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4 (29) 남산가이(南山可移) =========================================================================
“순리?”
나도 모르게 폭소가 터졌다. 배꼽을 잡고 허리를 굽힐 정도였다. 너무 웃겨서? 아니었다.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분노보다 웃음이 터지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내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을 연달아 겪는 것이 순리란 말인가?
쾅!
있는 힘껏 발로 바닥을 차자 주변으로 황진이 일었다. 깜짝 놀란 시녀들이 아쉬네를 양산으로 가리려 했지만 아쉬네는 팔을 저어 물리친 후 나를 직시했다.
“매우 무례한 행동이지만 당신이 진왕이 확실하다면 하마단은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저마저도 말이지요.”
“설령 내가 진왕이라 해도 내 쪽에서 먼저 거절할 것이다. 거추장스러운 짐 따위를 내가 짊어지리라 생각했나?”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진왕의 탄생은 하마단이 아랍 세계에 새로운 맹주로 떠오를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지금처럼 여기저기 치이는 중소 영주, 아쉬네 입장에선 매우 매력적인 카드라는 말이었다. 단, 진왕의 능력만큼은 진짜여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장소를 옮기죠.”
“싫다면?”
“비밀은 알음알음 알려져 진왕 후보를 자처하는 자들이 제법 찾아왔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왕이 아니었지요. 진왕은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쉬네는 내게 진왕의 증거를 보이라고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진왕은 스스로 깨닫는 자라고 했으니 내가 스스로 정체를 밝힐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준경, 당신의 방문을 기뻐할 사람이 있습니다.”
“나의 방문을 기뻐할 사람?”
이놈의 호기심은 천성인 듯싶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뒤를 쫓아간 곳에서 그를 보자마자 나는 경악했다.
“타티키오스! 비잔틴의 검이 왜 여기에 있지? 죽었다고 알려진 당신이 말이야!”
10년의 세월은 타티키오스의 얼굴에 백발과 주름살을 선사했다. 그는 내가 찾아온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가 진짜로 나라는 것을 확인하자 껄껄 웃으며 격한 포옹을 시도했다. 자초지종은 일단 뒤로 미루기로 했다. 죽었다던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10년 전의 그는 나의 호적수였지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동료이기도 했다.
“자네를 다시 볼 줄은 꿈에도 몰랐군. 알라무트 정상에서 하사신을 처리하고 자네를 찾았지만, 도무지 종적을 찾을 수 없었지.”
“그때 나는 산장로, 하산 사바흐와 두 명의 하사신을 상대했소. 등에 칼을 꽂은 상태로 말이요. 점차 정신을 잃어가던 중에 이대로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고 절벽 아래로 굴렀소. 절벽 중간에 솟은 키 작은 나무들을 이용해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도박은 성공해서 겨우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소. 간신히 몸을 추슬러 알라무트로 다시 가니 인적없는 폐허였소. 나는 당신이 마무리를 지었다고 생각해서 고향으로 향했소.”
“그때 자네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를 이제 알겠군.”
아쉬네는 우리의 해후를 방해하지 않으려는지 슬며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자 한결 편해진 나는 의자에 앉아 본격적으로 그와의 대화에 돌입했다.
“그런데 대체 당신은 여기 왜 있는 겁니까?”
“알라무트 궤멸 이후 비잔틴으로 귀환했지. 황제 폐하는 내가 거둔 성과를 크게 칭찬하셨네. 그러면서 십자군이 날 불편하게 여기기에 한동안 휴식을 취할 것을 명령하셨네. 가족들과도 오랜만에 해후하고 편하게 쉬고 있던 차에 황제 폐하께서 오랜만에 폴로(Polo)를 즐기자고 하셨네.”
“폴로?”
그는 내가 모를 것으로 생각하여 말을 타고 하는 구기 게임의 일종이라고 알려줬지만 나는 그 단어 자체가 의외의 곳에서 나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승마와 하키를 합쳐놓은 듯한 폴로가 비잔틴 귀족 사이에서 상당히 유행하던 여흥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다.
“안나 공주가 지켜보는 가운데 황제 폐하와 폴로를 즐겼지. 청년 시절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즐겼는데, 그때의 감흥이 되살아 난 것 같아 황제 폐하께서는 진정으로 기뻐하셨네.”
알렉시우스 1세는 쇠락하던 비잔틴 제국에 다시 전성기를 불러온 황제로 유명하다. 타티키오스의 활약으로 니케아를 비롯해 지중해 연안의 알짜 영토를 손에 넣었으니 상당히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그때 이야기를 하던 타티키오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게임이 팽팽하게 진행되다 보니 나와 폐하 간 몸싸움이 심해졌네. 그때 말과 말의 머리가 부딪치면서 나와 폐하가 동시에 말에서 떨어지게 되었지. 공교롭게도 폐하의 양 무릎에 내 등이 떨어졌네.”
나는 대번에 그때의 상황이 그려졌다. 타티키오스의 체구는 일반인보다 훨씬 컸다. 그의 육중한 체구가 알렉시우스 1세의 무릎에 떨어졌다면 무릎을 심하게 다쳤을 것이다. 만약 황제에게 장애가 생겼다면 타티키오스가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나에게도 정적들이 있네. 폐하의 총애를 받는 비잔틴의 검이 자신에게 방해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지. 폐하께서 그때 이후 무릎에 통풍이 생겨 평생을 고생할 것이란 진단을 받자 나를 당장 죽여야 한다고 떠들었네. 그것과는 별개로 나 역시도 죽음을 각오했지. 그러나 폐하께옵선 은총을 베푸셨네.”
타티키오스는 어렸을 때 코가 잘리는 형벌을 받아 이후부터 황금가면으로 얼굴을 가리는 습관이 생겼다. 알렉시우스 1세는 타티키오스와 비슷한 체구의 노예에게 타티키오스의 황금가면과 옷을 입히고 죽였다고 했다. 진짜 타티키오스는 황제의 배려로 비잔틴 제국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으로 왔나? 이곳까지 올 이유는 없었지 않은가?”
“비잔틴 주변은 하나같이 위험한 곳이었네. 내가 토벌하러 다니지 않았던 곳이 없기 때문이지. 십자군들이 세운 국가는 더더욱 위험한 것이었고…….”
“고심 끝에 알라무트를 궤멸시켜 우호적인 이곳으로 왔단 말이군.”
“영주는 나에게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주었다. 코가 잘리는 비잔틴식 형벌에 처한 노예가 실력을 인정받아 영주의 안전을 책임지는 호위가 된 것이지.”
과거에 아쉬네가 알라무트의 전횡에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 것은 측근조차 알라무트에 동조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베었으나 이후 알라무트의 재건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쉬네와 타티키오스의 연대는 필연적이라고 볼 수 있다.
“자네야말로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가? 알라무트를 궤멸했다는 소리는 들었네. 호들갑스러운 시녀들이 말해주더군. 일부러 궤멸을 위해 다시 온 것인가? 나도 최근 들어 알라무트가 재건되고 있는 것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지만 호라산의 술탄인 산자르와 알라무트 간 싸움이 격화되면서 이쪽까지는 신경쓸 틈이 없는 것 같더군. 여차하면 산자르를 도와 내가 그동안 이곳에서 키운 기병들을 동원해 알라무트를 다시 쓸어버릴 생각도 하고 있었네.”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를 나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내 설명이 다 끝나고 났을 때, 타티키오스의 표정은 경직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비잔틴과 연관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비잔틴을 떠났지만, 마음 한쪽엔 비잔틴과 황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을 해보는 것 같다가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이것도 인연이군. 만약 자네가 알라무트로 올 생각을 하지 않고 바로 비잔틴으로 향해 내 아들을 만났다면 오히려 낭패를 당했을 거야. 나는 이미 황제를 다치게 한 불충한 신하이니 말이야. 아들은 그러한 꼬리표를 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네. 정적들의 무리한 요구도 받아주고 있는 형편이지. 자네는 도움을 받기보다 오히려 제물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네.”
“그럼 킬리지의 아내와 자식들을 되찾을 방법이 없겠습니까?”
“호라산의 술탄, 산자르가 뜻하지 않게 자네의 도움으로 알라무트를 궤멸시키는 성과를 거뒀네. 가즈나 왕조나 구르 왕조가 산자르의 맹공을 이기지 못하고 복속된 상황에서 동쪽은 평정된 것이나 다름없지. 이제 산자르는 셀주크 제국의 주인을 가리는 내전에 본격적으로 임할 수 있어. 룸 술탄국의 도움까지 받는다면 승산은 더욱 높아지지. 그러나 내가 아는 산자르는 잔인하고 무자비한 술탄일세. 자네의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언제든 죽여도 이상하지 않단 말일세.”
“그럼 제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킬리지 아르슬란과의 의리 때문이라면 자네는 굳이 산자르를 통하지 않아도 되네. 산자르는 큰 것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인물은 아니네. 가까이할 만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지. 우마르가 자네를 산자르에게 데려간 것은 그만이 룸 술탄국을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만 사실 진짜로 룸 술탄국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지.”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다. 타티키오스는 산자르가 대업을 이룰 수 있을지언정 그것을 지속시킬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실제로도 그의 판단은 맞았다.
“대체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비잔틴 제국의 황제 폐하.”
너무나 명쾌한 답이라서 내가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 국력이 쇠락하면서 빼앗겼던 소아시아의 알짜 영토를 되찾으면서 비잔틴 제국은 현시점에서 서양 최강국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도와준다면 못할 일은 없었다. 카노사의 굴욕을 선사했던 교황도 비잔틴 제국의 황제에겐 한 수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뭘 믿고 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겠습니까?”
“나는 지금껏 비잔틴에 관한 정보라면 눈과 귀를 활짝 열어 놓고 있었네. 그러나 개입할 방법이 없었지. 고민하던 와중에 자네가 나타난 거야. 과거 서로를 필요로 했던 것처럼 지금 역시 그러하단 말일세.”
“당신을 대신해 내가 개입하길 바라는 것입니까?”
타티키오스는 산자르를 믿지 말고 자신을 믿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주는 임무를 완수하면 틀림없이 황제의 신임을 받으리라 확신하는 것 같았다. 셀주크 제국의 술탄이냐 비잔틴 제국의 황제냐, 어떤 쪽이 내 행보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야기나 들어봅시다.”
내 말에 타티키오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야기를 듣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이미 반쯤 마음이 이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산자르가 셀주크 제국의 마지막을 불태운 잿빛 황혼이라면 알렉시우스 1세는 콤네누스 황조를 반석 위에 올렸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300년 이상 유지될 이쪽과 손을 잡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에몽을 아는가?”
“보에몽이라면…….”
십자군 중 가장 먼저 알렉시우스 1세에게 교묘한 충성 맹세를 한 보에몽은 십자군이 차지하여 세운 나라 중 안티오키아 공국의 주인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아버지는 알렉시우스 1세의 적이었고, 보에몽 역시도 그런 아버지 밑에서 알렉시우스 1세와 싸웠었다.
이야기를 계속 들으니 그런 보에몽이 알렉시우스 1세의 위협적인 골칫거리로 떠오른 모양이었다.
보에몽은 사실 충성 맹세를 가장 먼저 하긴 했지만, 자신이 점령한 땅을 비잔틴에 돌려준다는 문구를 뺀 맹세였다. 그래서 안티오키아를 함락시키자마자 자신의 영지로 선포했고 이에 항의하는 레몽을 내쫓아버렸다. 고드프루아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사실상 인근 십자군 국가의 맹주처럼 되자 그것을 시기하여 예루살렘의 왕위를 찬탈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니슈멘드 왕조와 전쟁 중 생포되어 그 유명한 보에몽 경매를 당하는 치욕을 맞이한다. 주요 입찰자는 3명으로 충성서약에 대한 배반을 당한 비잔틴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 보에몽과 격렬하게 싸웠던 룸 술탄국의 킬리지 아르슬란, 보에몽 자신이었다. 보에몽은 몸값으로 13만 디나르를 제시하고 다니슈멘드와 협력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킬리지 아르슬란도 그와 비슷하게 13만 디나르에 다니슈멘드 왕조와 조건 없는 군사 협력을 약속했다. 킬리지는 십자군 중 뛰어난 무용을 자랑하는 보에몽을 죽이고 싶었다.
알렉시우스 1세는 둘이 제시한 금액을 다 합친 26만 디나르를 몸값으로 제시하는 화끈함을 보였다. 그는 보에몽을 평생 빛도 없는 감옥에 가둬둘 것이라 공언했다.
우여곡절 끝에 보에몽은 다니슈멘드와의 몸값 협상에 성공하여 풀려났다. 그리고는 알렉시우스 1세와 킬리지 아르슬란에 대한 원한을 불태웠다. 그는 안티오키아를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원체 잘생긴 것으로 유명하던 그인지라 평소 그를 흠모하던 프랑스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프랑스를 끌어들여 비잔틴 제국을 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교황과 프랑스는 비잔틴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으므로 적극적으로 동조하여 수십 만의 반비잔틴 군대가 결성되었고 그들은 현대로 치면 알바니아에 진을 치고 있다고 했다. 그리스를 가로질러 진격하는 모양새다.
한창 힘을 갖출 준비를 하던 비잔틴으로서는 아닌 밤중에 날벼락 같은 사건인 셈이다. 지금 알렉시우스 1세의 모든 이목은 그리스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타티키오스가 무겁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황제 폐하를 도와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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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데로 초고를 올렸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곧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