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37화 (237/257)

00237  (30) 화룡점정(畵龍點睛)  =========================================================================

(30) 화룡점정(畵龍點睛)

용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눈을 그린다.

내가 탄 배는 끝도 없이 늘어선 군선 사이를 지나 테살로니키 항구에 도착했다. 배가 드나들기에 좋은 항구이면서 도나우 강과도 연결되기에 동유럽 내륙의 출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교통의 요지인 곳이었다.

산자르가 미리 준비한 배와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나는 아드리아해와 비잔틴을 연결하는 에그나티아 가도(街道)의 중심에 서는 감격을 맞보았다. 한때 로마에 대한 환상으로 열심히 서적을 탐독했던 때가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아쉬네와의 마지막이 생각났다.

“이준경이 아니라 척준경이란 말이지요?”

그녀의 음성은 비교적 차분했다.

“태고 영원으로의 회귀는 잃어버린 이상으로 가려는 희구(希求)지요. 여호와나 알라 같은 전능의 존재가 현세의 하마단에 다시 나타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해요. 신화가 다시 나타난다면 태고의 영원 훼손이고 성(聖)에 대한 모독이 된다는 뜻이에요. 태고의 시간에서 산은 산이 되고 물은 물로서 존재한다면, 속된 인간사에서는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되는 시간의 흐름을 맛보고 있지요. 혹은 인위적으로 말이에요. 태고의 ‘그때’가 아닌 역사 속의 ‘지금’은 시간의 영향을 피할 수 없고 그 시간은 곧 세속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서요.”

“그래서?”

내 질문에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준경은 신화 속의 존재였죠. 태고 영원으로의 회귀를 꿈꾸었으니까요. 그가 외쳤던 같은 꿈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이 완전하게 다다를 수 없는 이상향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그곳에 다다를 수 있는 자는 인간의 욕망을 초월한 소수의 성인뿐일 거예요.”

“그렇지 않다. 같은 꿈이라는 것은…….”

설명하려고 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이준경이라고 밝히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아쉬네는 나의 그런 행동에 여유를 찾았는지 미소를 보였다.

“알아요. 모두가 보편적인 깨달음을 가지게 하는 것, 선한 의심을 통한 사회의 진보를 이루는 것, 평균보다 상향된 합리성과 감수성을 쥐여줌으로써 속세에서 성(聖)을 얻는 그러한 정신세계의 역사를 공유하고 싶어하는 것 말이에요.”

내가 설명하려던 내용보다 더 짧지만,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과거에서 지금까지 내가 하고자 했던 모든 일의 요약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은 보편성에 반하는 예외도 인정해야만 합니다. 충실한 알라의 종을 자처하는 산자르가 쿠란에서 금기시하는 악덕을 여전히 저지르고 있으며, 그러한 악덕이 다른 술탄에게 있어서도 악덕이 아닌 것이 되었지요. 신을 편한 대로만 섬기고 있는 시대입니다.”

“당신의 행동도 예외로 인정해달라는 것인가?”

고리대금을 금지하고, 여성과 노예의 권리를 보장한다. 모슬렘은 다 같은 형제이므로 형제들의 인권과 명예를 존중하고 중상모략을 하지 마라. 먼저 공격하지 마라. 남 탓을 하지 마라. 노동에 대한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자는 신의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다 같은 내용은 얼핏 보아서 시대를 앞서가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의 십계명을 신자 중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이슬람의 계율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아쉬네는 지적한 것이다.

“예외를 인정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 속의 ‘지금’은 시간의 영향을 피할 수 없고 그 시간은 곧 세속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나와 산자르가 하마단을 떠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떠나기 전에 딱 한 마디를 남기긴 했다. 산자르는 에스더의 묘에서 일어난 소동을 이미 들었는지 내 어깨를 치며 웃음을 보였다. 그러면서 자신도 꺾지 못한 하마단의 영주를 품지 못한 소감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그녀가 묘지에서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10년 전 하사신의 수족들이 그녀 주위에 깔렸었다면 이제는 산자르의 이목이 곳곳에 깔린 상황이 되었다.

산자르는 농담처럼 만약 에스더의 묘에서 자기보다 앞서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다면 묘를 붕괴시켜버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돌문을 여닫기 위해 준비된 수십 마리의 우마는 어쩌면 주춧돌을 빼서 묘를 붕괴시키는 이중의 임무를 지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런 사실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나에게 안기려고 했을까? 둘 다 죽을 것이 뻔한 상황에서 말이다.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무릎을 쳤다.

그녀는 이준경을 원했고, 그래서 나는 척준경이 되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이준경임을 확인시켜주었다는 것을 말이다.

나를 그녀에게 데려가기 위해 자살하려고 했던 시녀는 결과적으로 죽지 않았다. 아쉬네는 산자르가 밤에 찾아와 자신을 겁탈하려고 했기에 아끼는 아이 둘을 내주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그녀의 말뿐이었다.

산자르에게 어젯밤 일을 물어보니 그는 측근들과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잠이 들었다고 하니 지레짐작한 나는 결국 그녀의 시험에 놀아난 셈이었다. 그리고 산자르의 나에 대한 믿음도 깊어졌다. 이것을 좋다고 해야 하나?

“진왕이 머무는 곳이 곧 하마단이라…….”

하마단은 오랫동안 왕의 도시로 불렸다. 그녀는 하마단이 본래부터 왕의 도시였기 때문이 아니라 왕이 그곳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하마단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그녀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나는 언젠가 그녀를 다시 만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일단 지금은 아니었다. 테살로니키의 가도를 따라 약 50km 정도를 가자 목적지로 삼았던 도시, 펠라가 장엄한 모습을 드러냈다.

펠라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작, 마케도니아 왕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로마에 정복되기 전까지 번영을 누린 이 고대의 도시엔 창검과 기치로 빽빽했다. 보에몽과 노르만 전사들, 프랑스군, 거기에 더해 이 기회에 비잔틴과 원한을 가진 튀르크의 술탄들까지 더해져서 십자군 전쟁보다도 더 치열한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었다. 교황과 프랑스 왕이 보에몽을 편드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북아프리카 지역, 튀르크 술탄들의 참전이라니? 보에몽이 먼저 연합 제의를 했다는 것은 이미 십자군 전쟁의 대의는 사실 겉치장뿐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튀르크 술탄들의 참전 역시 마찬가지다. 참전 이유로 비잔틴에 대한 복수를 천명했지만, 사실은 지중해를 제집처럼 다니며 무역을 선도하는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눈엣가시였다. 도무지 무역 경쟁이 되지 않다 보니 경제적으로 이들 도시 국가들에 예속될 판이었다. 이들 도시 국가의 맹주 노릇을 하는 것이 비잔틴이었으니 비잔틴의 멸망을 바랄 법도 했다.

안내자의 인도를 받아 수많은 군막 중 한 곳과 접촉하기로 했다. 알렉시우스 1세가 위험성을 감지하고 직접 참전한 전투라서 그런지 목적지로 향하는 내내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만큼 상황이 만만치 않다는 뜻이리라.

안내자가 먼저 군막에 들어가서 내가 도착했음을 알린 듯했다. 이어 형형한 눈빛의 비잔틴 병사들이 나를 에워싸며 안으로 향했다.

내가 들어간 군막은 50명 정도가 들어서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넓었다. 안내자와 인사를 나누던 접선자는 약관 정도의 젊은이였다. 그는 내가 앞에 온 것을 보고 의자를 권했다. 안내자와 접선자, 그리고 내가 품자 형태로 나란히 의자에 앉은 형국이 되었다.

“나의 공부 스승인 아폴리우스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수상한 자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킬리지 술탄의 왕후와 자식들을 돌려달라고 이곳까지 왔단 말이지?”

안내자는 이곳으로 오는 내내 자신의 정체를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외모로 보아 그리스인인 것 같다는 추정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인을 넘어 공부 스승이라니? 그럼 내 눈앞에 보이는 키 작고 검은 피부의 볼품 없는 청년이 설마 ‘그’라는 말인가?

“칼로얀니스여, 서방에서 밀려오는 노르만 거인의 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동방의 안정이 필요합니다. 룸 술탄국의 술탄은 병세가 악화하여 죽음이 예정된 자, 죽기 전에 가족을 보기를 원하니 가족을 돌려보내는 것은 인간적인 도리에도 합당한 것입니다.”

노르만의 거인은 보에몽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는 버서커의 원조라고 할 정도로 광폭한 기사였다. 마치 과거에 고삐 풀린 여포를 보는 것 같달까? 그는 개인의 기량으로 승리를 따내는 유형이기에 전술 병기라고도 부를 수 있겠지만 이런 예의 실패작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바로 항우다. 그는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그나저나 칼로얀니스라니!

칼로얀니스는 ‘아름다운 요하네스’라는 뜻이다. 지금 내 앞의 청년이 아랍인과 아프리카인의 혼혈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모습인 것을 보았을 때 사실 붙기 어려운 애칭이었지만 그 애칭은 나도 알 정도로 유명한 뜻이 있었다.

신앙심이 깊고 경건하고 자애로운 군주로 이름난 요하네스 2세의 애칭이기 때문이다. 그의 고운 마음씨를 아름다움으로 표현한 애칭이 바로 칼로얀니스였다.

요하네스 2세는 현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의 후임자다. 한 마디로 황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알렉시우스 1세가 망해가는 비잔틴에 도약의 주춧돌을 놓았다면 요하네스 2세는 비잔틴을 중흥기로 이끈 인물이었다.

묵묵히 스승의 말을 경청하던 요하네스가 나에게 물었다.

“그대가 킬리지 술탄의 친구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킬리지 술탄은 매우 용맹한 자였네. 그가 오만한 십자군 기사들을 우수수 쓰러트릴 때마다 나는 환호했지.”

요하네스는 십자군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군중십자군이나 보에몽의 십자군을 겪었다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진정으로 해방하기보다 포화한 유럽을 떠나 신천지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고 싶어 하는 욕망에 사로잡혔었으니 말이다.

“킬리지 술탄의 친구라면 그대 역시도 강하겠지?”

“그는 10년 전 코레아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아랍을 횡단하며 마힐셀렘이란 별명도 얻었지요. 그의 강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폴리우스가 끼어들었다. 강함을 언급하는 것을 보니 실력을 보여야 할 판이다. 아니나 다를까, 요하네스가 손짓하자 그의 호위를 맡은 비잔틴 병사 중 유난히 덩치가 큰 자가 앞으로 나섰다.

로마의 후예라 그런가, 검투사 놀이에 장단을 맞춰야 할 판이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제가 이긴다면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부탁?”

요하네스가 너무 큰 것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작고 가벼운 부탁입니다. 부담되신다면 들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정도라면, 알았다.”

금세 병사들이 주변으로 흩어지더니 중앙에 결투장이 생겨났다. 내 상대로 지목받은 병사가 먼저 자리를 잡더니 투구를 벗었다. 나는 그의 얼굴이 왠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은 콘스탄틴, 비잔틴의 검이었던 아버지와 호각을 이뤘다는 그대와 겨룰 수 있게 되어 영광이다.”

그는 바로 타티키오스의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실각에도 불구하고 가문은 여전히 성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는데, 아들들이 여럿이라 그중에는 가문을 나와 자력으로 성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나는 그런 설명을 타티키오스로부터 직접 들었으니 콘스탄틴의 이름도 금세 떠올렸다.

‘자기를 가장 닮은 아들이라고 했지. 용맹도 성격도…….’

나는 주먹을 맞잡으며 예의를 갖췄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은 들었소. 그는 훌륭한 장군이었소. 그의 아들도 그런지 봅시다.”

힘찬 기합과 함께 콘스탄틴은 거구의 몸을 날려 전신을 노리고 창을 빠르게 찔러댔다. 칼을 쓰던 타티키오스를 생각하면 아들이 창을 사용하는 모습이 생소하기는 했지만, 위력적이라는 것엔 변함이 없었다. 타티키오스가 자신과 가장 닮은 아들이라고 칭했던 것이 거짓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나는 잔영이 남을 정도로 빠른 창의 목 부위를 순간적으로 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딸려온 콘스탄틴은 내 남은 한 손으로 복부를 후려치자 금세 뒤로 나자빠졌다. 기세 좋게 출발했던 콘스탄틴이 순식간에 쓰러지자 주변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타티키오스와 호각인 적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