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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39화 (239/257)

00239  (30) 화룡점정(畵龍點睛)  =========================================================================

나는 재빠르게 생각해야 했다. 역사서에서는 보에몽과 비잔틴 제국의 전쟁이 한 줄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아 세세한 면을 알 수는 없었다. 확실한 사실은 비잔틴의 승리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러하니 나는 숟가락만 얹는 셈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와 루이 6세와의 예상치 못한 만남은 역사의 축이 흔들리는 또 하나의 변수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어떻게 나가느냐에 따라서 말이다.

‘루이 6세는 근 30년을 왕으로 있었다. 상당히 긴 재위 기간인 셈이다. 재위 기간 대부분이 그의 영향력을 벗어나려 하는 지방 영주를 복속하고 잉글랜드의 노르망디 왕들과의 세력 다툼에서 승리한 왕.’

봉건제의 중앙집권화를 이뤘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고위 성직자들과도 사이가 좋아서 그의 재위 시절엔 프랑스가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런 루이 6세가 왕이 되는 것은 2년도 채 남지 않았다.

루이 6세와 보에몽의 관계를 유추했을 때, 루이 6세는 부왕의 종용을 받아 억지로 출병한 것이 분명했다. 그가 중시하는 것은 봉건 영주들로 사분오열된 프랑스 통일이었지 실리도 없이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루이 6세를 향해 말했다.

“이놈을 놔주길 원하나?”

루이 6세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내가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재보려는 심산 같았다. 보에몽은 루이 6세가 즉답을 하지 않자 답답했는지 자신을 구하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보에몽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루이 6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다가 나를 향해 말했다.

“비옥한 옛 영토를 되찾아 강해진 비잔틴과의 싸움이 무익하다고 그리도 말했건만, 이제는 한심하게 적에게 붙잡히기까지 하다니. 생각 같아서는 노르만(보에몽)을 죽여버리라고 하고, 네놈 역시도 죽여버리고 싶지만 내 동생이 남편을 잃고 슬퍼할 것을 생각하니 차마 그럴 수가 없군. 네놈은 무슨 생각으로 단신으로 이곳에 뛰어들 생각을 한 것이지? 바라는 것이 대체 뭔가?”

“약속.”

“약속? 나에게 말인가?”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교황.”

그 이름을 듣더니 주변의 안색이 급변했다. 유럽에는 현재 2개의 태양이 존재했다. 하나는 교황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이 둘은 자신의 우위를 주장하며 중부유럽에서 한창 다투는 중이었다.

“교황 성하께 뭘 부탁하려고 하는 거지? 이 전쟁의 중재? 그거라면 나도 충분히…….”

전쟁을 위해 긁어모은 프랑스군이 루이 6세의 손에 있었다. 보에몽 때문에 프랑스군이 목숨을 잃는 것은 장차 자신의 대업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했던 것이 비잔틴 승리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루이 6세 역시 지금의 상황을 하나의 기회로 보는 것 같았다. 거대한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로 철군할 수 있다면 봉건 영주들의 제압은 더욱 손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집 된 힘이 교황의 지지까지 받아 외부로 창을 돌리게 된다.

지금의 교황은 내가 기억하기로 파스칼 2세다. 십자군 전쟁을 주도했던 우르바노 2세의 후임자로, 교황청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좌충우돌 애를 썼지만,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처신 때문에 불화만 더 남겼다. 판만 키우고 해결은 못 한 채 선종한 셈이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 원정을 본떠서 스페인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십자군 원정을 계획하여 십자군의 전력이 분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분열을 치유해보고자 노력했지만, 모든 교회의 수장이 자신이어야 한다는 교황의 신념으로 무산되었다. 신성로마제국과도 죽을 때까지 타협과 반대를 반복하다 결과 없이 끝났다.

내가 교황을 선택한 것은 바로 그런 성향 때문이었다. 결과가 나쁘긴 했지만, 교황청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는 마음만은 인정할만했다.

“그대들은 무시하겠지만 나는 저 멀리 중국의 남방, 양나라의 왕이다.”

“중국? 양나라?”

중국의 존재 정도는 이미 로마 시대부터 알려졌다. 그러나 대개의 유럽인에게 있어 상상의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루이 6세도 뜬금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룸 술탄국의 킬리지 술탄이 나의 친구다. 이 자가 잘 알고 있지.”

보에몽에게 시선을 던지자 보에몽은 콧방귀를 꼈지만 부인하지는 않았다. 루이 6세는 이야기가 제법 흥미진진하다고 여겼는지 시종에게 의자를 대령시키도록 했다. 말에서 내려와 의자에 앉기까지 힘겨워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나는 그가 자리를 잡자 내가 이곳까지 오게 된 이야기를 풀어냈다. 산자르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알라무트를 거쳐 요하네스까지 이르자 한 사람의 여정으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한동안 내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거짓인지 알아보려는 것 같았다.

“룸 술탄국의 술탄이 친구이고, 아랍의 신흥 강자인 호라산 술탄의 귀빈, 죽음의 대명사로 알려진 알라무트를 2번이나 박살 내고, 이제는 비잔틴 제국의 황태자 요하네스의 의뢰를 받아 노르만을 잡으러 왔다? 하하하,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야. 그렇지 않나?”

루이 6세는 푸들푸들한 턱살이 요동치도록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에 그의 시동이나 호위기사들 역시 덩달아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잠깐을 그렇게 신나게 웃다가 돌연 정색한 표정으로 루이 6세가 말했다.

“대체 네놈의 진짜 정체는 무엇이냐?”

“나는 지금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 중국 전체로 보자면 양나라는 작은 나라지만 그대 나라보다 크다.”

“믿을 수 없다.”

루이 6세만이 아니라 근처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이 시기 프랑스 왕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토는 현대 프랑스의 30%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머지를 얻기 위해 루이 6세가 일생을 바친 것이 아닌가? 길게 보면 영국과 프랑스 간 100년 전쟁의 서막인 것이다.

루이 6세는 이대로는 평행선을 달리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다 좋다. 먼저 교황 성하에 대한 요구 사항이나 들어보자.”

“요구 조건은 모두 세 가지다.”

“한 가지도 아니고 세 가지? 교황 성하께서 허용하리라 믿는가? 세 번이나 교황 성하의 양보를 받아낼 수 있을 정도로 노르만의 목숨값이 비싸다고 생각하나?”

“들어보고 난 후에 결정해도 되는 문제가 아닌가?”

“단신으로 노르만 기사단을 돌파한 자의 여유인가?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나도 끝까지 들어야 직성이 풀리겠다.”

“첫 번째, 비잔틴의 동방 정교회와 이슬람에 가로막혀 가톨릭은 중국까지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양나라에 동방 교구를 설립하고 신앙심 깊은 주교를 파견해주었으면 한다.”

“동방 교구를 열어 달라고?”

“만약 받아주지 않겠다면 우리는 동방 정교회의 포교를 허락할지도 모른다. 참고로 이슬람은 소수지만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나는 과거에 종교 교류를 추진했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생에 실패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학문 연구로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 차후엔 자율적으로 민간 흐름에 맡기자는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유학이 다른 제자백가와 율학을 제치고 사회의 주류 학문으로 올라선 상황에서 어떤 학문인들 제대로 버틸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반대로 불교처럼 종교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히 한 후 학문 연구로 나가는 것이 지금 중국의 상황에 더 맞지 않을까?

가톨릭을 받아들이려는 것은 양나라만의 특색을 더욱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유럽과의 통상을 위해서도 매우 유리했다. 향후 수백 년간 전개될 십자군 전쟁에서도 방관자가 아니라 참가자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을 통해 얻을 안목과 인식이야말로 동아시아 변혁의 가장 큰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파스칼 2세는 신성로마제국에 맞서기 위해서 그린란드와 빈란드 교구까지 만들어 주교까지 임명하는 면모를 보였다. 그린란드는 사람이 제대로 살지 못하는 동토였고, 빈란드는 오늘날 캐나다 동쪽 끝 래브라도 반도 남쪽에 있는 뉴펀들랜드 섬으로 추정된다. 고대의 바이킹이 개척했다고 알려진 영토들에도 교구를 만든 것이다. 실제로는 교구의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임에도 말이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가려면 아직 300년이나 남은 상황에서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주교가 탄생한 셈이다. 그런 무리수까지 던질 정도의 교황이라면 동방 교구의 설립은 맨발로 뛰어나와 반겨줄 정도의 호재였다.

그래서 루이 6세는 의아한 것이었다. 교황이 좋아할 것이 확실한 일을 내가 자처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둘째, 나를 구호단의 명예 기사로 인정해줄 것.”

“대체 무슨 속셈인가? 비잔틴 황태자의 밀명으로 노르만을 잡으러 온 것이 아니었나?”

조건만 들으면 신심 가득한 가톨릭 왕의 애원과 비슷했기 때문에 루이 6세의 눈동자가 진의를 탐지하듯 계속해서 나를 훑었다.

구호단은 앞으로 몇 년 후에 그 유명한 성 요한 기사단으로 바뀌게 된다. 십자군 전쟁 이전부터 아랍과 거래하던 상인들이 예루살렘에 순례자를 위한 진료소를 세울 수 있도록 그 지역의 술탄에게 요청했다. 그것이 받아들여져서 세례자 요한의 묘지에 진료소가 세워졌고 구호단의 시작인 셈이다.

초기엔 명칭 그대로 구호를 위한 목적만 있었으나 100년쯤 지나면 큰 세력을 가진 전사 집단이 된다. 그러한 전사 집단과 인연을 만들기 위해서 가입을 청한 것이 아니었다. 십자군 전쟁에 발을 담글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구호라는 숭고한 목적을 위해 가톨릭의 전도를 허락한 동방의 왕이 직접 돕는다는 것은 교황에게 있어서 매우 호재였다.

그렇다는 것은 유럽인에게 있어 양나라는 중원이 아닌 유럽의 한 부분처럼 여겨질 수 있는 정신적 근거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나의 이런 행동이 유럽을 으뜸처럼 여겨서?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라 섞임을 통한 변화였고, 중원의 유학과는 차별화된 시각을 전할 것이다. 우리의 것이 항상 옳다는 생각에 균열을 내는 것이 변화의 시작인 것이다.

“셋째는 보에몽을 일주일만 맡겨둘 것.”

요하네스에게서 비잔틴 통상권을 받아내려면 꼭 필요한 조건이긴 했다. 루이 6세는 그건 현실적이라고 보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한둘이 아닌지 미진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째서 우리의 퇴각을 바라지 않지? 비잔틴이 이기리라 생각하는 건가? 그리스의 불을 믿고 있느냔 말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이 6세는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현대에서 내가 읽었던 책들이 워낙 제각각이라 같은 역사를 다룬 것이라도 연관 지어 생각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특정 키워드를 들으면 반짝하고 연결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 루이 6세의 질문이 그러했다.

그리스의 불은 비잔틴의 비밀 병기로써 그 위용을 과시했지만 주로 튀르크를 상대로 쓰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끔은 유럽의 침입자들에게도 쓰는 사례가 있었다. 러시아군과 노르만군이었는데, 여기서 언급되는 노르만군이 바로 지금 보에몽의 군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알렉시우스 1세가 고대 도시인 펠라를 전장으로 설정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진입로를 제한하고 인근에 울창한 수림도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나무에서 채집한 액에 유황을 섞어, 그것을 긴 관에 넣고 공기를 계속 주입한다. 그 끝을 적에게 겨누고 뿜어져 나오는 액체에 불을 붙이면 불길이 회오리바람처럼 적에게 향한다.

내가 읽었던 책의 묘사대로라면 일종의 화염방사기다. 아무리 용맹한 노르만이 앞장서고 프랑스군이 숫자로 압박해도 물로 끄기 힘든 그리스의 불 앞에서는 버틸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의 불은 비잔틴 제국이 정말 존망의 상황일 때만 사용했기 때문에 이곳엔 그리스의 불을 구경하지 못한 자가 태반이었다. 루이 6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 대답이 엄포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음에도 섣불리 거짓이라고 단정 짓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노르만 기사단을 상대로 너무나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정도 실력쯤 되는 자가 빈말을 할 것 같지 않다는 기사들의 고정관념이라고 해야 할까?

“당신들은 비잔틴을 몰라도 너무 몰라. 잠자던 호랑이가 기지개를 켠 상황이지. 게다가 프랑스는 지금 비잔틴이랑 싸울 처지가 아니지 않은가? 교황이 신성로마제국과 주교 임명권을 놓고 힘겨루기를 하는 판에 말이야. 내가 먼저 온 것은 그대들이 패하면 내가 얻어갈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과거 루스족의 침공을 답습하겠나?”

“루스족의 침공? 170년 전의 사건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노르만과 프랑크족의 침공을 기억하게 되겠지. 그리스 불의 희생자로 말이야.”

루이 6세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루스족은 러시아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대군을 이끌고 비잔틴을 공격했다가 처참한 패배를 당했던 것은 당시에는 큰 이야깃거리였지만 세월이 너무나 흐른 지금은 흐릿한 잔상으로만 남겨져 있었다.

루이 6세가 장고에 들어가자 보에몽이 발버둥 치며 소리쳤다.

“젠장, 모두 코레아의 말을 믿지 마라! 이놈은 사기꾼이다! 컥!”

목을 감은 팔에 힘을 가하자 보에몽은 순간 숨이 막혀 볼썽사나운 표정으로 혼절해버렸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루이 6세의 답을 기다렸다.

============================ 작품 후기 ============================

초고입니다. 먼저 올려두고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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