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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32화 (232/257)

00232  (29) 남산가이(南山可移)  =========================================================================

하렘이라니? 이곳에서는 그것을 대단하게 쳐줄지 몰라도 나는 관심도 없고 소용도 없었다. 어쨌거나 산자르가 백지수표를 주겠다는 말이었으니 나는 사양치 않기로 했다.

“가장 빠른 말을 빌려줄 수 있겠는가?”

“그거라면 내 아할테케를 빌려주도록 하지. 중국에서는 한혈마(汗血馬)라고 부르던가?”

아할테케 혹은 한혈마로 부르는 명마가 이란 북쪽 투르크메니스탄이 원산지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호전적인 이란의 지배자 산자르가 한혈마를 몇십 마리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닌 셈이다.

산자르는 내가 비잔틴 제국으로 향할 준비를 끝마쳐놓은 듯했다.

“한혈마가 하루에 일천 리를 간다는 말이 사실인가?”

“물론이다. 내 소유의 아할테케는 그 이상이지.”

뛰어난 말과 낙타를 가진 것은 아랍인에게 있어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산자르는 자신의 것이 아랍 최고라는 말을 여러 차례 내뱉을 정도로 자신감을 드러냈다.

“비잔틴으로의 출발은 나흘 뒤로 했으면 한다.”

“먼 길을 온 귀한 손님이니 못해도 열흘은 연회를 열고자 했다. 한데 쉬지도 않고 대체 어디로 갈 셈이지?”

산자르가 언급한 열흘의 시간은 내가 제안을 거부했을 경우 회유의 시간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순수하게 생각하면 먼 뱃길에 지쳐 있을 일행에 대한 배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의 시간도 아까웠다.

“알라무트.”

“알라무트! 독수리의 둥지로 갈 셈인가!”

산자르가 놀라운 표정으로 외쳤다. 주변 역시 동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시아파의 하사신이 그곳에 다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몇 차례 토벌대를 보내 알라무트를 공격했고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번번이 부활하여 훼방 놓고 있다. 빌어먹을 파티마 놈들이 돕고 있기 때문이지. 그런 곳을 혼자서 가겠다고?”

알라무트의 요새는 독수리의 둥지라고 불릴 정도로 해발 2,100미터 고산 정상에 자리했다. 알라무트라는 지명 자체가 고산의 이름을 딴 것이다.

‘산자르는 눈엣가시였던 알라무트를 재위 기간 중 계속해서 공격했으나 폐허로 만들겠다는 공언을 지키지는 못했다. 일시적인 승리를 얻기도 했으나 파티마 왕조의 도움을 얻은 하사신들이 잡초처럼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이런 알라무트를 폐허로 만든 유일한 인물은 홀라구.’

몽골군이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그 길목에 자리하고 있던 알라무트도 공격 대상이 되었다. 당시 하사신 지도자가 판단할 때 종교적 신념으로도 몽골군은 도무지 대항하지 못할 악마였다. 그래서 항복을 선언했지만 홀라구는 기병에 불리한 고산 요새를 배후에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항복 선언을 받아 알라무트에 입성하자마자 모두 불태워 폐허로 만들고 하사신을 학살해버렸다.

‘그러나 이제 알라무트를 폐허로 만드는 첫 번째 인물은 홀라구가 아니다.’

내가 갈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나였다면 굳이 무리하려고 하지 않았겠지만, 기억을 되찾기 전 척준경의 분노가 너무 컸던 것일까? 자매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완전히 종결하기 위해서라도 알라무트와의 악연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다른 어떤 것보다 앞섰다.

차분하게 생각하면 알라무트를 단신으로 정복한다는 것은 마힐셀렘의 귀환을 알리는 행위이기도 했다. 10년 전 나를 상대했던 십자군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무엇보다 알라무트로 향하는 길에 하마단이 있었다. 하마단에서 꼭 확인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지금껏 킬리지 아르슬란이야 말로 나와 견줄 용맹한 사자라고 생각했으나 오늘 한 명이 더 추가되겠군. 10년 전, 알라무트를 발칵 뒤집어 놓은 자는 바로 자네겠지?”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산자르보다 주변인들이 더욱 놀라워했다. 마힐셀렘이란 별명은 알라무트에서 죽음의 위기를 넘긴 후 고려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에서 붙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하사신들은 고려인과 비잔틴의 검, 그 외 세력에게 당한 것을 치욕으로 여겨 함구령을 내렸을 것이지만 알음알음 흘러나와 정체불명의 괴인에게 크게 당했다는 정도로 알려졌을 것이다.

산자르 정도 되면 갖가지 방법을 통해 나에 대한 정보를 구했을 것이니 내가 그때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추정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보자마자 실력을 검증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겐 일당백을 자랑하는 일천의 친위대가 있지만, 홀로 알라무트를 치겠다고 말하는 놈은 없었지. 나 역시도 말이야. 인세의 사신이 있다면 바로 알라무트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니까.”

“내가 갔다가 그만 죽어버려서 킬리지의 가족을 구하지 못할까 걱정되는가?”

내 질문에 산자르는 껄껄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머리는 불가능하다고, 말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심장은 정 반대의 말을 하는군. 지금 내 심장 소리가 얼마나 빠르게 뛰고 있는지 들리는가?”

산자르는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당장 친위대를 소집하라! 내가 친히 알라무트로 향할 것이다!”

“호라산의 술탄이시여!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차라리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본거지를 벗어난다는 것은 하사신의 암습에 언제든 노출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하니 주변의 신하들이 깜짝 놀라 펄펄 뛰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산자르는 두 팔을 휘저으며 모두의 반발을 잠재운 후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나는 너희 중 마힐셀렘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도 반신반의했다. 사람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만약 마힐셀렘이 가능하다면!”

산자르의 눈이 이글거렸다.

“나 역시도 가능하다. 셀주크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는 것이다!”

주변은 호흡 소리도 멈출 정도로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이복형인 정통 후계자에 반발해 내전을 촉발한 동복 형을 돕는 조역으로 최근 몇 년간을 살았다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야망을 드러냈다. 실제로도 폭풍처럼 몰아쳐서 그것을 해냈으니 무모한 패기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파티마 왕조 따위가 감히 넘보지 못할 전 아랍의 진정한 술탄이 될 수 있을 것인지 그 운을 시험해보고자 한다! 인세에 사신을 베는 자가 있다면 아랍의 왕이 되는 길이 그보다 어렵다는 생각은 추후도 들지 않는다! 어서 준비하라! 알라무트로 향하겠다!”

일이 묘하게 진행되었다. 산자르가 설마 나를 따라나설 것이란 생각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가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며칠간 귀찮아질 것은 틀림없었다.

산자르의 권위는 주로 무자비함에서 나왔다. 그의 명령을 반대하려던 신하들은 더는 조언할 생각을 버리고 산자르의 명령을 신속하게 이루고자 바삐 움직였다.

일천 명이 모여서 알라무트를 향해 달리기 시작하자 장관이 펼쳐졌다. 산자르가 내 곁에 바짝 붙어 외쳤다.

“좋은 기회를 주었다. 하사신의 밀정들이 알라무트에 알릴 시간이 없을 것이다.”

나는 산자르가 다시 보였다. 그는 애초부터 나를 이용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갑자기, 그것도 아랍에서 가장 빠른 말을 타는 집단보다 밀정이 알라무트에 먼저 다다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전서구 같은 것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곳에 그런 것은 없었다.

중간 지점인 하마단도 외곽을 따라 단숨에 지나쳤다. 하마단에서 확인할 것이 있던 나로서는 돌아올 때를 기약해야 했다.

알라무트의 위용이 멀리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죽음의 위기를 맛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때의 어설픈 내가 아니었다. 이번엔 완전하게 결판을 낼 것이다.

산자르의 계속된 견제를 받은 알라무트는 방비를 단단히 할 시간이 매번 부족했다. 그것은 즉,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건물 구조나 배치에 대해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알라무트가 대대적으로 요새를 축성하고 보강하는 것은 산자르 사후부터인데 몽골군에게 항복하면서 별 의미 없는 노력이 되고 말았다.

“크헉!”

내 손에 쥔 마힐셀렘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한 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해발 2,100m의 알라무트 정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은 일방적이었다.

하사신은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마다 수십 명으로도 수비할 수 있는 요새를 여럿 건설하여 외부 침입자를 막고자 했지만 나라는 사람 단 한 명을 막지 못했다. 10년 전 상대했던 그들보다 훨씬 약했기 때문이다. 견제를 받아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전력 자체는 예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데 내가 강해져서였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뒤따르던 산자르가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두 손을 번쩍 들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나와라! 하산 사바흐!”

산 정상, 요새의 연무장에서 나에게 덤벼든 하사신을 모두 처리하고 소리쳤다. 하산 사바흐는 알라무트와 하사신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초창기 잘나갈 때는 알라무트 일대를 시아파 국가로 선언하며 니자리 이스마일국이라는 이름까지 붙이기도 했었다. 시아파에 속하는 이스마일 중 니자리 일파들의 나라라는 뜻이다. 대부분이 하사신이니 세계 최초의 암살자 국가가 되는 셈이다.

하산 사바흐는 해와 달 군대를 만들었다. 해는 페다인이라고 하여 정규 군대를 가리키고, 달은 하사신, 즉 어쌔신이다.

여기저기서 칼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끊이지 않는 것은 페다인과 산자르의 친위군이 격전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기시감이 들었다. 타티키오스와 함께 싸웠던 10년 전의 그 날과 똑같은 양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요새 깊숙이 들어갔다. 이미 한 번 와봤던 길이었기에 중간중간 함정 발동도 금세 알아챘다. 아마 기관을 발동하는 입장에서는 깜짝 놀랐을 것이다.

나는 당시에 하산 사바흐를 처리하지 못했다. 이번에야말로 실수 없이 처리하여 자매의 원한을 갚으리라 맹세했다.

심처로 진입할수록 쿠란을 읊는 소리가 점차 크게 들렸다. 그곳에 다다르자 일곱 명의 사내가 건장한 체구의 노인 한 명을 감싸고 있었다.

눈을 감고 쿠란을 암송하던 노인은 내 발소리를 들었는지 돌연 암송을 멈추고 눈을 떠 나를 바라보았다.

“코레아로구나.”

“하산 사바흐, 다시 만났구나.”

알라무트의 비원은 낙원과도 같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본 비원은 낙원이 아니라 삭막한 광장이었다. 대마초를 피우며 환각에 젖은 미치광이들만 아니라면 말이다. 당시에 나는 하산 사바흐의 목에 칼을 겨눴다. 그 사이 뒤에서 암습을 받아 나는 생사가 경각에 달린 가운데 탈출을 해야 했다.

“코레아, 그때 널 확실하게 죽였어야 했다.”

“나도 후회하고 있다.”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네놈의 미치광이 짓 때문에 내 아내가 죽었다.”

“아내? ……그랬었군.”

하산 사바흐는 내가 왜 그토록 맹목적으로 하사신 궤멸에 나섰는지 알 것 같다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그는 자신을 호위하듯 둘러싼 일곱 명의 사내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코레아 네놈이 사라진 후, 나는 정규군인 페다인을 만든 것을 후회했다. 나라를 만들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욕심 때문이었지. 쭉정이는 아무리 많아야 쭉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대마초에 찌든 이놈들이 대안이라도 된단 말인가?”

무표정하던 일곱 사내의 눈빛에 분노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대마초를 이용해 두려움을 없앤 하사신과 전혀 다르다는 자부심이 엿보였다. 나는 일곱이라는 숫자에서 한 가지를 떠올렸다.

“이스마일파의 일곱 기둥이로군.”

이스마일파가 지켜야 할 규율을 일곱 기둥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런지 뛰어난 전사들을 가리킬 때 유독 일곱 명을 선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는 것은 예전보다 하사신의 양성 숫자를 늘리는 데 초점을 두지 않고 강한 소수의 전사를 탄생시키는 데 매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 봐야 네놈들은 쓰레기 같은 암살자라는 것에 변함없다.”

“금지된 것을 말하고 행하면 알라의 벌을 받는다. 네놈은 하람이다.”

하람은 이슬람에서 금지하는 돼지고기나 음주 같은 것을 하는 행위를 말한다. 시아파에선 종교 지도자(이맘)의 말이 곧 신의 말과 똑같은 것으로 해석되어 축복과 저주가 모두 그의 입에 달렸다.

하산 사바흐의 입에서 하람이란 말이 흘러나오자 일곱 명의 사내가 나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네놈도 배교자 산자르도 알라무트의 징벌을 받을 것이다. 그것이 알라의 명령이다.”

하산 사바흐의 음성은 단호했다. 지금 본인들이 불리한 상황인데 믿을 구석이 있단 말인가? 나는 그가 알라무트의 징벌이라고 말한 것을 떠올렸다. 자신이 죽을 것을 각오하고 알라무트 요새를 붕괴시킨다면?

자신의 최후를 잠재적인 대적과 맞바꾸는 것이다. 하사신의 기원이 이곳이긴 하지만 양성 기관은 이제 이곳만 있지 않았다. 카이로의 파티마 왕조가 있지 않은가?

어느새 하산 사바흐는 뒤로 물러나 벽 뒤에 숨겨졌던 밧줄 하나를 잡았다. 밧줄의 굵기를 보아하니 잡아당긴다고 요새 전체가 붕괴할 것 같지는 않았고 어딘가에 신호를 주기 위한 수단 같았다. 그러나 잡고만 있을 뿐 당기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그의 심리를 이해했다.

그는 지금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 심혈을 다해 키워낸 일곱 명의 암살자가 나를 죽일 수 있는지 말이다. 내가 그에게 자매를 잃은 원한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기반을 거의 날린 원한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눈은 종교인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광기가 어려있었다.

============================ 작품 후기 ============================

월요일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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