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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33화 (233/257)

00233  (29) 남산가이(南山可移)  =========================================================================

“착각하지 마라…….”

나는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런 나를 일곱 명 기둥이 막아섰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하산 사바흐는 설마 내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빠르게 일곱 기둥을 공격할 줄은 몰랐는지 경악하고 있었다.

“지금 네놈의 광기는 본래 내 것이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상대로 보여야 할 그것 말이다.”

순식간에 일곱 기둥이 무너졌다. 제대로 싸우면 그들은 지금보다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방심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의 죽음은 악인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였다.

하산 사바흐는 일곱 기둥을 죽여도 나 역시 죽는다는 번민을 유도하고 그 표정을 즐기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일곱 기둥이 스스로 판단하는 것을 막았다. 하산 사바흐의 다음 지시를 기다리게 한 것이다. 그 찰나의 고민이 죽음을 결정했다.

“코레아!”

생애를 살며 수치란 수치는 모두 겪은 것 같은 하산 사바흐의 외침이 실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는 밧줄을 힘차게 잡아당겼다.

나는 그것을 막지 못했다. 하산 사바흐는 황천길 동무가 같이 생겼다는 기쁨인지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내 지금의 상황이 어떠한지를 파악할 때쯤 나는 이미 재빠르게 움직여 그의 멱살을 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친 다음이었다.

그가 잡고 있는 것은 분명히 밧줄이었다. 그러나 그 밧줄은 중간 부분이 끊겨 있었다. 내가 던진 칼이 밧줄을 끊어냈기 때문이다. 단정홍의 가호라도 받았던 것일까? 도박 같은 한 수였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실패하리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내가 성장했다는 것일까?

나는 정신을 잃은 하산 사바흐의 멱살을 잡아 질질 끌며 밖으로 나왔다. 마지막 접전이 한창인 알라무트 정상이 나와 하산 사바흐의 등장에 일순간 조용해졌다.

“자살을 유도하는 언행을 하거나, 범죄, 방화, 살인하는 자는 이슬람이 아니다. 네놈이 그토록 신봉하는 쿠란의 말씀이다.”

“커헉!”

나는 칼을 들어 하산 사바흐의 어깻죽지를 내리쳤다. 정신을 잃었던 하산 사바흐는 고통에 마치 물고기가 펄떡거리듯 꿈틀거리며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쿠란은 선제공격을 불의라고 말한다. 원한을 쌓은 상대에겐 보상해줘서 그 원한을 푸는 것이 이슬람이라고 말한다. 모든 인류는 알라의 가족이고 아담의 후예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아는 이슬람이다. 여기엔 수니파도 시아파도 예외는 없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 칼을 들어 힘차게 남은 어깻죽지를 내리쳤다. 두 팔이 사라진 하산 사바흐는 꿈틀거리며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상처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놈은 모슬렘인가?”

피를 머금은 칼이 하사신들을 가리켰다.

“네놈들은 모슬렘인가?”

그들을 대신해 하산 사바흐가 피 끓는 소리로 외쳤다.

“죽…여, 다, 죽여!”

주술처럼 외치는 그의 말에 하사신들은 죽음을 도외시하고 불리한 전투를 재개했다. 세뇌와 마약으로 키워진 집단다웠다. 그래서 그 근원이 사라져야 했다. 암살자가 세력을 이루는 것은 이곳이 이미 비정상적인 사회라는 뜻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루고 만다는 신념이 과연 종교적인 신념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무시해도 되는가? 그것을 신이 좋아할 거란 해석이야말로 후안무치의 극치다. 이 모든 것은 신이 아닌 ‘그’ 누군가가 원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다시 칼을 휘둘러 그의 양쪽 무릎을 잘라냈다. 쇼크사와 과다출혈로 죽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나는 방금도 하사신 한 명의 목을 치며 쾌활하게 웃고 있는 산자르를 향해 소리쳤다.

“대마초를 찾았나!”

하사신의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들자 산자르는 더는 자신이 할 일이 없다고 여긴 듯 내 쪽으로 다가왔다.

“찾았지. 이곳을 떠나며 모두 불태워버릴 작정이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해야 할 일?”

산자르는 갸웃했으나 내가 시선을 하산 사바흐에게 돌리자 뭔가 재미있는 일을 기대하는 듯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외쳤다.

“이 망할 놈에 대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그의 명령에 따라 금세 주먹만 한 종이 포장에 둘러싸인 대마 가루가 전달되었다. 나는 그사이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 하사신 한 명을 포로로 잡았다.

“나는 궁금했다. 세뇌가 더 강한지 중독이 더 강한지 말이야. 이제 그걸 알 수 있겠지.”

대마초에 불을 붙였다. 뭉개 피어오른 연기가 곧 하산 사바흐와 하사신을 감쌌다. 점차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느낀 하산 사바흐는 이따위 치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듯 혀를 깨물려고 했지만, 사지가 끊어지고 과다 출혈이 이어지면서 제대로 혀를 깨물 힘마저 잃어버린 상태였다.

사실 대마초 연기는 단기간에 중독 현상을 끌어내기 어렵다. 현대인의 시각에선 담배보다 중독이 미미한 수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인과 지금 사람의 저항력이 같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의 대마초엔 대마초만이 아닌 환각을 돋우는 재료가 더 첨가된 것 같았다. 하사신은 벌써 쾌락적인 환각에 빠졌는지 허우적대고 있었다.

하사신 대부분은 종교적인 신념이 투철하기보다는 알라무트가 쾌락과 부를 선사하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다. 목숨을 건 충성을 받아내기 위해 하산 사바흐는 마약과 미녀, 금을 적절하게 썼다는 것이다.

젊은 하사신에게 있어 그중 마약과 미녀는 빼놓을 수 없는 쾌락의 요소였던 만큼 환각 역시 그와 유사한 장면이 연출될 수밖에 없었다.

하사신의 손길이 곁에 있던 하산 사바흐를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하산 사바흐는 대마초로 말미암아 고통을 경감하고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해 이성을 찾으려는 찰나 하사신의 손길이 닥쳐오자 표정이 거뭇하게 변했다. 자신이 누구라고 밝히고자 했지만 반쯤 깨문 혓바닥은 발음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하산 사바흐의 눈길이 나를 향했다. 그의 눈은 원독으로 가득하였다. 죽어서 원귀가 되어 나를 저주하겠다는 내면의 외침이 들렸다. 그러나 나는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이미 네놈은 하람을 범했다. 자살을 시도한 자, 남자와 정을 통한 자, 이곳에 모인 모두가 증인이다. 시아파도 네놈을 버릴 것이다.”

하산 사바흐의 눈이 떨렸다. 그리고 곧 그의 얼굴 위로 하사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행위가 이어지든 이어지지 않든 이미 그는 이슬람의 율법대로라면 파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는 이슬람의 황당한 율법 사례를 현대에서 접하면서 그들의 율법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근본주의는 중세의 유산이 아니라 근대의 창조물이라는 시각이 있다. 아직은 꽤 낙관적인 인간관에 기초한 율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 율법을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첫 사례가 내 생각엔 바로 이들, 하사신이었다.

현대 시리아의 IS 무장 세력의 정신적 시초라고 해야 할까? 스스로 신의 심판석에 앉아 다른 인간의 선과 악, 생과 사를 심판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매우 악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알라무트는 산자르를 통해 미치광이들의 소굴로 알려질 것이며 얼마나 많은 율법을 어겼는지 낱낱이 공개될 것이다. 시아파의 부흥을 위한 헌신적인 선지자가 아니라 악랄하고 반사회적인 광기에 젖은 배덕자로 찍혀 악명의 대명사가 될 것이다.

자매의 복수를 통쾌하게 했음에도 산에서 내려오는 내내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래서 복수는 더러운 것이다. 그런데도 해야만 했다. 자연적인 하늘의 징벌? 내가 손을 쓰지 않았다면 몽골군이 이곳에 다다를 때까지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며 심판 놀이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내가 개입된 역사에서 몽골군이 발호할지 안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까지 손 놓아 버린다는 것은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방기(放棄)였다.

하산 사바흐와 알라무트가 통째로 소실 된 이상 하사신은 정신적 지주와 근거지를 모두 잃은 셈이다. 파티마 왕조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다가 사라질 운명이 될 것이다.

앞으로 십자군의 사정 또한 어려워질 것이다. 대게 십자군과 싸우는 아랍의 영주들은 수니파가 다수였다. 하사신은 십자군과 때때로 손을 잡아 반대파를 암살함으로써 힘의 균형을 맞췄는데, 살라딘 역시 그러한 암습을 여러 차례 받은 것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그런 것만 보면 정치적 신념이라는 것이 종교적 신념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조마저 들 때가 있다.

그래도 나비효과처럼 십자군의 이른 후퇴가 유럽사를 어떻게 바꿀지 기대하는 마음 역시 자리했다.

산자르는 신이 났다. 눈엣가시 같던 알라무트가 이토록 쉽게 궤멸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동부에서 걸리적거릴만한 것은 없다며 셀주크 제국 술탄의 자리에 한발 다가갔다고 공언했다. 그는 바그다드로 돌아가자마자 연회를 베풀어 이번 전투에 참가한 모두를 포상하겠다고 밝혔다. 나에게도 비잔틴으로 떠나는 것을 잠시 미루고서라도 꼭 연회에 참석해 그 이름을 알리고 치하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를 추켜세워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산자르에게도 매우 중요한 이벤트가 될 터였다. 수니파끼리 왕권을 다투다 보면 제일 좋은 흑색 선전이 상대가 시아파라고 매도하는 것이었는데 정통성이 부족한 산자르 역시 상대에게서 그런 소리를 듣곤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산자르가 세력을 키우기 위해 수니파, 시아파, 혹은 타 종교의 용병까지도 제한 없이 받아들이면서 자초한 일이긴 했다. 실제로 말년쯤 가면 그런 용병들에게 배신당하는 일도 겪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번 일로 마힐셀렘이라는 강력한 우군이 있음을 과시했고 시아파 선지자 중 가장 호전적이라는 하산 사바흐를 처리함으로써 자신이 시아파라는 누명을 벗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니 연신 나에게 다가와 무엇을 바라느냐고 물었다.

나는 가는 길에 하마단을 들렀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하마단이라는 말에 묘한 기색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개선하는 길이니 하루쯤 편하게 쉬어도 될 것이라며 쾌히 승낙했다.

하마단은 여전히 독립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러한 독립이 인근에 새로운 강국이 생길 때마다 복속을 선택함으로써 얻어지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독립이었다. 산자르는 하마단이 이제 자신의 소유나 다를 바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하마단의 성문은 미리 달려간 전령으로 말미암아 활짝 열려 있었다. 급하게 준비된 인파는 왕의 귀환을 환영이라도 하듯 허공에 꽃을 흩날렸다.

나는 과거를 떠올렸다. 하마단의 영주를 보고 멍하니 서 있자 타티키오스가 강제로 머리를 조아리는 것으로 처음 만났다. 그때는 가진 것이라곤 오로지 몸 하나뿐이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정 반대의 상황이었다.

이번엔 그녀가 먼저 산자르에게 머리를 숙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산자르는 그녀의 몸매를 훑으며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과연 듣던 대로 절색이군. 품을 수 없는 꽃이라서 더 탐나기도 하고.”

하마단 영주의 가녀린 어깨가 꿈틀거렸다. 모욕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내 그녀는 웃으며 산자르에게 말했다.

“제가 왜 품을 수 없는 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말에 가시가 있군. 왕의 도시를 지키는 자는 진왕이 재림하지 않는 이상 성결(聖潔)을 유지해야 하지.”

그러면서 두 손을 뻗쳐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성결을 범한 자, 저주를 받으리라!”

그리고는 하마단 영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나를 잘 안다. 나는 아직 진왕이 되지 못했다. 찜찜한 저주는 사양하도록 하지.”

산자르는 마치 자신의 집에 온 것처럼 그녀를 지나쳐 거침없이 앞장섰다. 시종들이 쩔쩔매며 그를 안내하는 사이 하마단 영주를 향해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쉬네 하마단 아르타바누스 리.”

그녀의 눈빛이 다시 흔들렸다.

“그때 나는 왜 나였느냐고 물었다.”

“그때의 그대와 지금의 그대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여겨질 정도로 다르군요.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사람이라고 제 예감이 말하고 있어요.”

“그때 당신은 내게 책을 한 권 내밀었지. 나는 책을 펼쳐서 읽었지만, 까막눈이었던 까닭에 멀뚱멀뚱 책을 보는 척만 했다. 이제 생각하면 그 책을 보여준 것은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어.”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경이란 무인이 진왕의 재생이 아닌가 싶었지요. 그러나 당신은 글을 읽지 못했고, 내가 말해준 이야기들에 대해서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죠. 우리의 인연은 그때 끝인 줄 알았습니다.”

“만약 내가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면?”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모래바람이 일었다. 시종들이 양산으로 순식간에 그녀를 감싸는 바람에 그녀의 표정을 알 수 없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모래바람이 물러났고 그녀의 눈이 빛났다.

“순리를 되찾겠지요.”

============================ 작품 후기 ============================

수요일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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