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42화 (242/257)

00242  (30) 화룡점정(畵龍點睛)  =========================================================================

“내가 원하는 것은…….”

한바탕 힘을 쏟아내고 나니 홀가분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에 더해 한 줄기 해풍이 시원함을 더해주었다. 듣는 도제의 표정은 그 반대였지만 말이다.

*

퇴근길의 지하철은 짜증이 날 정도로 숨 막혔다. 약간의 비까지 내린 터라 습한 기운이 만연해있던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만원 지하철에서 다행스럽게도 자리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전자책에 몰두해 있던 소년은 돌연 옆자리의 노인에게 불만을 터트렸다.

“할아버지 이게 말이 돼요? 배를 어떻게 칼로 두 조각을 내요. 역사가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아무래도 둘은 조손 관계인 듯했다. 할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자세히 읽어보렴, 두 조각이란 말은 없지 않니? 처음에 진입하면서 돛 줄을 잘랐다는 문장이 있는데, 돛대가 균형을 잃고 떨어지면서 배에 구멍을 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더구나. 척준경이 그전까지 보여준 실력으로 봤을 때 의도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이야. 불리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재빨리 판단한 것이라 볼 수 있겠지.”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저번에 본 책은 도술이 나오질 않나, 사대 문파니 뭐니 해서 무협이 나오질 않나…….”

지금껏 자신이 읽었던 위인전기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래서 반신반의하면서도 더 깊게 빠져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소년은 다시 스마트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런 손자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는 이내 고개를 들어 작게 소리가 들리는 지하철 내 디스플레이를 쳐다보았다. 광고가 대부분이었지만 뉴스도 간간이 나오기 때문에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에는 적격이었다.

“아…….”

노인은 디스플레이에 방금 등장하는 인물을 보며 가벼운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 탄성은 그만이 아니었다. 같은 객실에 탄 사람 여럿에게서 거의 동시에 흘러나왔다.

“국민 여러분. 당원동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제21대 대통령 새녘당 후보 국민경선에 출마하게 된 이준경이라고 합니다.”

점점 디스플레이를 보는 눈길이 많아졌다.

“나이도 어린놈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겠다고 하자 많은 분이 걱정해주셨습니다. 아직 우리는 젊은 대통령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무엇을 했느냐?’ 하고 물으신다면 젊은이다운 대답으로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제 대답은 ‘무엇을 할 것인가?’입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은 제게 있어, 아니 우리 국민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비전입니다. 과거부터 제 마음을 끄는 비전은 여럿 있었습니다. 군부 독재로 얼룩진 5공의 비전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마음에 들었었습니다. 바로 ‘정의로운 사회’였습니다. 이후 6공의 비전이었던 ‘보통 사람의 시대’도, 이후, 문민정부도 국민의 정부도, 하나같이 멋지지 않았던 비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아니 제게 조언하는 모든 분이 온갖 멋진 구호들을 제게 제의해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 말을 읽고 말하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 국민 누구나 그것이 옳다고 여기고 그것을 기꺼이 읽어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회는 여전히 구태와 병폐를 고수하고 있고, 빈부 격차는 심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호가 잘못돼서였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국민 여러분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깨져버린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고 공공의 정의를 실현할 방법이 있다면 저는 천만번이라도 구호를 외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노인은 주먹을 불끈 쥐고 연설에 임하고 있는 사십 대 중반의 정치인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준경이라, 겨우 20석의 제2야당인 새녘당으론 제1야당인 국민당과 단일화가 되지 않고서는 집권여당인 대한당을 상대하기 어려울 텐데…….”

여야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며 몇 가지 개혁적인 법안 통과에 앞장선 공로가 있긴 했지만, 여전히 그 인물에 관해서는 물음표였다. 노인은 아직 더 지켜봐야 한다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쉬웠다. 한 10년 정도 더 영글어 후보로 나왔다면 얼마든지 지지할 의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하원에 해당하는 본토 정치 상황과 달리 상원을 차지하는 자치의원들 대다수가 이준경을 차기 연방 대통령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근래 들어 간간이 드러내긴 했다. 중요 정책 결정에서 상원보다 하원의 힘이 더 막강한 것이 사실인 만큼 기존 정당들은 하원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이준경의 경우는 적극적으로 상원의 자치의원들과 교류를 했다.

물론 상원이 아예 허수아비만은 아니다. 하원이 탄핵소추권과 입법권을 가지고 있다면, 상원은 헌법을 의결할 수 있고 논란 중인 개혁법안에 대해서는 하원과 함께 투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그 숫자가 적고 자치령의 이해관계에 따라 변동이 심해서 뭉치기 어려웠다. 모래알이라고 해야 할까?

“부모님이, 아니 선생님이, 아니 군대가, 아니 사회가 제게 남겨준 말이 있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불의에 항거해봐야 너 혼자가 뭘 바꿀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맞춰 살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서민들에게도 옷을 맞춰 입을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정치는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소년 시절, 언제나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라며 어른들은 말했지만, 어른이 되어 갈수록 그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자유를 쟁취한 일이 있던 빛나는 과거가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며 취업에 더 신경 쓰는 것이, 가족에 더 신경 쓰는 것이 저 같은 소시민이 선택해야 하는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지금도 우리는 초등학교, 중학교 윤리 교과서엔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라고 가르칩니다. 도대체 무엇이 옳은 것입니까?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하고, 떳떳하게 공정을 이야기하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서는 행동을 하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것이 옳지 않다면 윤리 교과서를 당장 바꿉시다. 우리의 자식들은 정의에 눈감고, 공정에 침묵하며, 불의에 맞서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입니다.”

화면의 이준경이 열변을 토하자 디스플레이를 주목하던 몇몇 사람은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노인은 팔짱을 끼며 혀를 찼다. 열의는 인정하지만,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생각한 탓이다. 노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다수 사람은 스마트폰에 열중하거나 음악을 들으며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것이 현실이다.’ 노인은 중얼거렸다.

“1년 전에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해야 할 일은 국무총리에게 맡기겠습니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주먹을 얼굴 앞까지 들이밀지 않으면 꿈쩍도 하지 않을 적폐와 갈등을 부수고 양극화를 해소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누구 하나 도태되는 사람 없이 다 같이 손을 잡고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통령이 되면 가장 먼저 정계 개편을 제안할 것입니다.”

정계 개편이란 소리에 노인은 무슨 소리인가 싶어 다시 디스플레이로 시선을 향했다. 대연정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지금의 하원은 국회선진화법이 있다곤 하지만 싸움 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지역끼리 싸우고, 이념 때문에 싸우고, 재벌 때문에 싸웁니다. 국회에서만 싸웁니까? 지역에 가서 똑같은 이슈를 놓고 싸워야 합니다. 협의를 지는 것으로 알고 싸우는 것을 일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치가 제대로 서려면 정책으로 경쟁하고 인물로 평가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 선거법을 바꿔야 합니다. 헌법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대통령이 되면 개헌을 하겠습니다. 정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선거법 개정에 제 모든 것을 걸겠습니다. 제 정치 생명뿐만 아니라!”

이준경이 격앙된 듯 소리높이자 관심 없던 사람들도 깜짝 놀라 디스플레이를 쳐다보았다.

“제 목숨도 여기 걸겠습니다. 이로써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는 공식선언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누군가는 이준경의 열정이 대단하고 말했고, 누군가는 그냥 흔하게 하는 정치인들의 수사라고 평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언제 이런 것이 있었느냐는 듯 고개를 돌려 스마트폰을 쳐다보았다. 하던 게임을 마저 하려던 마음, 잠시 중단된 친구와의 수다, 술 한잔 하자는 친구의 메시지에 답을 하려는 손가락이 바삐 움직였다. 노인은 그런 사람들을 일일이 쳐다보다가 문득 다음 역에서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자의 팔을 붙잡았다.

*

도제는 떠나가는 배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99년간 교차 조차(租借)라…….”

거액을 배상하는 정도로 생각했던 도제에게 있어 척준경의 제안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일반적으로 조차의 의미는 식민지 획득과 다름없었다. 온건한 표현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척준경은 각자의 영토에 상관을 건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자의 문화와 특색이 살아 있는 도시가 운영되는 것을 원했다. 그것은 아무리 도제라도 들어주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나 곰곰이 이득을 짚어보니 제법 여러 가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중국의 정보를 쉽게 취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껏 미지의 나라라고만 여겼던 중국의 물산을 파악할 수 있다면 지중해 무역에서 이익이 극대화될 것임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그 먼 곳까지 가서 살 사람이 있겠느냔 생각을 하지만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은 한창 모험심에 불타오르던 시기였다. 이탈리아에 있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경험하는 것은 프랑스나 영국이 기사도의 전설적 무용을 말하는 것과 비슷한 값어치를 지니고 있었다.

척준경은 지도를 빌리더니 한 도시를 찍었다. 베네치아에 있어 중요한 거점 도시 중 하나인 풀라였다. 아드리아 해 이스트라 반도 남서단에 자리한 풀라는 천혜의 자연경관 때문에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래서 2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콜로세움까지 지어졌을 정도다. 항만 여건도 좋아 해군기지와 조선소까지 있었고 그것을 베네치아가 접수하여 제2의 도시처럼 활용하고 있었다. 그런 풀라와 인접한 땅을 양나라 인이 거주할 수 있는 구역으로 내달라는 것이었다.

그곳을 가리킬 때 도제는 혹시나 자신과의 만남마저 척준경이란 자가 예상하였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자 마치 퍼즐 맞추듯 생각이 껴맞춰 졌다. 척준경은 호라산 술탄의 부탁을 받았으니 처음부터 인근 하마단 영주와도 결탁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둘이서 짜고 이번 일을 계획한 것이라면 자신은 철저히 속아 넘어간 셈이었다.

그렇다면 화가 날 법도 했지만, 그는 장사꾼이 속은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이었다. 외려 통상에 적극적인 양나라의 행동이 자신들과 비슷한 부류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미 양나라 왕이란 자가 자신들의 정치 체제를 모방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중국에 자신들과 비슷한 정체성을 가진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용하기에 따라 호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도제는 자신들에게 내어줄 조차지가 궁금해졌다. 척준경이 필기구를 빌려 대강의 중국 그림을 그리고 한 곳에 점을 찍자 소문으론 듣던 곳인지라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향강(香江, 홍콩)이라…….”

민 제국 이전인 한 제국 시절부터 이미 외국 무역의 중계지였고, 당, 송을 거치면서 급속히 발전하여 고려, 왜, 아랍 등과 활발히 거래하고 있는 곳이었다. 아랍 상인과 유럽을 연결하는 베네치아의 도제가 모를 리가 없는 이름이었다.

“함께 카이로를 손에 넣어 최단 항로를 열 수 있다면 전 유럽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건 불가능에 가까우니…….”

십자군도 파티마 왕조까지 공격할 여력이 없었다. 비잔틴 제국은 기존 영토를 수복한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모양새였다. 그나마 후보는 셀주크 제국인데 파티마 왕조와는 오십보백보였다. 완전한 직항로는 무리인 셈이다. 그때 척준경은 대강 그린 중국의 선을 이어 더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 도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율을 느꼈다. 이것이 정말이냐고 아낌없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척준경이 그린 선이 아랍을 지나 아프리카를 표현하고 있음을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를 돌면 동양과 직교역이 가능하다!

마치 새로 만든 왕관이 진짜 순금인지 알아오라는 왕의 문제를 풀기 위해 고민에 빠졌다가 목욕탕에서 넘치는 물을 보고 유레카라고 외쳤던 아르키메데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지금의 조선술과 항해 기술로는 난관이 많으리라고 척준경은 단언했다. 각지에 거점을 두고 차근차근 뚫어나가는 방식을 권유한 것이다. 양나라와 베네치아가 각기 항로를 개척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마주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그곳이 바로 희망이 열리는 곳이다.

그래서 교차 조차를 허용하고 교류를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언제고 이루어질 희망봉에서의 만남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한 발판이다.

“지금처럼 육로와 해상을 번갈아가며 사용하는 불완전한 루트가 아니라 완전한 해상 루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50년이 넘게 걸릴 것이라 단언했지?”

척준경은 인도 항로를 발견한 바스쿠 다가마가 출현하기까지 근 70년의 노력이 있었음을 말한 것이지만 도제가 그런 것까지 알 리는 만무했다. 그는 오히려 해상 민족의 호승심이 끓어 올랐다.

“지금껏 지중해에 안주하여 갤리선 외에 배는 필요치 않았다.”

도제는 이미 가라앉아버린 자신의 전용 갤리선을 훑듯 지나온 바다를 쳐다보았다.

“일개 인간에게 부서지지 않을, 더 튼튼하고, 더 오래갈 수 있는 배를 만들겠다. 성 마르코가 우리를 수호하는 한, 우리의 모험심은 꺾이지 않는다.”

============================ 작품 후기 ============================

5월 27일 삼국지 종이책 일반판이 출시됩니다. 5월 7일 조아라에서 예판 공지가 나갈 것이고, 27일부터 각 서점에서도 구매할 수 있습니다.

오늘 편이 불편한 분도 있으실 것 같은데, 이 글이 언제부터 쓰여졌는지 확인해주십시오. 이미 그 전부터 이런 모티브로 썼던 글입니다. 고려편과 현대편을 엮기로 하면서 연대기를 끝내기로 했다고 종종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한 챕터 혹은 두 챕터 정도만 더 하면 완결이 날 것 같습니다. 제목도 그대로 갈까하다가 다시 적합한 것으로 고민중입니다.

궁금한 점은 언제든 답변 달아드리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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