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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35화 (235/257)

00235  (29) 남산가이(南山可移)  =========================================================================

나는 잠시 생각했다. 내심 알렉시우스 1세를 돕기로 했지만, 그에게 어떤 것을 받아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킬리지의 아내와 자식들만 데리고 오기에는 들여야 할 시간과 공이 훨씬 증가했기 때문이다.

‘피사나 베네치아 같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얻어낸 이권이 면세 특권이었지.’

비잔틴은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여겼고,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무역은 천박하게 여겨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맡겼다. 대표적으로 베네치아를 꼽을 수 있다.

베네치아의 무역 영향력이 점차 강대해지자 비잔틴은 베네치아의 경쟁자인 제노바와 피사를 끌어들여 견제하고자 했다. 그들 모두에게 면세를 허락해줌으로써 경쟁을 유도하려 했지만,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르네상스만 열어준 셈이 되었다.

이 시기 제노바나 피사, 베네치아는 십자군 전쟁으로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 돈벼락을 맞았다고 할까? 자연 거만해지고 우쭐해지는 시기다. 오죽하면 테살로니키의 교주가 베네치아인을 가리켜 ‘늪의 개구리’라고 이름 지었을까.

그런데도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해양을 방어하기 위한 노력도 이들에게 맡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랍에 정복 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전쟁을 치르는 것이 일상화되었던 비잔틴에게 있어 지중해는 상대적으로 덜 중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도 있었다.

아무튼, 그러한 면세 특권을 우리도 받아낼 수 있다면 지금 당장은 몰라도 장기적으로 큰 이득이 될 것이 분명했다. 동서양의 중계상 노릇을 하는 아랍 상인을 거치지 않고 모험적인 육로와 항로를 개척하여 거래하고자 하는 욕구가 증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취적인 모험심은 대항해 시대를 열기 위한 가장 큰 포석이었다.

“돕겠습니다.”

내 대답에 그제야 타티키오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지도 못한 나의 방문이 천상에서 내려온 동아줄로 보였던 모양이다.

“자네에게 비잔틴에 대해 해줄 말이 많아. 그러나 일단…….”

타티키오스는 내 어깨너머 방문을 가리켰다.

“영주에게 가보게. 그녀가 떠나면서 눈짓을 주었어.”

아쉬네는 내게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진왕의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그러나 아쉬네는 진왕은 스스로 깨닫는 자라고 밝혔다. 그녀의 속내를 보려면 결국 다시 얼굴을 마주 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가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시녀가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따라 궁궐 깊은 곳까지 들어가자 환한 빛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정원이 보였다. 아쉬네는 그곳에서 꽃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꽃에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사회가 발달할수록 세계는 붕괴로 향한다고 저를 길러준 예언자들이 말했어요. 발달이 어째서 붕괴를 의미하는 것인지 저는 이해하지 못했죠.”

‘엘리아데?’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말은 20세기 저명한 종교사학자 엘리아데의 주장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것을 알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 같고 종교적인 해석이 비슷해서 생겨난 것인가 싶었다.

그녀는 찰나에 사라진 나의 당혹함을 읽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그 표정은 대체 뭔가요? 그래서 당신을 태고의 시간(illum tempus) 정원으로 데리고 온 것이지만요.”

“태고의 시간?”

나는 그 뜻을 질문하는 것 같았지만 내심 당혹감은 이어졌다. 엘리아데는 근대 시대를 매우 강하게 비판했었다. 근대 학문의 세계에서 일어난 고도의 전문화와 과학의 발달은 제국주의 심화, 기계화와 산업화, 분업화를 통해 인간다움을 상실하는 계기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근대 시대의 폐해를 치유하기 위해 원초적 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바로 태고의 시간, 인간은 알 수 없는, 혹은 잊어버린 신화의 세계다.

“예수, 혹은 알라, 그 누구의 이름으로 지칭한다고 해도 신은 세계를 구원합니다. 당신은 그것을 믿습니까?”

“신을 믿느냐고?”

만약 나를 이렇게 보낸 신이 있다면 멱살이라도 잡았을 것이다. 대체 왜 나였느냐고 말이다.

“무신론자라고 해도 신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지요. 제가 묻는 것은 당신의 신앙에 대한 믿음입니다.”

“신앙?”

신앙에 대한 믿음이라니, 만약 척준경이라면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부처를 믿고 있다고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도 그렇게 대답할 수 있었지만, 어쩐지 마음은 본심을 말하고 있었다.

“인간에게 낙원이란 태고의 시간이 존재하던 신화 안에서 모든 사물이 원형(原型)으로 성화(聖化)되는 세계지. 사물은 물질과 사회의 역사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 그 역사가 나에겐 신앙이다.”

“과연, 당신은 예전에 제가 보았던 준경이 아님은 확실하군요.”

그녀는 후련하다는 표정이었다. 숙원이 풀렸다는 느낌일까?

“그 역사가 신화를 벗어나 세속의 탐욕으로 변질하기 전에 태고의 시간으로 원형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 당신의 신앙은 그런 것이겠지요.”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나의 마음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내가 해야 할 말을 정확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게서 시선을 돌려 활짝 핀 꽃을 매만졌다.

“꽃이 피면 시들죠. 그리고 다시 피죠. 그것은 지금껏 시간에 흐름에 따른 당연한 이치였어요. 아무도 반문하지 않았지요. 역사 역시 그러하죠. 우리가 과거 기록의 묶음을 역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실은 아니라는 것인가?”

그녀와의 대화는 실로 흥미로웠다. 나를 이곳에 보낸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아쉬네도 보낸 것인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당신의 역사는 어떠한가요?”

“나?”

질문이 모호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녀의 질문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그녀의 비밀을 알기 전에 이곳을 떠날 마음을 버렸다. 진실을 건 진검 승부였다.

“나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 사회의 역사가 아니다. 나에게 역사란 인간과 사회를 초월하는 영원회귀 전체성의 역사지. 그러니까 본질로 들어가면…….”

엘리아데가 말했다. 역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가상의 역사다. 쥘 수도,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힘의 역사 말이지.”

“과연…….”

그녀는 일체의 의문도 없이 그대로 수긍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엘리아데는 태고의 시간에서 자치성을 누리는 유일한 정신을 종교라고 정의했다. 인간이 정신적 안식처로 택한 종교의 개념이 아니었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관조다. 역사의 흐름이 어떻게 이어지고,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의 시간에 대한 믿음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무신론자라도 정신적 공포를 겪게 되면 절대적인 존재의 가호를 떠올린다.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지만, 무의식에 각인된 인간 의식의 원형은 인간이 만들어가는 그릇된 역사에 대한 저항 의식과도 연결된다. 예수의 십자가가 그러하고, 붓다의 보리수가 그러하다.

“태고의 시간이 아닌 인간 역사의 시간은 세속과 연결되어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낙원으로 가길 갈구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역사를 이룬다는 것은 시간에 얽매인 세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며 통제받지 않는 욕망은 더욱 커져 결국 공멸로 이른다는 사실을 무의식에 새기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그럼 진왕은…….”

“신화의 세계는 이미 없습니다. 이곳은 인간의 세계인 것이지요.”

“진보가 인류의 원형을 상실하면서 이뤄진다는 명제에 동의하는 것인가?”

다급히 던진 내 질문에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나에게로 점차 가까워졌다. 그녀의 숨이 느껴질 정도였다.

“인간은 진보를 통해 자신들을 물구나무로 걷게 합니다. 진왕은 인간답게 걷게 하는 자입니다.”

“대체 당신의 정체는 뭐지? 빌어먹을 신인가?”

“궁금하다면 나를 품으십시오.”

“뭣이!”

내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는 하지 말라며 소리쳤다. 영험한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제주도 심방을 통해서나 모산파의 공손승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이 세계의 진실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나는 가상의 역사라고 이미 단정했다. 그것은 내게 있어 매우 중요한 변화였다.

나는 지금껏 헤겔의 전철을 밟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헤겔이 철학을 변증법적이고 역사적으로 조명했지만, 결국 독재자들의 시대정신으로 차용되어 인류를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던 것처럼 말이다. 가상의 역사라는 것은 내가 있기에 이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있기에 신화의 세계라는 태고의 시간으로 애써 회귀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진보를 우리는 항상 선이라고 생각하지만, 진보의 끝이 욕심과 욕망을 억제한 인간다움의 상실이라면 인간이 존재할 이유 따위는 없다. 법도 잘 지키고 쓰레기도 버리지 않으며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말 잘 듣는 로봇으로 가득 채우는 세상의 시간 흐름을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가?

“미래에 안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해서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대의 진보와 나의 진보는 어쩌면 다른 곳을 향하는 것 같군. 당신은 종말을 보았나?”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역사가 존재하는 한 종말은 없다. 종말은 역사의 종언이지. 나는 지금껏 역사가 사라진 경우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는 엄포만 들었을 뿐이지. 오만이라고 해도 좋다. 역사는 내가 기억하고 있고 믿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역사는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여전히 현재를 달리고 있지. 끊임없이 고뇌하며 갈피를 잡지 못할 때도 잦지만 아직은…….”

그녀의 정체는 이제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타티키오스와 비잔틴에 대해 나눌 이야기가 더 궁금해졌다. 현재의 나를 믿고 충실히 사는 것, 그것이 역사다. 더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러한 개개의 역사가 알알이 모이면 그것이야말로 같은 꿈을 꾼다는 의미에 가장 적합한 것이리라.

설령 지금쯤 오피스텔에서 쿨쿨 자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만의 백일몽이라 하여도 좋았다. 백일몽이 나를 변화시켰다면 현대의 역사 역시 변화시킨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나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았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과거 가후가 아신아를 화두로 던졌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미련없이 발길을 돌려 태고의 시간을 떠났다. 아쉬네가 다급히 몇 차례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타티키오스는 내가 오면 해줄 이야기가 많았던 듯싶었다. 그는 비잔틴과 황제에 대한 방대하고 상세한 정보를 여과 없이 들려주었다. 설명을 들으며 그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비잔틴에 대한 애정을 고이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와 여러 대화를 나누며 꼬박 밤을 지새웠다.

아침이 되어 점차 하마단을 떠날 시간이 가까워지자 타티키오스는 나와 굳게 손을 맞잡았다. 아마도 이것이 그와 나의 마지막 만남이 되리라.

내가 타티키오스의 방에서 나오자 시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아쉬네가 있을 태고의 시간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나는 갈 이유가 없어 무시하고 산자르에게 가려고 했지만, 시녀가 품에서 칼을 꺼내 자결하려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뜻을 꺾어야 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태고의 시간에 도착하자 아쉬네는 어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단지 다른 것은 그녀의 손에 책 한권이 들려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번에 그 책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내 인상이 단번에 구겨졌다. 시녀가 기세에 놀라 주춤 물러날 정도였다.

“나를 어디까지 시험하려 하는가?”

하마단에 처음 들렀던 당시 아쉬네는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자신에게 전해지는 민 제국의 고서는 오직 이 한 권뿐이라고 말이다. 내가 아내 중 일인인 아싱에게 주었던 편지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역은 것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알 수 없었다.

“민 태조는 자신이 문인으로 이름을 떨쳤으니 다시 환생한다면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무인으로 이름을 떨친다면 재미있겠다고 말했지. 아싱 왕비는 허투루 듣지 않고 자신이 받았던 연서와 답서를 책으로 엮었다. 언제고 자신의 흔적을 찾아올 날을 기다리면서 말이야. 그런 책이다. 그러하니 후인인 당신은 가보로써 잘 보존하라.”

나는 미련없이 돌아섰다. 아싱과의 이별을 고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추억은 과거일 때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 나를 향해 아쉬네가 외쳤다.

“이 책엔 약속이 담겨 있죠. 부정할 셈인가요?”

“약속?”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과거를 떠올렸다. 약주에 취해 무인으로 태어나면 재미있겠다고 하자 장단을 맞추듯 자신들과 다시 혼인할 것인지를 물었다. 당연하다고 말하자 아싱이 만약 나만 혼자 환생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래도 재차 묻자 나는 아싱에게 약속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와 당신의 아이들을 지키겠다고 말이다.

술김에 한 약속이었다.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어쩌면 과거에 하마단에 우연처럼 방문해서 아쉬네를 옥죄던 하사신의 하수인들을 척살한 것도 기이한 운명처럼 느껴졌다.

“이미 알라무트는 폐허가 되었다. 하사신은 이제 없다.”

“하사신이 없어졌다고 안전은 보장되었다는 것인가요? 어젯밤 호라산의 술탄이 찾아왔어요. 그는 술에 잔뜩 취한 채였죠.”

“산자르가?”

산자르가 거침없는 패왕의 성품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입성할 때 보인 태도에 비췄을 때, 설마 아쉬네를 강제로 취할 생각을 품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렘을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이십 대 초반의 패왕이 구설로만 떠도는 저주를 두려워할 것 같지도 않았다.

어젯밤이면 아쉬네의 호위를 자처하는 타티키오스와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을 때다. 아쉬네의 병사들이 패왕 산자르에게 감히 맞설 수 있었을까?

“내 한 몸 정절을 지키고자 아끼는 아이 둘을 내주었죠.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아랍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순간적으로 치미는 화를 억제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나를 보며 아쉬네가 말했다.

“나 하나를 위해 여럿이 희생되는 것이 안전인가요? 그렇다면 저도 더 붙잡을 이유가 없군요.”

이번엔 그녀가 먼저 돌아서서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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