘러갔다면 세미한 소리는 나만 들을 수 있는, 다시 말하면 개인이 어떠한 결심을 통해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멘.”

마누엘이 진심을 담아 성호를 그었다.

============================ 작품 후기 ============================

여러 가지 일이 겹쳐 있다보니 연재가 늦었습니다. 먼저 머리숙여 사죄드립니다.

같은 꿈을 꾸다 in 삼국지 일반판 예판이 다음주 초쯤 조아라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전국 서점에서 구매가능한 배본 날짜는 27일 예정입니다. 한정판이 아닙니다.

다음 종이책은 불꽃처럼이 거의 확정되었습니다.

차기연재작은 마행처우역거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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