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8 (30) 화룡점정(畵龍點睛) =========================================================================
볼썽사납게 쓰러졌던 콘스탄틴은 정신을 차리자 다시 덤비려고 했지만, 요하네스가 제지했다.
“그만! 그 정도면 되었다.”
콘스탄틴은 자신이 잠시 방심했을 뿐이라며 재차 겨룰 기회를 달라고 했지만, 요하네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콘스탄틴은 나를 잠시 쳐다보고는 아쉽다는 듯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부탁을 말하라.”
요하네스의 말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독대를 원합니다.”
“독대?”
주변에선 말도 되지 않는다고 떠들어댔다. 나를 이곳까지 안내한 아폴리우스는 대체 무슨 속셈이냐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그들의 반대나 의문 따윈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이곳의 주재자는 요하네스였기 때문이다.
요하네스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안 되겠다는 듯 고래를 가로저었다.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자들이 꽤 많다. 아폴리우스의 부탁으로 그대를 만났다고는 해도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승부에서 이긴 그대의 제안을 참작하여 독대와 다를 바가 없는 자리를 만들어주겠다.”
그가 손뼉을 치자 병사들은 막사 한구석에 병풍처럼 접혀 있는 판자를 펼쳐 재빨리 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치 고해소 같은 형식의 밀폐된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런 것을 일부러 만들어 다닐 정도라니 독대를 하다가 암살 위협을 겪은 경우가 몇 차례 있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요하네스는 왕위에 오르기까지 형제자매들로부터 쿠데타 위협을 항시 받았다.
교도소에서 볼 수 있는 면회장 형태라고 해야 하나? 한쪽 방에 들어서자 철판 하나가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마도 칼 같은 것을 이용해서 찌를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나 보다. 작게 뚫린 구멍 몇 개를 통해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었다.
주위가 뭔가로 뒤덮이는 느낌이 들었다. 빛이 차단되는 것을 보니 대화가 새나가지 않도록 막을 씌우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측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독대를 진행할 수 있다.
“독대를 청한 이유를 들어볼까?”
나는 그간의 사정을 다 밝혔다. 본래 이렇게까지 다 털어놓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가 요하네스라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알려진 대로라면 그는 현자에 가까운 합리적인 이성과 도덕을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10년 전 이곳에 왔던 간략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시작한 이야기는 빠르게 이어나갔음에도 대략 10분 정도는 걸렸던 것 같다. 내 이야기가 끝난 후에 요하네스는 생각에 골몰했다.
“호라산의 술탄이 뭇 술탄 중 셀주크 제국의 제위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라는 것은 들었다. 그의 머리는 너구리와 같고 손발은 늑대와 같다고 하지. 아폴리우스가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던 것은 노르만 거인(보에몽)의 퇴치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겠지. 그러나 나는 달리 생각한다. 보에몽이 늑대라면 산자르는 호랑이다. 셀주크 제국이 그의 손에 들어간다면 비잔틴은 보에몽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인과 마주쳐야 한다.”
요하네스 시대를 떠올려보면 유럽 쪽 영토를 침입하는 적들은 비교적 수월하게 막아냈지만 산자르가 패권을 잡은 셀주크 제국의 침공은 일진일퇴였다. 내가 처지를 바꿔놓고 생각해봐도 사막의 유목민들이 더 무섭지 유럽인이 더 무서울 것 같지는 않았다.
“타티키오스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정말 뜻밖의 소식이었다. 한편으로는 이해도 간다. 그는 폐하가 가장 신임하던 부하이기 이전에 친구였으니까. 알라무트의 궤멸 소식도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 최소한 그곳을 이용해서 나를 죽이려는 시도는 없을 테니까.”
그는 잠시 손가락으로 벽을 쳤다. 생각이 깊어졌을 때 무의식으로 나타나는 행동 같았다. 수십 차례 벽을 치던 손가락이 한순간 멈췄다.
“중국의 대상(大商)들은 제국의 큰 고객이지. 베네치아와 같은 조건으로 면세 혜택을 주는 것은 충분히 건의할 수 있는 사항이다. 그러나 제국이 너무 밑진다고 생각하지 않나? 당신 혼자의 몸값으로 말이야.”
내가 양나라의 왕이라고 밝혔을 때 요하네스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자신들을 괴롭히는 흑해 지역의 페체네그족의 족장쯤으로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치세 때 페체네그족은 비잔틴의 동맹자로 탈바꿈한다. 로마 제국 내에서 영주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병력 제공의 의무를 지는 ‘포이데라티(군사동맹)’로써 말이다. 그러나 나는 오직 혼자다. 아무리 강해도 군사동맹으로써의 역할을 온전히 할 수 없을 것이란 지적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원하시는 바가 뭡니까?”
“보에몽. 산 채로.”
요하네스는 보에몽이 보이면 당장에라도 씹어먹을 듯한 눈초리였다. 비잔틴 제국의 요인이라면 보에몽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보에몽의 아버지인 로베르 시절부터 교황의 막강한 후원을 받아 이탈리아 탈환을 통해 정통 로마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비잔틴과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교황과 비잔틴은 어느 한쪽이 사라져야 로마 제국의 계승권 다툼이 끝나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교황의 검으로 싸우며 세속적인 지배권을 갖길 원하는 로베르, 그런 로베르의 생각을 이어받은 것이 보에몽이다. 그는 광전사로 불리며 유럽의 당대 기사 중 으뜸으로 꼽힌다. 그런 자를 잡아 달라고 한다. 수십 만의 대군을 뚫고 말이다.
비잔틴의 검이라던 타티키오스도 그런 임무를 수행할 수는 없다며 더욱 현실적인 방안을 찾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황태자가 불가능한 임무를 내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찌어찌 수십만 대군의 이목을 피한다고는 해도 보에몽이 자랑하는 유럽 최고의 노르만 기사단 오백이 있지요. 그들을 모두 물리치고 보에몽을 잡아 오라는 말입니까?”
“제국에 대해 면세 혜택을 전리품으로 걸었다면 그 정도 성과는 당연하다.”
“그럼 이번 전쟁은 문제가 없겠습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 피사가 다 막아줄 테니까요.”
본래 베네치아의 통상 특권의 시작은 보에몽의 아버지, 로베르 대에 남부 이탈리아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다 아예 지중해 치안을 베네치아 함대에 맡겨버리니 베네치아가 쑥쑥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견제하고자 제노바와 피사를 동맹으로 삼아 대항마로 키우려 했지만, 한 가지를 간과했다.
상인들은 철저히 이익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말이다. 이후에 베네치아가 만료된 통상 조약을 연장할 것을 제의하자 요하네스는 거부권을 행사하는데 그것을 지켜보던 다른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은 자신들도 해당이 될까 두려워 베네치아가 함대를 이끌고 비잔틴 제국의 중요 섬들을 점령하고 볼모로 삼는 것을 방관해버렸다. 그들은 평상시 무역에서 적대적인 경쟁자였음에도 말이다. 비잔틴으로써는 혜택을 줘서 키워놨더니 뒤통수를 맞은 격이다.
“제국 연합 함대는 시칠리아 일대를 차단했다. 늦었지만 북아프리카 술탄들이 더는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현재 보에몽의 추정 병력은 30만, 제국군은 20만이다. 방어 측면에서 결코 불리한 수치는 아니다. 제국이 버티는 동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에몽을 잡아 오라.”
“만약 제국이 먼저 보에몽을 잡는다면…….”
“그대의 제안은 무효가 되겠지. 하지만 그대의 분투를 확인할 수 있다면 킬리지 술탄의 왕후와 자식들은 안전한 귀환을 약속하도록 하지. 아폴리우스 선생도 이 정도면 만족할걸세. 산자르 술탄이 그대에게 바라는 것도 그 정도일 테지.”
아마도 그는 세련되게 나의 요구를 물리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면세 혜택을 쉽게 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베네치아처럼 수백 척의 군선을 갖추고 비잔틴을 대신해 지중해 경찰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여야 주어지는 것이 면세 혜택이었기 때문이다. 받는 혜택만큼 베네치아가 쏟아붓는 인력과 자금도 그만큼 컸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혼자이다. 요하네스가 아니었다면 아예 미친놈 취급을 하며 내쫓았을 가능성도 컸다. 그런 면에서 요하네스는 바늘구멍 같은 기회라도 준 셈이다. 그는 그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킬리지의 아내와 자식을 돌려주는 것만으로도 생색을 다 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보에몽!”
나는 요하네스가 직접 내어준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펠라로 진군하는 보에몽의 군대와 직접 부딪치기 위해서였다. 내가 지금 당장 가겠다고 말을 달라고 하자 미친놈처럼 쳐다보던 요하네스와 아폴리우스, 콘스탄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확신했다. 정렬되지 않은 대군은 무섭지 않다. 그저 인파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이다. 공격 측과 방어 측이 암묵적 합의로 이미 전장을 설정해둔 상황에서 공격 측이 할 일은 오지 그곳까지 걷는 일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펠라를 떠나 고대 일리리아(Illyria)라고 불리던 발칸 반도 서부(현 알바니아 코르처)까지 도착했다. 그곳에는 고대 일리리아 왕국 시절을 거쳐 로마 제국이 거점으로 삼던 일리리아 요새가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을 빠져나오는 대병력의 기치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달렸다.
설마 이런 곳에서 습격을 당하리라고 생각했을까? 그래서인지 보에몽은 십자군 원정으로 얻은 안티오크 공국의 깃발을 앞세우고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하고 있었다.
그를 금세 알 수 있었던 것은 10년 전 이미 그와 마주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타티키오스를 처음으로 만나 겨룬 날이기도 했다.
보에몽은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오는 나를 처음엔 황당하다는 듯 부하 기사들과 손가락질하며 폭소를 터트렸지만, 점차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도 나를 알아차린 것이다. 그의 표정은 마치 유령을 보는 듯했다.
“코레아, 네놈이 어떻게 여길!”
보에몽이 따르던 노르만 기사들에게 출진을 명령하자 그들은 고작 한 명을 상대한다는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했는지 순번을 정해 차례차례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주리란 것을 10명의 기사가 순식간에 나가떨어지고 난 다음에야 깨달은 것 같았다. 노르만 기사들의 표정에 진지함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보에몽이 뒤를 돌아보았다. 프랑스 기사단과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튀르크 전사들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들은 고작 한 명을 상대하기 위해 도울 마음은 전혀 없는 듯했다.
노르만 기사 5백과 십자군 전쟁을 통해 베르세르크(광전사)란 이명(異名)을 얻은 보에몽이 어찌 싸우는지 구경이나 할 참이었을 것이다. 보에몽과 원한이 있는 기사 나부랭이가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덤빈다고 말이다.
“코레아, 이놈! 10년 전 킬리지를 죽일 수 있음에도 네놈이 발목을 잡았지!”
보에몽은 육중한 방패를 앞세워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파괴적인 돌진은 이미 십자군 원정을 통해 정평이 나 있었다. 특히 도릴레온 협곡에서 적이 협곡 양쪽에 궁수를 배치할 것을 예상하여 두꺼운 방패로 방어하다가 적진을 단숨에 돌파하여 진형을 무너트린 것은 유명했다.
지금도 그는 그때의 성공을 그대로 답습하여 강력한 실드 차지로 나를 무너트릴 것을 의심하지 않는 눈초리였다. 누가 보아도 내가 탄 말은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말이 쓰러지면 나는 손쉬운 먹잇감이 될 것이라 확신한 듯했다.
노르만 기사들이 내가 피할 길을 봉쇄했다. 창을 쉴새 없이 움직여 내 손도 묶었다. 그 사이 보에몽의 실드 차지가 들이닥쳤다. 말이 겁에 질려 몸을 허공으로 일으켰고 나는 자연 말에서 떨어지는 형세가 되었다.
그러나 예상하던 바였다. 나는 재빨리 착지한 후 실드 차지의 가속으로 멈추지 못하고 지나치려는 보에몽의 말 뒷다리를 잡아챘다. 허공으로 앞발을 들던 내 말과 달리 보에몽의 말은 뒷다리를 허공으로 향하며 머리를 땅에 처박았고 보에몽의 몸 역시 관성의 법칙을 따라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재빨리 그에 다가가 팔로 목을 옥죄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당황하던 노르만 기사들은 내 주위를 일단 포위한 후 혼절한 보에몽이 깨어나길 기다렸다.
노르만 기사들에 둘러싸여 밖의 상황을 볼 수는 없었지만 밖은 상당히 소란스러운 상태였다. 보에몽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놀랐기 때문이리라. 이곳에 모인 자 중 그 누구도 보에몽을 단신으로 이길 수 있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황이나 프랑스 왕이 기꺼이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보에몽은 정신이 돌아오자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지 중얼거렸다.
“이건 악몽이다. 코레아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어.”
“악몽 같은 현실이지. 당신이 두 번째로 포로가 된 것 말이야.”
보에몽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의 몸값 경매가 세간의 조롱거리로 떠오르며 입은 치욕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노르만 기사단이 고작 페체네그 전사에게 무너졌단 말인가?”
조롱하듯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노르만 기사단은 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주군인 보에몽이 무슨 일을 당할까 싶어 가만히 있었다. 보에몽이 바이킹의 후예라는 티가 나는 체형이라면 노르만 기사단 사이를 비집고 나타난 이는 다른 혈통을 지닌 듯했다. 나의 짐작을 확인시켜주기라도 하듯 보에몽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뚱보, 코레아는 페체네그 전사 따위가 아니다.”
페체네그 전사 따위에게 질 것 같으냐는 자부심을 비췄지만 보에몽의 말마따나 어떻게 전쟁터에 나왔는지 모를 뚱보 기사는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페체네그 전사가 아니면 고트족인가? 아무렴 어떤가? 평소엔 무적이라며 우리 프랑크 기사단을 무시하더니 겨우 한 명에게 줄줄이 나가떨어지는 꼴이라니…….”
뚱보 기사가 프랑크 기사단을 언급하자 나는 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사에서 내가 아는 프랑크족 뚱보 왕은 오직 하나, 루이 6세.’
프랑스는 현재 필리프 1세의 카페 왕조 시대였다. 그다음 보위를 아들인 루이 6세가 물려받게 되는데 보에몽은 필리프 1세의 딸과 결혼했으니 매제와 형님 사이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도 노르만과 프랑크라는 혈통과 관습의 차이가 불화를 만든 것 같았다.
보에몽은 루이 6세와 말싸움을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지 대꾸하지 않고 나에게 거칠게 말했다.
“코레아, 나를 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맛보게 될 것이다.”
“확실한 건 그전에 네놈이 죽겠지.”
바로 돌아오는 답변에 보에몽의 인상이 구겨졌고, 반대로 루이 6세는 마치 제삼자인 마냥 팔짱까지 끼며 느긋하게 구경하는 모양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