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43 (30) 화룡점정(畵龍點睛) =========================================================================
도제와 척준경의 의도된 혹은 의도되지 않은 만남으로 말미암아 자칫 지중해의 탐욕스러운 상인으로 낙인찍힐 미래를 바꾸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도제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제는 한 가지는 확실히 느꼈다.
새로운 목표가 가슴을 뛰게 하였다는 것이다. 모슬렘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비단길 교역에 한 줄기 빛이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도제는 갤리선 가장 높은 곳에 휘날리고 있는 산 마르크 깃발을 바라보며 성호를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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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제가 탄 배가 점차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잔뜩 두려운 표정의 노잡이들을 살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노잡이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 안착하길 원하는 자들이었다.
백 명이 넘는 노잡이 중 나와 같이 가길 원한 자들은 십여 명에 불과했다. 가족이 있는 자 중 노잡이로 징역형을 사는 자들은 당연히 나를 따르고 싶지 않을 것이니 이해는 갔다. 사실 이 정도 숫자만 해도 예상치 못한 성과였다. 전혀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부 세어보니 12명이었다. 희한하게도 그들 모두가 제노바 시민이라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북아프리카의 흑인이나 아랍에서 잡힌 모슬렘들은 하나같이 따르길 거부한 것이다.
그럼 유독 제노바인만 따라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노잡이 중 대표로 뽑힌 마누엘이란 자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탈리아 반도를 기점으로 지중해는 동서 서로 다른 바다를 가지고 있습니다.”
“리구리아 해와 아드리아 해겠군.”
“맞습니다. 베네치아가 아드리아 해의 강자라면 리구리아는 우리 제노바가 꽉 잡고 있습니다. 피사와 협력하여 리구리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십자군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흑해까지 항구를 건설하는 등 날로 세력이 커지고 있지요.”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제노바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듯싶었다. 그의 설명을 따라 맞장구치는 노잡이들도 생겨났다.
“저는 원래 선박 기술자였습니다. 예정대로라면 포르투갈레 백작령으로 향했어야 하지요.”
포르투갈레 백작령이면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포르투갈 왕국의 전신이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들은 현재 ‘레콘키스타’ 운동을 벌이는 와중일 것이다.
레콘키스타란 그들의 말로 재정복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약 7세기 반에 걸쳐서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가톨릭 왕국들이 이베리아 반도 남부의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되찾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포르투갈레 백작령은 현재 레온 왕국에 속해 있는데 독자적인 노선을 견지하다가 결국 왕국으로의 승격에 성공한다. 우리가 아는 포르투갈의 시작인 셈이다.
“제노바는 포르투갈레 백작령을 지원하며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 조달을 독점하고 싶었나 보군.”
“맞습니다. 베네치아의 간교한 수작만 없었다면 말입니다.”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과거에도 미래에도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이는 두 나라이니만큼 서로의 세력을 견제하는데도 여념이 없었다. 북아프리카 해적을 사주해 마누엘이 탄 배를 습격하도록 만들고 기독교 형제들의 구원 운운하며 노예로 사들였다는 이야기였다.
“나를 따라나선 이유로는 많이 부족하군. 그 정도면 제노바로 돌아가 베네치아가 저지른 일을 낱낱이 고하고 싶었을 텐데.”
“제노바도 알 겁니다. 그리고 똑같이 돌려줬을 겁니다.”
자신들이 베네치아 갤리선의 노잡이였듯 제노바 갤리선에도 베네치아인이 노잡이를 하고 있을 거란 소리였다. 공해 상에서 일어난 일에 일일이 명확한 증거를 찾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심증만 있다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돌려주는 것이 오히려 상대를 조심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는 주장이기도 했다.
“도제와 당신이 나눈 이야기들은 무척 중대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마치 우리도 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처럼 큰 소리로 떠들었습니다. 그때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두 가지라…….”
마누엘이 자신과 노잡이들을 가리켰다.
“첫 번째는 우리의 목숨입니다.”
“그대들의 목숨?”
“대양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슬람 세력을 뚫어야 합니다. 제노바는 가톨릭의 충실한 종으로써 같은 가톨릭 왕국을 지원하여 사악한 이교도를 몰아내고자 했습니다만 이제 그 역할을 베네치아가 직접 떠맡을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그 자리에 있었던 제노바 출신 노잡이들은 수장될 가능성이 크지요.”
나는 아차 싶었다. 마누엘의 말이 타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마누엘의 이야기를 먼저 알고 있었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나는 베네치아가 그런 극단적인 수까지 쓰지 않기를 빌어야 했다.
마누엘은 난감한 나의 표정을 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어디까지나 최악의 가정입니다. 보통은 평생 노잡이로 살겠지요. 베네치아에서 양나라로 보낼 인선을 준비한다고 했으니 그편에 우리 제노바인을 최대한 많이 빼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우리는 당신에게 자유인의 충성을 서약할 것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이탈리아가 유독 빛난 이유는 유럽에서 가장 자유분방한 사람들로 이루어졌다는 이유가 클 것이다. 그들의 자유로움은 정복보다 모험에 초점을 맞추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그들이 노예가 아닌 시민으로서 충성을 다짐한다? 이들의 출현은 동아시아의 기풍을 흔들어 새로운 조류를 불러일으킬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기꺼이 마누엘의 요청을 수락했다.
“두 번째는 하필 베네치아 공화국의 제도를 받아들이고 교류를 선택했는지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그 놀라운 실력이 모든 것을 관대하게 보도록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만이 공화국은 아닙니다. 우리도 공화국입니다.”
제노바도 확실히 공화국 시대이긴 했다. 공화국 전성시대를 연 베네치아나 제노바가 나폴레옹에 의해 파국으로 치닫게 된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명목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받들고 있고, 제노바 주교님이 시민의 대표자를 맡고 계시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주민총회를 거쳐 선출된 ‘콘술’의 집단 지도 체제 방식입니다. 베네치아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합리적인 의사 결정 체계입니다.”
무역상, 은행가들의 영향력이 강하긴 했지만 의사 결정 과정은 이 시대로 치자면 상당히 합리적인 편이다. 그러니 베네치아와 함께 빛나는 공화국 시대를 열었겠지만 말이다.
“또한, 베네치아가 원양으로 나가 미지의 바다를 독점하는 것을 결코 두고 볼 수 없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제 제노바의 대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행보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신들을 베네치아와 협상할 패로 활용해도 좋다는 선언이었다. 대가로 베네치아가 얻어갈 이점을 제노바 역시 나눠 가지길 원한 것이다.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제노바의 경쟁심이 더 빨리 대양 진출을 이뤄낼 수 있는 초석이 되리라 본 것이다.
며칠이 더 지나자 항해의 최종 목적지인 이스켄데룬에 다다랐다. 사실 베네치아와 우연히 만나기 전에는 처음에 왔던 길 그대로 롬 술탄국의 영역인 메르신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육로로 바그다드로 향해 산자르를 만나고 이후 바스라로 가서 양나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메르신이 키프로스와 마주 보고 있는 항구 도시라면 이스켄데룬은 키프러스를 기준으로 오른쪽 위 움푹 팬 곳에 자리한 오래된 도시였다. 고대에는 알레산드레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었는데 이름에서 짐작이 가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수에즈 운하가 개통하기 이전까지 아랍과 인도, 유럽 무역의 한 축을 담당하던 곳이었다.
이권이 있으니 당연히 노리는 자도 많았다. 승자는 지금은 몰락한 보에몽이었다. 당시 유럽 최고의 기사로 이름 높았던 그가 안티오키아와 그 주변 영역을 통합하여 안티오키아 공국을 설립한 것이다. 이스켄데룬는 안티오키아 공국에서 수도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보에몽이 몰락한 지금, 공국의 지배자는 보에몽의 조카인 탕크레드가 되었지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스켄데룬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피사의 상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가 약속한 원정대가 나와 함께 가기 위해서는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고 나는 머무를 장소가 필요했다. 그렇게 선택된 곳이 이스켄데룬였다. 그 사이 마누엘은 다른 제노바 상인들과 접촉했다. 그들은 즉시 공화국으로 달려가 마누엘을 제노바 대표로 삼아도 될 것인지를 알리러 떠났다.
제노바의 답은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베네치아와 먼저 약속한 내 입장을 존중하여 직접적인 개입은 피하겠다고 했지만, 마누엘에게 거액을 전달했다. 양나라 현지에서 상관을 열고 고용인을 충분히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네치아도 급하게 준비한 원정대답지 않게 수십 명이 넘는 인원과 막대한 물품이 이스켄데룬에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하여 나와 만나자 항구는 부산스러웠다. 내가 머무는 동안 세간에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동방 교역을 직접 뚫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소문이 나던 차였는데 그걸 직접 확인시켜줬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나도 바라던 바였다. 더 많은 모험가와 탐험가, 상인들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한 움직임이 세상의 변혁을 더 빠르게 진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과 나는 바그다드로 향했다. 어차피 바스라로 가는 최단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아폴로니우스와는 이스켄데룬을 떠나면서 작별했다. 그는 술탄에게 진 개인적인 빚을 다 털었다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비잔틴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바그다드 인근까지 다다르자 일행은 바그다드 시내로 진입하지 않고 외곽에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야영하는 길을 택했다. 자칫 시비가 붙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바그다드 궁성에 도착하자 산자르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저녁에 성대한 연회를 열어 나의 노고를 격려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연회였지만 초반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와 나 사이에 온갖 산해진미가 놓였고 아름다운 무희들이 검무를 추었지만 마치 북풍 한기가 도는 듯한 싸늘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단하더군.”
산자르는 마치 내가 무슨 일을 하고 다녔는지 다 안다는 눈초리였다.
“유럽 제일의 기사를 단숨에 꺾고 비잔틴의 은인이 되었더군. 덕분에 비잔틴의 전력은 전혀 줄지 않고 그 창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향해지고 있지. 그대가 평범치 않다는 것은 알라무트에서 충분히 느꼈지만, 솔직히 이번 일은 전혀 예상 밖이야. 망설임 없이 수십만의 군대를 향해 돌격하여 중갑 기사단으로 겹겹이 에워 쌓인 적의 수장을, 그것도 유럽 제일의 기사라는 칭호를 가진 맹장을 사로잡은 일 말이지. 게다가 프랑스 왕자를 설득한 여유까지…….”
무희들의 검무가 일제히 나를 향해 좁혀졌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고 앞에 놓인 닭고기를 뜯으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너무 위험하니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대답 여하에 따라서겠지.”
“자신 있나?”
“지금껏 그대와 내가 먹고 있는 이 음식들, 이 음식들엔 서서히 졸음이 오는 약초 가루가 모두 들어가 있지. 나도 슬슬 졸리기 시작하는군.”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당황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느꼈던 것 같다. 같이 먹는 음식이니 설마 약을 탔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나를 잠재우기 위해 자신마저도 잠에 빠지는 위험을 자초했다니? 그렇다는 건 이곳에 모인 무희들이 대단한 충성심을 가진 여인들이라는 뜻이 된다.
산자르가 하품을 하니 나도 절로 하품이 나왔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조금씩 졸음이 밀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비잔틴의 칼날이야 사실 무섭지는 않다. 그들은 자기들 영토를 지키기에 급급하니까. 그러나 비잔틴의 면세 혜택을 얻어내고 베네치아나 제노바를 통한 직교역은 상황이 다르지. 그대의 동행인 유럽인들은 바스라까지 결코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졸음을 조금이라도 쫓아내려는 시도이기도 했지만 산자르가 심각하게 여길 정도로 그들의 이권을 침해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교역은 지금 당장 이뤄질 수 없는 머나먼 미래의 일에 불과했다. 당장은 중국에서 인도, 아랍, 유럽으로 이어지는 무역 루트가 변할 리 없다는 뜻이었다.
“사실 중국 교역에서 그대의 양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미미해. 서하와 송이 더 크지.”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육로를 통한 비단길은 송에서 출발해 서하를 지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서하가 아직 건재한 것도 성군의 출현도 영향이 있지만, 비단길 교역으로 얻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손잡을 상대를 바꾸겠다는 건가?”
“그대가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 제법 많은 것 같아. 요와 송, 서하뿐만 아니라 하마단의 영주까지도 말이야. 그들이 줄 수 있는 이득과 그대가 줄 수 있는 이득 어떤 것이 더 큰지는 불을 보듯 뻔했지. 더구나 그대의 임무 성과가 나에게 있어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고 말이야.”
하마단의 영주가 또 끼어 있다는 말에 실소가 터졌다. 이번에는 무엇으로 그를 움직였을까? 몸이라도 바치겠다고 했을까? 어쨌건 그녀의 계획은 성공이다. 내가 산자르를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 버렸기 때문이다.
“기어이 내가 진왕임을 확인받을 속셈인가?”
“진왕? 그대는 양왕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내가 중얼거리는 것을 산자르는 자신에게 말한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피가 턱선을 따라 흘렀다. 점점 밀려오는 수마를 물리치기 위함이었다. 산자르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가 먼저 잠이 드는 것을 확인하기라도 하려는 듯 눈에 힘을 주었다.
“두 가지만 물어보자.”
“죽기 전 마지막 질문이니 기꺼이 받아주지.”
“내 일행들을 언제 공격할 셈이지?”
“그대가 죽은 것을 확인하면 그 즉시. 아마도 내가 잠에서 깨어난 뒤가 되겠지.”
다행히 아직 공격 명령은 떨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밀려오는 수마를 물리치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런 나를 보며 산자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자신감이었다.
“내가 혹여 이곳을 빠져나간다면 병사들이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혹시 몰라 친위대 일백을 밖에 배치해놓기는 했지만, 요식 행위일 뿐이지. 아무리 혀를 깨물고 고통을 줘서 잠을 몰아내려고 해도 약효는 결코 피할 수 없네. 그 누구도.”
“그래? 그럼 이제 확인하게 되겠군.”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들숨과 날숨이 반복되자 몸에 폭발적인 기운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누구도’에 나도 해당하는지 말이야.”
몸이 허공을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