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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30화 (230/257)

00230  (29) 남산가이(南山可移)  =========================================================================

장상영은 한인 관료들에게 미칠 파장이 어디까지 갈지 내심 고민해보는 듯하다가 힘겹게 말문을 뗐다.

“묘족을 우대하면 자칫 장족(壯族)의 반발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건 어찌하시렵니까?”

복건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현대 중국에서도 최대 숫자를 자랑하는 소수민족은 단연 장족이다. 쉽게 말해 삼국지 시절 산월을 가리킨다. 그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송나라 지방관의 횡포에 대항하여 ‘농지고(?智高)의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자신들만의 국가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체계적이지 못해서 송에게 토벌당하고 자립의 의지가 꺾인다.

그런 장족이 내 등장에 새로운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고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었다. 문신은 한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을지 몰라도 장수나 병사 구성은 장족이 다수였다.

지금까지는 왕후를 맞이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에 한인 외에 선택지가 없어 가만히 있었다면, 묘족 왕후를 표면화하는 순간 장족이 우리에게도 기회를 달라며 주장할 가능성이 크고 그것이 불화로 이어질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사실 장족은 춘추전국시대에 월국을 세워 중원 문명과 교류한 특성답게 한족과 가장 유사한 농경 문화를 가지고 있다. 한문에 대한 이해도 높아서 남송 이후는 장족이 유명 문인으로 활동한 사례가 많다.

“일찍이 해남도의 묘족을 아내로 맞이하여 그들과 인연이 깊습니다. 그들은 짐이 아내를 잃고 복수에 불탔을 때 목숨을 걸고 송군과 회족에 함께 대항했습니다. 그러하니 보은을 하지 않는다면 어찌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이유를 잘 설명한다면 기꺼이 장족도 수긍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한족 왕후를 맞이하여 있을 수 있는 폐해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그와 더불어 짐은 그들 모두를 하나로 묶을 좋은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대체 그것이 무엇입니까?”

신생국 입장에서 백성에게 일체감을 가지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고대의 제천의식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일체감을 조성하는 중요한 행사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매년 노래와 춤을 겨루고 즐기는 경연을 열고자 합니다.”

“노래와 춤?”

장상영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아마 그는 궁중악무(宮中樂舞)를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호혜였던 시혜였던 어쨌거나 국제적인 교류를 했던 당나라가 다양하고 화려한 궁중악무를 자랑했다면 송 대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퇴보라는 말이 걸맞을 정도로 정형화되었다.

호인(胡人, 이민족)의 음악과 춤에도 대체로 관대했고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했던 당과 달리 이민족에 시달리던 송은 달갑지 않게 생각했고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웅장하고 힘찬 느낌보다는 점점 우아하고 평온한 풍으로 굳어진 것이다. 성질이 급하면 답답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말이다.

반면 장족과 묘족 같은 소수민족들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활기를 돋우는 노래와 춤이 유행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장족은 노래로써 말을 대신하고 노래로써 감정을 전한다고 할 정도로 노래와 춤이 생활화된 민족이었는데 그래서 노래 경연 대회를 축제처럼 이미 성대하게 열고 있었다. 참가자가 많을 때는 만 명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묘족 역시 노래를 좋아하기로는 만만치 않다. 자매가 선지교에서 불렀던 노래와 춤은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남부에 살던 민족들의 특성인지는 몰라도 삼월삼(三月三)이라고 하여 음력 3월 3일엔 노래를 부르고, 체육 행사도 열면서 조상에 대한 공경도 겸하는 축제가 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가무와 힘을 상징하는 치우를 모시던 민족들의 특성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나는 그걸 다 믿지 않지만,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공통점이 있으니 부족별로 지내던 행사를 국가 차원에서 성대하게 치른다는 것은 협의를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한번 시작하기가 어렵지 해를 거듭할수록 그 경쟁이 순기능이 작용할 것으로 나는 확신했다.

그리고 그것은 송이 남부 부족들을 상대로 효과적으로 써먹고 있는 숙묘(熟苗) 정책을 부수는 것이기도 했다.

숙묘 정책은 요가 숙여진으로 생여진을 치는 것과 같은 정책이었다. 한화(漢化)되고 교화된 묘족을 토호로 임명하여 그들이 송에 불만을 품은 묘족들을 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이이제이 정책은 비단 송과 요만 했던 것이 아니라 이후, 명과 청도 계속 써먹을 정도로 효과적인 분열 정책임이 드러났다. 그러다 점차 한족에게 터전까지 내주고 끝내 중화를 선택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함으로 나의 정책 목표는 숙묘를 생묘로 바꾸는 일이 우선이었다. 중화의 정치적, 문화적 지배에 대한 저항의식을 심어주고 그들과 자신들의 수준에 고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며 그 다름이 정체성을 위해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심어주는 것이다. 애향심을 처음에 떠올렸던 것도 비슷한 생각에서 출발했다.

장상영은 내 의지가 확고한 것을 보고 결국 따르기로 했는지 깊게 읍을 했다.

“전하의 성심을 온 힘을 다해 대소신료에게 전하여 뜻을 하나로 모으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전하를 뵌 김에 인재를 한 명 천거해도 되겠나이까?”

장상영이 추천하는 인재라면 언제나 환영이었다. 양시까지 온 마당에 대체 누구 또 있나 싶어 나는 그 인재의 정체를 재촉했다.

“미주(眉州) 단릉(丹稜) 사람으로 당경(唐庚)이라 합니다.”

“설마 자서(子西) 박사를 말함이오?”

인재를 권하고 만날 때마다 내가 아는 척을 하며 놀랍고 기뻐하는 표정을 보는 것이 대신들에게는 무척 신선한 반응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아는 이름이 나오면 마치 연예인을 보는 심정으로 열렬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내 천성인 것 같다. 가볍게 보인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고사를 이들에게 절로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선비 맞이하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좋아하는 군주라는 이미지가 주는 위력은 이미 과거에도 경험한 바가 있었다.

지금도 장상영은 호들갑스러운 내 반응에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경정도면 내가 호들갑스러울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는 장상영과 동향 사람으로 진사 급제 이후부터 장상영의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그렇다면 장상영이 그저 동향 사람이라고 그를 챙겼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성정이나 기질이 비슷하면서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손발이 잘 맞는 사이라고 할까?

장상영보다 뛰어난 재주가 당경에게 있으니 그의 별명만 들어도 대번에 알 수 있다. ‘소동파(小東坡)’, 즉, 작은 동파 선생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뛰어난 문장가였다.

장상영이 채경 일파에게 밀려나면서 장상영의 수족으로 인정받고 있던 당경 역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그가 귀양을 간 곳이 바로 혜주라고 했다. 소동파(蘇東坡)가 한때 이곳으로 귀양 갔다가 해남도로 옮겨지면서 나와 인연을 맺었다. 혜주는 광동성을 가리키는 것이니 이미 내 영역에 속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송의 지방관들이 겁이 나서 모두 철수한 상황에서 그는 귀양이 풀린 상황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여전히 그곳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 귀양을 풀고 장상영을 찾기보다 장상영이 나에게 허락을 구해 인재를 초빙하는 예우를 갖추면 그는 다시금 명성을 확인하게 될 것이고 나는 선비를 지극히 예우하는 군주로 기억될 것이다.

물론 그런 계산이 아니더라도 나로선 인재가 온다면 버선발로 뛰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게 당경의 영입 문제까지 처리되자 장상영은 다시 읍을 하며 말했다.

“선비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어진 성군의 모습을 변함없이 보여주시어 신은 감읍하나이다. 또한, 이 자리를 빌려 ‘호법론’의 배포를 허락해주신 것 또한 감읍하나이다.”

조정에서 대신들과 여러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 호법론은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를 시켰는데 그는 그것을 무척 고맙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긴 그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받은 것이니 기쁠 법도 하다.

북송까진 아직 유교가 교조화된 것은 아니지만, 주류 학문인 것은 틀림없었다. 도교 역시 만만치 않은 식자층을 확보했다. 반면에 불교는 인도에서 온 외래 학문 정도로 인식되어 유교와 도교 양쪽의 공격을 받았다.

장상영은 불교에서 배울만한 좋은 점을 유학과 도학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저서를 냈으니 그게 바로 호법론이다. 바른 정치를 위해서는 정통을 따지는 것보다 좋은 것이 있으면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낫다는 의견을 피력한 셈이다.

사실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이긴 한데 그는 일전에 나도 만난 적이 있는 임제종 황룡파에서 불교 공부를 했다는 과거 때문에 발목이 잡혔다. 채경 일파가 그를 몰아내기 위해 주장한 것 중 하나가 유교를 버리고 불교를 송의 중심 사상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말도 되지 않지만 고루한 유학자들은 채경의 손을 들었다.

나에겐 오히려 감사할 일이다. 그 덕분에 역사에 남은 현신을 얻었으니 말이다.

장상영이 물러났다. 물러나는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내 제안 때문에 잠시 대신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있긴 하겠지만, 그는 내 뜻을 잘 대변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날 저녁 나는 이소의 핀잔을 원 없이 들었다. 혼인이란 중대사를 잠깐이라도 자신과 상의했어야 한다는 서운함이었다.

나는 그날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그녀가 진짜 원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꾸는 꿈을 그녀가 진정으로 원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아내들에 대한 미안함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영원을 기약해도 모자랄 것 같았다.

다음 날, 나는 포면을 찾아갔다. 포면을 강주에서 구출한 이후, 나는 호표의 주술에 걸린 수호전의 망나니들, 이규와 번서를 개봉으로 보내 포씨 일가를 무사히 모셔올 것을 명령했다. 그들은 공손승이 내린 호표의 저주를 풀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포면을 지극히 존경하는 모습 역시 역력해서 필사적으로 임무에 매달려 성공했다고 했다. 그들이 귀환했을 때는 여방과 무송, 노지심도 함께였다.

예전 증가 가주의 사주를 받고 이규, 번서 등과 함께 나를 공격했던 그들은 양산박으로 도망쳤지만 이미 양산박을 장악한 혼강룡 이준에게 거꾸로 설득당해 포씨 일가를 구하는 임무에 참가하게 되었다.

평소 포씨 일가에 대한 존경심이 있기도 했던 그들이라 동행하던 중에 의기가 치솟았고 이준의 설득까지 더해져 나의 수하가 되길 자청했다는 것이다.

포씨 일가의 구출은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져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수호전의 호걸 중 나에게 속한 이들 외에도 인연과 우연으로 여러 사람이 참가한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10년 전 기억을 되찾기 전에 만났던 구문룡 사진이나 완소이, 완소오, 완소칠 형제, 삽시호 뇌횡 등이 참가했고, 금창수 서령이나 급선봉 삭초, 박천조 이응, 소선풍 시진 등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양산박은 복주로 옮겨졌고 포면 대인이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우두머리라고 하니까 뭔가 불량스럽게 들리지만 한 마디로 경찰과 교도소 교화 임무를 하나로 합친 듯한 기구의 탄생이었다. 포면의 명성과 권위는 수호전의 망나니들도 감히 대들지 못할 정도로 절대적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때때로 공손승도 나타나 그들의 흉성을 타일렀다.

나는 그들을 보며 요와 최접경인 북경 대명부에서 송을 지키느라 밤낮으로 고심하고 있을 옥기린 노준의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을 낭자 연청도 말이다. 만약 노준의를 만나는 날이 온다면 그날이 바로 천하제일인을 가리는 날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내가 포면을 만나 해남도로 가서 묘족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것을 이야기하자 포면은 한동안 옛 기억을 떠올리는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차가 다 식은 후에야 그가 꺼낸 말은 한마디였다.

“동파 선생이 살아계셨다면 잘했다고 칭찬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지쳤다며 양산박을 안정시키면 아들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양시, 당경 등과 시서화를 즐기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그러나 아직은 어림없다. 내가 없는 동안 그가 중심을 잡는다면 내부적으로 혼란이 일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석보를 비롯한 장수들은 나의 신위와 성정에 감복하여 절대적인 충성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일부 내가 알지 못하는 세력의 준동 정도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었지만 사람 일이란 혹시 모르는 것이니 대비는 이중삼중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서역으로 떠날 준비는 매우 간소했다. 왕이 어딜 떠나느냐고 역사적 사실을 대며 나를 설득하려던 대신들도 있었지만 과거의 나는 하마단으로 원정을 떠났었다. 그러하니 선례가 있는 셈이었다. 그럼 호위라도 붙이라고 했지만, 내가 자리를 비운 후 혹시 모를 사태를 적은 희생자로 막기 위해서는 한 명의 장수라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때마침 사문에 속하는 청성검이 내게 죽었다는 사실이 천하에 공개되면서 설득하기 수월했다.

재미있는 것은 청성이 즉각 소문에 반발하여 청성검은 청성산에 있다고 발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곧 청성검의 시신이 항주 저잣거리에서 발견되고 시신 품에서 항주인이 천하제일이라는 문장이 적힌 종이가 나오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청성은 그가 청성검이 아니며 자신들을 음해하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놨지만 항주인은 자신 중에 누군가 기개를 보여줬다며 의기양양했다. 나는 그것을 보며 이자겸의 공작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했다.

대리의 차마 무역 독점을 막기 위해 어찌어찌 항주의 금군이 빠져나가더라도 여전히 남아 있는 금군은 강남 제일 세력이다.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서는 반란이 필요했다. 그것도 잠재적 반대파를 숙청할 수 있는 반란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방랍의 난이 앞당겨지겠구나.’

점차 복주에서 멀어지는 배를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 곁에는 이소가 함께했다. 해남도를 들렀다가 서역으로 향하는 여정 중 해남도까지만 동행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소를 보필하고 묘족과 우호를 다지기 위해 대신 여럿이 승선했다.

수호전에서 최종 보스로 여겨지는 방랍의 난은 실제로 항주와 목주 일대에서 크게 일어났었고 송나라의 국력을 크게 쇠퇴시켜 정강의 치욕을 당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자겸은 송이 여기저기서 흔들리는 것을 부각하고 항주인의 자존심을 고취해 불만 세력이 지금이 기회다라고 인식시키는 작업을 한 셈이다. 그는 어부지리를 노릴 심산이었다.

다시 찾은 해남도는 묘족의 천국이었다. 일부 남았던 회족은 과거 하사신과 결탁하면서 풍지박산났고 송군의 비호를 받던 한인들은 동관이 떠난 이후 묘족의 쌓인 원한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들은 나의 등장에 적대감을 드러냈지만, 과거의 나를 기억하던 묘족들의 도움을 받아 자매의 마을을 찾았다. 자매의 부모는 아직 생존해 있었다. 그들은 나를 기쁘게 맞이했고 잔치를 열었다. 이소와 나는 그들의 환대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다음 날이 되자 나는 이소의 손을 잡고 자매와 걸었던 산길을 탔다. 그 길은 오지산 백화봉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저 멀리 남쪽 바다의 푸른 빛과 수림의 초록빛이 어울려 장관을 이루자 이소는 찬탄을 금하지 못했고 나는 옛 기억에 잠겼다. 자매와 이 길을 걸으며 웅심을 품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정상에 다다르자 이소는 힘들었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건네준 물을 마시고 주변을 둘러보던 이소는 암석에 부조된 입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건…….”

나도 이소의 뒤를 따라 입상을 보았다. 당시엔 한족인 민 태조를 섬기는 묘족이 신기하게 생각되기도 했고, 그저 신화 속의 인물처럼만 여기고 가볍게 흘렸다. 그러나 나임을 알고 바라보는 입상은 참으로 묘했다.

“닮았어요.”

이소가 나와 입상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와 덩치도 얼굴도 달랐지만 느낌만은 비슷하다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결국, 그때와 지금은 갖춘 능력도 가고자 하는 길도 다르지만 같은 꿈을 꾼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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