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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40화 (240/257)

00240  (30) 화룡점정(畵龍點睛)  =========================================================================

“망할 잉글랜드와…….”

약간의 기다림 끝에 루이 6세의 말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신성로마제국과 어떠한 거래도 하지 않겠다고 신께 맹세할 수 있는가? 나와의 거래가 이곳에서 마지막이 된다고 말이야.”

“물론입니다.”

나는 시원스럽게 답했다. 그의 조바심이 충분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현 잉글랜드 왕은 헨리 1세이다. 헨리 1세는 뛰어난 학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유능한 정치인이었다. 노르망디 공을 계승하는 잉글랜드 왕들이 늘 그렇듯 프랑스 왕과는 필연적으로 숙적이 되는 사이이기도 하다.

교황의 권위를 약화하고 황제의 신성을 키우려는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을 옹호하는 프랑스 왕의 대립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니 루이 6세는 내가 딴마음을 먹고 다른 곳과 접촉하는 것이 좋을 리 없었다.

두 명의 강대한 적을 두고 있는 프랑스가 동면에서 깨어난 사나운 곰, 비잔틴까지 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패착에 가까운 일이었다. 게다가 비잔틴과 싸우는 이유가 잉글랜드 왕가를 떠올리게 하는 노르만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2주간 이곳에 머무르도록 하지.”

루이 6세는 뒤를 힐끔 쳐다보곤 내게 손짓했다.

“노르만을 데려가서 공을 인정받으면 서슬 퍼런 비잔틴 연합 함대의 봉쇄를 풀도록 하게. 북아프리카의 술탄들을 순순히 떠나보내려면 말이야.”

북아프리카의 술탄들은 지중해 상행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영향력을 줄여보고자 출병했겠지만, 생각보다 더 막강한 비잔틴 연합 함대의 봉쇄에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이 되었다. 보에몽이 예상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니 그가 어쩌면 북아프리카 술탄들의 분전을 위해 일부러 비잔틴의 역량을 줄여서 설명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떠나야 루이 6세가 온전히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니 타당한 제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대는 운이 좋아. 마침 파리에 교황 성하가 머무르고 계시니 말이야. 교황 성하에게 선물을 드릴 수 있게 되어 개인적으로는 기쁘군.”

프랑스와 교황의 유착은 공통의 적이 있어서 가능했다. 교황은 때때로 프랑스에 머물며 왕과 친교를 나누었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인 모양이었다.

합의가 이루어졌다. 나는 루이 6세가 내주는 말을 받아 보에몽을 포박한 채로 펠라로 귀환했다. 광전사로 이름난 보에몽을 산 채로 잡아 귀환한 것은 비잔틴 진영을 매우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황태자가 나타나 자신의 밀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자 황태자의 선견지명에 대한 찬사가 끝없이 이어졌다.

차기 보위를 놓고 남매가 다투는 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격이라 황태자는 내게 호의적이었다. 그가 따로 마련한 자리에서 루이 6세와 합의한 제안을 설명하자 이내 수긍하는 눈치였다.

“프랑스가 신성 로마 제국을 견제해준다면 우리도 편해지지. 애써 얻은 동방 영토를 확고하게 지키는 데 필요한 일이네. 양나라에 기독교 교구를 만들겠다고? 국교로 삼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야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지 않겠나? 하지만 우리에게도 동등한 포교의 자유를 주는 것이 좋겠지. 그곳까지 가려는 용감한 성직자가 있을지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말이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얻은 비잔틴 제국 통상권도 얻어냈다. 황제는 보에몽이 사로잡혔다는 소리에 크게 기뻐하여 어떤 부탁이든 들어줄 기세였기 때문이다. 그는 황태자의 선택을 크게 칭찬하는 한편, 무릎 꿇은 보에몽 얼굴 앞에 두 번의 침을 뱉어 굴욕을 선사했다. 황태자가 루이 6세의 조건을 떠올리며 황제를 말리지 않았다면 보에몽이 치욕을 참지 못하고 자살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다.

루이 6세가 약속한 2주의 시간은 금세 흘렀다. 그 사이 킬리지의 아내와 자식들을 면담하고 그들이 룸 술탄국으로 귀환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파리에서 돌아온 루이 6세는 나와 황태자를 한 자리에서 보길 원했다. 보에몽은 이미 뒷전이 된 것이다. 보에몽은 알렉시우스 1세에게 동방 원정의 결과로 만들어진 소국들의 왕은 비잔틴 황제라는 것을 서약해야 했다. 기사와 왕 사이에 봉건 계약을 체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질적인 효력은 없었지만 보에몽이 봉신(封臣)을 자초했으니 알렉시우스 1세는 한결 마음이 풀렸다.

루이 6세가 황태자를 포함한 3자 회담을 제의했고, 황태자 역시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서로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루이 6세로서는 신성 로마 제국을 상대하기 위해 비잔틴의 협력이 필요했고, 동방 영토 안정이 시급한 황태자도 루이 6세가 신성 로마 제국과 신나게 싸우길 바랐다.

내가 교황에게 제시했던 제안들은 모두 수용되었다. 동방 교구 설립에 교황은 필요 이상으로 의욕을 불태운 것이다. 어쩌면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처음의 의도도 그런 것을 노렸다.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대가 앞으로 50년 뒤쯤이다. 아랍의 모슬렘을 비롯해 온갖 이교도의 나라 너머에 있다는 기독교 왕국의 전설이 그럴싸하게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필요해서 퍼트렸던 것은 아닐까? 예컨대 예루살렘 같은 성지 탈환을 독려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이다.

그것을 내가 먼저 끌어다 쓴 격이 되었다. 이젠 프레스터 존이 아니라 프레스터 척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교황의 사정이 그만큼 다급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랍행은 나와 엮인 세력 모두에겐 윈윈의 결과를 가져왔다. 산자르는 위협적인 알라무트를 제거했고, 킬리지는 가족을 되찾고 후계 구도를 튼튼히 했으며, 비잔틴 제국은 황제가 오랜 원한을 풀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하지 않음으로써 수십만의 목숨과 재화를 건졌다. 프랑스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 이득이라고 볼 수 있었다. 치욕을 맛본 보에몽 정도만이 패자라고 할 수 있을까?

아 굳이 한 명 더 고르라면 야율대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요양에 있을 그를 떠올린 것은 일반적으로 프레스터 존의 실존 모델을 그로 꼽고 있기 때문이다. 요나라가 멸망한 후 서쪽으로 향한 그는 서요(西遼), 즉 흑거란(黑契丹)을 건국했다. 야율대석과 그의 백성들은 주로 경교(景敎, 네스토리우스파)를 믿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서방 기독교 국가들 입장에서 서요는 동방 기독교 제국의 전설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무런 계획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판단하고 결정한 것치고는 굉장히 좋은 성과였다. 나는 아폴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다시 산자르에게 돌아가기만 하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유럽행은 끝이 날 터였다. 그러나 뭔가 하나를 빼먹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테살로니키에서 출발해 레반트(시리아)까지로 항로로 설정한 지 사흘째가 되던 날, 에게 해를 벗어나 지중해로 나오자 황금 사자 깃발을 나부끼며 접근하는 100척의 갤리선을 보면서 내가 뭘 빼먹고 있었던 것인지 확실히 떠올렸다.

양나라의 정치 체제가 베네치아 공화국을 모티브로 삼고 있고, 그래서 유럽까지 온 김에 인연이 닿는다면 그들을 만나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유럽을 떠나는 마지막 시점에서 그들을 만나게 되었다.

시작은 좋지 않았다. 그들 중 유달리 큰 갤리선이 곧장 우리 쪽으로 다가와 배를 충돌시키고 순식간에 검수와 궁수가 승선하여 포위했다.

비잔틴의 앞마당이나 다를 바가 없는 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자 기가 막히는지 아폴리우스가 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수병들은 아폴리우스가 뭐라고 하건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베네치아 갤리선이 부산해지더니 길이 열렸다. 척 보아도 통솔자로 보이는 이가 무리를 이끌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프랑스와 비잔틴의 전쟁을 단신으로 막아낸 영웅이 이 배에 있다기에 인사나 드리려고 들렀소.”

훤칠한 중년인의 가슴엔 베네치아의 상징인 산 마르코의 사자 휘장이 수놓아져 있었다. 아마 내 예측이 맞는다면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총독)이리라. 보통 도제라면 베네치아 최고의 권력자라고 알고 있지만, 명목상이었고, 실제로는 위원회의를 통한 다수결로 문제를 처리했다.

“공화국의 도제, 오르델라포 팔리에로여, 지금 그대가 저지른 무례함의 크기를 아는가?”

“무례함?”

오르델라포 팔리에로라는 이름의 도제는 아폴리우스의 날 선 비난에 코웃음을 쳤다. 그는 아폴리우스와의 설전엔 전혀 흥미가 없다는 듯 나만 쳐다보았다.

“십자군을 도와 시돈 점령에 나선 참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지.”

이름이 워낙 어려워서 나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었는데 시돈이란 말을 듣고 대강 알 것 같았다. 시돈은 레바논에서 3번째로 큰 도시로 고대 페니키아 시절부터 어업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십자군을 도와 그곳을 공격한 도제는 오직 한 명이며, 그것도 공화국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 개인 함대를 동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십자군으로부터 통상권을 인정받고자 하는 노력일 수도 있었고, 개인적인 친분, 혹은 종교적 신념이 작용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건 그렇게 시돈 공략에 임하던 도중 나 때문에 회군했다는 식으로 들렸다.

“중국 양나라의 왕이 우리와 같은 통상 특권을 얻었다고 말이야.”

“듣도 보도 못한 소국이 분에 넘치는 특권을 얻어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비잔틴 제국 전역에서 공화국 상인의 면세를 인정하는 특권은 공화국에 날개를 달아주었지. 지중해에서 홍해, 레반트, 이집트를 연결하며 수익성 좋은 향신료 및 비단 무역의 중개자가 되었으니까 말이야. 중국 상인들은 아랍과 교역하고 아랍은 다시 우리와 거래한다. 그것이 철칙이었다. 그것이 깨진 것이다. 공화국의 도제로서 그 진의를 확인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밥그릇이 줄어들까 걱정하는 것인가?”

“공화국의 도제가 공화국의 밥그릇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오히려 그대의 대답 여하에 따라 오늘 이 배는 암초에 좌초된 것으로 처리될 수도 있겠지. 아, 섣부른 행동은 하지 말게. 이곳은 바다야. 그대가 상대했던 노르만 기사단과 다르지.”

도제의 말에 아폴리우스가 펄쩍 뛰었다. 비잔틴 제국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대로 무사할 줄 아느냐며 저주를 퍼부었다. 비잔틴은 베네치아를 속국처럼 여겼지만 사실 통상 특권을 부여하면서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견해들이 많다. 십자군 전쟁이라는 호재를 이용하여 부의 축적을 이뤘고 그것이 자신감으로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듣도 보도 못한 동방인이 자신들이 애써 일궈놓은 중계무역의 틀을 깨려고 하고 있다면? 심각한 위협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만약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보에몽과 친분이라도 있는 건가? 현재 보에몽은 남부 이탈리아에서 반 유배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번개가 뇌리를 스쳤다.

보에몽과 비잔틴의 전쟁을 막은 것이 더 큰 이유라면? 전쟁이 성립되지 않으면서 전쟁 특수를 완전히 놓쳐버렸다.

“애써 판을 만들어놨는데 그대의 영웅적인 행동에 판이 깨졌단 말이네.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이익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지.”

보에몽을 부추겨 전쟁을 확대한 이가 자신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양측 합쳐 수십만에 이르는 대군에 물품을 공급하는 것은 실로 막대한 이익을 보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래서 선택지를 하나 주지.”

“선택지가 하나라…….”

선택할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실소를 머금었다. 그런 나를 보며 도제 역시 흐릿한 미소를 보였다.

“공화국의 손실을 메울 것.”

여러 가지 함의가 담겨 있었다. 더 자세한 설명이 있을 것으로 보고 나는 침묵을 지켰다.

“나는 이미 십자군의 시돈 점령에 참전하면서 예루살렘 왕국 내 자치권을 허락받았다. 자치권이 부여된 영역은 공화국 그 자체지. 성지를 중심으로 모든 재화와 물품을 유통할 수 있는 강력한 요새를 얻은 셈이지.”

“그래서?”

“하마단.”

“하마단?”

예상치 못한 단어에 내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그는 무작정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루이 6세와 협상이 오가는 사이 그는 이미 나에 대해 상당히 알고 있었다. 하마단 영주와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몰라도 왜 하마단을 꺼냈는지 알 것 같았다.

“예루살렘처럼 하마단에도 자치권을 허락받고자 하는군. 예루살렘과 하마단을 연결하여 아랍 상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중국 상인과 직교역 하겠다는 뜻.”

보통 베네치아를 해상 국가로 아는 경우가 있지만, 전성기 시절을 보면 육지 영토도 상당수 있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얻으려고 노력했다.

“예리하군.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교도들에게 우리의 몫을 떼어주지 않아도 된다. 하마단의 영주는 그대와 맺힌 것이 많은 모양이야. 그대의 몸값으로 상관의 자치권을 허용해주겠다고 했으니 말이야.”

“내 몸값이 하마단에 상관을 열고 자치권을 허용해주는 정도라…….”

“개인의 몸값치고는 매우 비싼 셈이지. 시돈 공략 중에 일부러 달려온 이유이기도 하고. 순순히 우리와 같이 가는 것이 좋을 걸세.”

“그 여자 기가 막히는군.”

나는 그녀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제는 그녀의 제안을 듣고 무척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쟁을 허무하게 종결한 것에 대한 원한도 있었을 것이다. 그의 심리를 이용해 결국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진짜 내 몸값일 것이다. 진왕이라는 두 글자 말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이 진짜라고 확인되면 베네치아가 역으로 곤란을 겪을 상황을 유추했다. 베네치아의 위축은 아랍 전체로 보았을 때 득이 될 수 있다. 만약 산자르 같은 술탄에게 이러한 제안을 던져 하마단의 중립을 지킬 수 있다면 능히 실행에 옮길 것 같았다. 여러모로 고도의 정치적 계산인 셈이다.

“셈을 다시 해.”

“셈을 다시 하라니?”

도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자신이 위험에 빠지리라고는 단 1%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육지와 바다는 다르다고 굳게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해상전은 충돌 후 백병전이다. 사실 육상전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내 몸값.”

나는 씨익 웃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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