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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41화 (241/257)

00241  (30) 화룡점정(畵龍點睛)  =========================================================================

그리고 뛰기 시작했다.

도제는 내가 자신을 인질로 잡으리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그 정도 대비는 했는지 오히려 여유마저 지니고 있었다. 내가 달려들자마자 주위에서 그물이 던져졌다.

그러나 그물은 헛된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물을 던진 병사들은 도제 정면을 목표로 삼았지만 나는 도제에게 근접할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목표로 삼은 것은 도제의 전용 갤리선이었다.

칼을 뽑았다. 완벽한 곡선의 칼은 무언가를 베는 데 최적이었다. 나는 돛 줄을 끊기 시작했다. 도제가 당황하여 나를 잡으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이렇게나 과감하게 움직이는 것엔 이유가 있었다. 내가 승선했던 배에서 나를 잡기 위해 인질로 잡을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꼽자면 아폴리우스 정도일까? 그러나 그를 죽일 수는 없다. 그를 죽이고 내가 살아남아 증언한다면 황태자의 스승을 죽인 죄를 물어 비잔틴은 베네치아를 공격할 기회를 가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도제가 베네치아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프랑스와 교황을 움직여 비잔틴을 공격하려 했다는 증언까지 나온다면? 그거야말로 베네치아에겐 최악의 상황이다.

결국, 베네치아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를 잡는 일뿐이다. 그러니 나는 가뿐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일반 갤리선은 길이가 35m 정도였지만 도제 전용 갤리선은 40m를 훌쩍 넘었다. 당연히 승선하고 있는 병사들도 일반 갤리선보다 많았다. 도제는 혹시나 몰라 자신의 갤리선으로 넘어오지 못하고 있었고 일정 숫자를 제외한 모두를 나를 잡는데 쏟아부었다.

갑판에서의 전투는 육지와는 다르게 흔들림이 더해진다. 아마도 그것이 자신들의 이점이라고 믿고 있었겠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고려 수군의 원정에 함께하면서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길이 40m, 폭 4m, 높이 2m, 노잡이 160명에 선원 20명이 모는 도제 전용 갤리선엔 전투원만 60명 이상이 존재한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절실히 경험하고 있었다. 선원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노잡이가 있는 갑판 아래로 내려가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갑판엔 오롯이 병사들과 나만 남은 셈이다.

도제를 지키고 내가 탔던 배를 제압하는 데 필요한 인원 20명 정도를 제외하면 40명 정도가 나를 둘러싼 병사 전부였다. 그러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들은 40명으로 한 명을 잡지 못하는 체험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포위하자마자 보이는 여유가 그러했다. 그중 10명은 그물을 들고 던질 시기만 보고 있었다.

이일민과의 선상 대결이 문득 생각났다. 그때는 대련임을 고려해 진각을 제대로 밟지 못했지만, 이곳에서라면 가능했다.

그때 도제가 멀찍이서 소리쳤다.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기 전에 투항하도록 하지. 일국의 왕이라는 자가 나뒹구는 모습이 보기 좋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의 말이 끝나자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기 전에 투항하도록 하지. 일국의 도제라는 자가 나뒹구는 모습이 보기 좋을 리는 없지 않은가?”

나의 비아냥에 도제의 표정이 살짝 굳기는 했지만,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금세 풀어졌다. 그리고 나를 즉시 잡으라는 손짓이 떨어졌다. 그사이에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힘을 끌어 올렸다. 호흡, 감각, 기운, 체중의 이동, 다리의 움직임이 일치해야 완벽한 진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완벽이라는 말을 쓴 것은 오늘 이 자리에서 유럽 각지의 정보를 퍼트리는 베네치아인들의 인상에 잊지 못할 강렬함을 안겨주기 위해서였다.

가지런히 모았던 두 다리 중 오른발이 허공으로 떠올라 마보(馬步) 자세로 변하며 하강하기 시작했다. 오른발이 갑판에 닿는 순간 화약의 폭발음과도 비슷한 소리가 주변을 놀랬다.

-바다에서 강풍이 미친 듯이 몰아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파도가 울부짖는 듯한 굉음을 토해내며 높이 솟구쳐 뱃전을 때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노를 바다에 넣자마자 곧 부러지는 미친 조류를 본 적이 있는가? 돛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활대의 양쪽 끝도 부러져 갑판 위에 나뒹굴 정도의 폭풍을 본 적이 있는가? 파도가 배와 선원을 집어삼키고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어 가는 그런 비극의 끝을 본 적이 있는가? 육지의 나는 겪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능히 묘사할 수 있으리라. 동방의 코레아, 그를 통해서. by 아폴리우스

천 명이 서 있어도 문제없다던 베네치아 조선 장인들의 자부심이 고작 한 사람의 발 구름에 무너지는 것을 보던 병사들은 처음엔 현실이 아닌 그저 상상의 영역에 자신들이 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착각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나는 갑판의 균열로 생긴 구멍으로 자연스럽게 낙하하는 몸의 움직임에 순응했다. 갑판 아래로 떨어지자 쇠사슬에 묶인 노잡이들과 선원들이 보였다. 그들은 번개 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나를 경악하며 바라보았다.

“너희 역시 증인이다.”

나는 칼을 휘둘러 가까이 있던 노잡이의 쇠사슬을 끊었다. 그러자 선원들은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표정이었다. 쉽게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빠르게 하나하나 끊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노잡이들은 자리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선원과 병사를 다 합쳐도 노잡이 숫자에 비하면 절반에 불과했지만, 혹여 마음대로 행동했다가 더 가혹한 형벌을 받을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쇠사슬을 거의 끊어냈을 때쯤 갑판 아래로 내려오는 문이 벌컥 열렸다. 내가 남은 쇠사슬을 마저 끊어내는 동시에 병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뱃머리 가장 앞으로 가서 그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렸다.

뱃머리 쪽에 서 있으니 정면에 우르르 뭉쳐 있는 모양새였다.

“다 모였나?”

나는 호흡을 골랐다. 오늘 이곳에서 위대한 도전을 할 생각이었다. 다들 불가능하다고 여기겠지만 나는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을 양손으로 잡고 서서히 머리 위로 올렸다. 정면에 모인 병사들을 향해 당장에라도 돌격할 자세였다. 그러자 맨 앞에서 나에게 검과 창을 겨누는 병사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살고 싶으면 부지런히 뛰어야 할 거다.”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칼을 있는 힘껏 바닥을 내리쳤다.

쩍 소리와 함께 바닥이 결을 따라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짐은 마치 지진처럼 점차 그 움직임이 커졌다. 누구랄 것도 없이 뒷걸음질 치며 갑판 위로 올라가고자 했다.

나는 다시 망설임 없이 배 앞머리에 충각이 결합한 부위에 칼을 내리쳤다. 두 번의 큰 충격을 겪은 칼은 두 동강이가 났지만, 입구가 열렸다. 나는 반만 남은 칼을 던져 버리고 충각 위로 올라탔다. 내가 탔던 배를 찍어 올리듯 꽂힌 충각을 따라 갑판 위로 올라타자 이미 도제의 갤리선은 바닥부터 솟구쳐 들어오는 바닷물로 말미암아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도제는 바로 앞에서 솟아오른 내가 귀신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내가 아무런 무기도 없이 그에게 다가가고 있음에도 그는 연신 뒷걸음질 쳤다.

“믿을 수 없다. 인간이라면 이럴 수가 없어! 그대는 악마인가!”

도제가 나를 손가락질하며 외치자 내가 탔던 배의 선원들도 동조하는 모양새였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12세기다. 마녀사냥이 13세기부터 본격화되는 것을 봤을 때, 점차 교회의 이단 심문이 무르익는 시기이다.

갤리선에 타고 있던 노잡이와 선원, 병사들이 한데 어우러져 내가 탄 배로 넘어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바다로 몸을 던졌다. 변고를 깨닫고 다가오는 갤리선들의 구조를 기대한 것이다.

“노잡이는 제노바 인인가? 아니면 피사?”

더는 다가오지 말라고 칼을 들이미는 병사가 있었지만 나에게 손목을 잡히고 밀쳐지면서 칼만 빼앗겼다. 그 칼을 마치 망나니의 그것처럼 휘두르며 천천히 도제에게 다가가 질문을 던지자 도제의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내게 답했다.

“제노바 인도 피사 인도 북아프리카 노예도 있다.”

이 당시는 갤리선 강제 노동형이란 것이 있었다. 범죄를 저지른 자를 갤리선에 태워 복역시키는 것이다. 일정 기간을 채우면 다시 자유인으로 풀어주는 것이다. 그 기간을 채우기 전에 사망하는 경우도 잦았지만, 최소한 사형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모인 자들을 놓고 갤리선의 선장들이 주사위를 던져 가장 건장한 사람부터 골라 가졌다. 비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방식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과연 시대가 그래서 당연하다고 이들이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 기독교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이 시대도 자본주의는 강하게 작용했다. 종교의 말씀마저도 취사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베네치아가 대표적인 예였다.

베네치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동양도 기회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베네치아 같은 사고방식은 유교에 몰입된 동양에도 똑같은 충격을 줄 수 있었다.

“배에 물이 들어옵니다!”

갤리선이 점차 가라앉자 배에 구멍을 냈던 충각 역시 힘을 잃고 함께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충각의 각도 때문에 들려 있던 배가 원위치로 돌아오면서 바닷물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베네치아 갤리선들이 속속 우리가 탄 배로 근접하여 구조를 시도했다. 충각으로 배의 전후좌우를 박아 침몰을 막은 것이다. 갑판에 더는 발 디딜 공간이 없을 정도로 꽉 찬 것이다. 유일하게 여유로운 공간이 있다면 나와 도제의 간격일 것이다.

“베네치아의 이름은 익히 듣고 있었지.”

“중국에서 우리 이름을 모를 수가 없지.”

사실상 동방 무역을 독점하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일까? 나에 대한 공포감에 사로잡혔으면서도 도제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육지와 바다, 동방과 서방에 다 걸쳐 있지만 사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 내가 아는 베네치아는 베네치아 그 자체니까.”

“그대를 인정하기 싫지만, 그 말만은 마음에 드는군.”

“그러나 비잔틴 황제에게 종속되어 비잔틴 예술과 의식, 건축 양식을 받아들였지. 독자적인 것은 하나도 없어.”

“비잔틴은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를 계승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는 유럽인에게 있어 이상향이었다. 그래서 베네치아인들은 돈을 벌면 그리스에 땅을 사서 별장을 짓고 그리스 여자를 아내나 첩으로 맞아들이는 것을 성공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러나 동시에 동방 정교회가 아닌 가톨릭 신자들이기도 하지. 비잔틴 교회의 적인 로마의 교황을 따르지 않나?”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데 이유가 있나?”

“아니, 전혀.”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도제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게 당신들이 마음에 드는 이유야. 양나라가 전부는 아니지만, 당신들 방식을 받아들이려는 이유이기도 하지.”

“우리가 마음에 든다고? 그래서 중국의 양나라가 우리 방식을 받아들이려 한다고?”

도제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어쩌면 내가 순간의 우위를 활용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제안을 하려는 것은 아닌지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이슬람과 통상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교황이 질책했을 때, 도제가 ‘우리는 무역 이외의 방식으로 사는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한 것은 유명하다. 즉, 독실한 종교를 지녔다고 해도 그 믿음이 인간다운 사회적 삶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매우 현실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인(仁)을 강조하는 유교에도 반면교사로 활용할 수 있다.

“도제는 외국인에게 허브 한 병 이상의 선물을 받지 못한다. 아무리 뛰어난 정치가, 해군 제독이라 할지라도 공정한 상거래를 부패하게 할 경우는 추방한다.”

나는 검지를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도제의 시선 역시 그곳으로 향했다. 그의 입가에서 한 줄기 신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가리킨 곳에는 베네치아 갤리선 가장 높은 곳에 걸린 산 마르코의 깃발이 바람을 타고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뒷발로 일어선 황금 사자는 왕관을 쓰고 있다. 황금 사자의 등에는 날개가 달렸지. 복음서를 들고, 평화를 말하지만, 언제든 전쟁을 준비하라고 말한다.”

“우리에 대해 잘 아는군.”

뒤늦게 합류한 병사들은 아직 상황을 정확히 모르는지 서둘러 나를 공격하려 할 기세였지만 도제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주변은 100척의 갤리선이 빽빽하게 광장을 이루었다.

베네치아가 보여주는 수백 년간의 눈부신 도약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본격적인 대항해시대를 맞이하기 전에 동방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꿔줄 초석이 돼줄 자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기세를 꺾어야만 했다. 동등한 관계가 되었을 때 상인들은 오히려 더 좋아한다. 거래의 안정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베네치아의 유명한 가문들이 모두 상인인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상업적 지배에 눈을 떴다는 것은 현대 사회와도 궤를 같이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독실한 기독교도가 다수임에도 자유분방한 면모를 유지했고 규칙에 얽매이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가 세운 규칙엔 철저했다. 자신들의 자유가 종교적인 규칙이나 외부 강대국의 규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 세운 규칙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자가 상징하는 것은 더 크다. 사자는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표현한 상징이지.”

“그대가 세례자 요한이란 말인가? 지금 나를 상대로 보여준 것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마르코는 루카스처럼 사도가 아니었지. 그러나 예수를 따른 적이 없음에도 복음서를 지었어.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 길을 걷고 있다고 믿고 있지.”

마르코는 마가, 루카스는 누가이다. 그들이 지은 복음서를 마가복음, 누가복음이라고 하면 아하 하고 금세 알 것이다. 마르코는 상당히 특이한 이력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교도였다가 개종했다는 이력과 더불어 공증인(公證人)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의 정체성에 가장 들어맞는 수호성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동양에도 절실히 필요한 가치였다.

그 선택이 잘된 것인지는 역사가 판단할 것이지만 지금의 나는 독생자를 기다리는 세례자 요한의 심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말은 믿지 못하겠지만 어쨌거나 상인으로서 나는 실격이군. 그대의 강함을 들었으면서도 그 이야기를 다 믿지 못했어. 또한, 이곳에서 그대를 직접 보면서도 여전히 나는 믿지 않았지. 내게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는 걸 인정하겠네. 내게 원하는 것이 뭔가?”

도제의 항복 선언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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