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8 (29) 남산가이(南山可移) =========================================================================
보통 해체주의는 프랑스의 철학자 데리다가 선구자이긴 하다. 그러나 애써 푸코를 떠올린 것은 그가 과거와 현재를 연구하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담담히 주장하는 데 있다.
그 주장은 기존의 철학자들이 어떠한 것은 해야 하고, 어떠한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미학적으로 풀어낸 것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자신은 무엇이 돼야 하는가? 무엇이 되기 위한 욕망을 품고 있는가? 그 욕망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발현된 욕망이 다른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욕망과 권력은 지식의 고하에 따른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다. 즉, 내가 애초에 지식이나 경험으로 남기지 않으려고 했던 폐해들, 예컨대 현대 정부나 국회, 거대 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볼썽사나운 비리들이 결국은 역사적인 사례를 거치며 우리가 지금 진짜라고 믿는 윤리와 관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알지만 그렇게 살면 손해를 보기 때문에 적당히 약삭빠르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의 나는 보편적 이성을 신뢰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약간의 변화를 주긴 했지만 큰 흐름에서 인간의 욕망을 이기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푸코는 내게 해답을 주고 있다.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합리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처한 다양한 합리성에 기초하여 비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 비판의 수단은 역시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송 이전 오대십국 시대는 내게 참고가 될 수 있었다.
통일 왕조가 중원의 혼란을 제압했다는 식의 사관에선 혼란기가 막장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소외되던 지역이 그 지역을 잘 아는 지방 정권에 의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는 점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 복건만 해도 개민왕의 선정이 아직도 회자하고 있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은 민 제국에서 당으로 이어지는 제도의 연속성과도 관계가 있다.
민 제국은 지방자치제도를 도입했다가 망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사실 고대 중국부터 이미 그러한 움직임은 있었다. 봉건제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 다만 그 봉건제의 주체를 상향식으로 결정하느냐 하향식으로 결정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당나라는 민 제국 조정의 실정과 지방 세력이 지나치게 강성해지면서 발호했다고는 하나 건국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제도를 취했다. 절도사 제도가 그것이 아닌가?
단지 민 제국과 달랐던 것은 병농일체인 부병제를 폐지하고 병농분리를 선언한 것이다. 직업군인을 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일본의 사무라이 계급 출현과 비슷한 양상이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절도사 안녹산의 난 이후 당나라 역사를 보면 지방 절도사와 정부의 대립과 토벌의 반복이다. 당나라 역사의 절반 이상이 통일 왕조라고 보기는 어려울 정도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쟁투기인 셈이다. 그러하니 지방 절도사 입장에선 자신의 지역을 최대한 발전시켜 힘을 얻는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조정이 신경 쓰지 못하던 지역까지 개발에 들어갔다. 그것에 더해 인근 절도사와의 경쟁까지 겹쳐지면서 지역별 경쟁의식까지 생겼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앞에서 생각했던, 애써 배제하려고 했던 폐해가 결국 역사 흐름에 등장하면서 사람의 생각을 내가 의도치 않았던 방향으로 이끈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거대한 제국을 이루고 윤리적 가르침을 최대한 퍼트린다고 해도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자칫 현대에 이르러 중국이 옛 영토를 되찾는다는 구실로 인접국들을 침범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은 눈과 귀로 지겹도록 보고 들었다. 일본이나 러시아라고 다를 것이 있던가?
중원에 통일 왕조가 무너지면 새로운 통일 왕조가 나타난다는 공식은 계속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반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오대십국은 매우 재미있다. 황하 일대의 ‘중원’을 통제하던 ‘오대’가 다섯 번이나 왕조가 교체되면서도 당 시절의 정치 구조를 그대로 가져오며 그나마 안정적이었던 반면, 상대적으로 변방인 장강 이남은 열 개의 소국이 순식간에 난립하는 현상을 보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면 항상 중원이 시끄러워졌다. 중원이 가장 중요한 땅이기 때문일 것이다. 갖은 전쟁과 교류가 거의 한 나라나 다를 바가 없는 언어, 문화를 가지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강남은 다르다.
말과 문화가 다른 상황에서 운남과 촉에 대리가 있고, 내가 복건을 비롯해 남중국해를 잡은 상황이다. 강남 오은이 나를 지지하고 있고 양시 같은 복건 출신의 대학자가 나를 따른다. 중원 국가가 아니라도 하나의 정체성을 내세우기는 충분한 국가이다. 더구나 시기가 현대라면 중원은 경제력 면에서 상대가 안 될 정도다. 물론 그때까지 유지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었고, 단지 강남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정도면 충분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성경 구절처럼 중원은 중원에게 강남은 강남에게라는 관념과 인식의 발생 말이다.
그런 면에서 광저우를 중심으로 한 남한(南漢)과 복주를 중심으로 한 민나라는 민족이나 언어, 문화, 그리고 나라의 성립 배경에서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같이 중원에서는 최남단이라 변방의 낙후된 지역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곳들이지만 아랍과 아시아 간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그 가치가 다시 인식된 곳이기 때문이다. 중원의 혼란을 피해 남하한 문인이나 승려 등이 지역과 결합하여 독특한 문화를 진흥한 것도 같았다.
*
점심시간이 지난 나른한 오후의 국사 수업은 대부분의 어린 학생에겐 참기 어려운 수면제나 다름없었다. 오직 몇몇 학생의 표정에서만 열의가 빛나고 있었다. 그 몇몇이 없었다면 수업할 마음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은 전자 칠판에 준비한 화면을 열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1106년은 서양에서 보자면 십자군 출병 10년을 맞이한 해이기도 하고, 카노사의 굴욕으로 유명한 하인리히 4세가 숨을 거둔 해이기도 합니다. 동양으로 돌아오면 고려의 예종이 즉위한 해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 해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동서양을 뒤흔든 시발점이 된 해이기도 합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 들어 말했다.
“남양 자치령의 모체가 되는 양나라가 세워집니다.”
선생은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때를 기점으로 동아시아 역사는 크게 요동칩니다. 우리 고려 연방의 토대가 쌓인 해이기도 하지요. 양나라의 건국자 척준경은 고려의 장수로 아마 여러분 중에서도 그의 모험담이 적힌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거라고 믿어요.”
척준경이란 이름이 나오자 수마와 싸우던 몇몇 학생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무협 소설과도 같은 그의 일대기는 무척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물론 최고는 한나라 말기를 다룬 사국지였다.
“참 공교롭긴 하죠. 북중민국과 남양 자치령이 초나라의 전설적인 승상이자 민 제국의 태조가 되는 이준경을 자기 역사로 편입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도 그와 비슷한 역사 경쟁을 남양 자치령과 벌이고 있지요. 척준경을 어디의 역사로 보아야 할 것인지 말이에요. 한때 남양 자치령은 서양 열강의 침공을 막기 위해 우리와 손을 잡은 적이 있던 동맹국이지만 지금 같은 국제화 시대엔 경제 전쟁의 맞수가 된 국가이기도 하지요. 그런 남양 자치령의 시작인 양나라는 우리로선 명백히 고려인이 건국했다는 점에서 국사에 편입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치 프랑크 왕국까지는 유럽의 역사가 비교적 단일하게 가다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등의 역사로 갈라졌듯이 말이에요. 그럼 그렇게 알고 다음 진도를 나가보도록 할게요.”
그때 한 학생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그럼 우리 남양 자치령은 국가임에도 왜 자치령이라는 이름을 쓰는 거죠? 우리 고려 연방에 속한 유구 자치령이나 하와이 자치령처럼 말이지요.”
교사는 좋은 질문이라는 듯 웃음을 보였다.
“척준경의 죽음 이후 왕위를 놓고 왕자 간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배후엔 알다시피 왕자들의 외척이 되는 복건과 아랍, 고려가 있었지요. 양나라가 혼란에 빠지면서 송이 남하 움직임을 보이자 신하들은 숙의 끝에 고려의 도움을 받기로 합니다. 실질적으로 송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는 세력은 고려뿐이었으니까요. 당시 고려는 북벌을 성공적으로 끝내면서 왕권 강화가 최고조에 이른 시점이었고 여러분이 잘 아는 정중부나 이의방, 경대승, 이의민 같은 장수들이 연이어 출현했던 시대지요. 고려로 입조를 결정함으로써 천자국으로서 고려의 위신을 살려주고 내정을 안정시키려는 조치였다고 생각하면 될 거 같아요. 그러나 워낙 거리, 문화, 언어적으로 다르다 보니 자주 국가의 기치를 들 날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내부 실정(失政)과 북방 민족의 발호, 왜구의 난동까지 겹치며 고려가 조선으로 바뀔 때를 노려 남양 자치령은 독립을 선언해요. 그전부터도 독립 국가나 다를 바 없었지만, 이제 누구도 천자로 받들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고 할까요? 그들은 마치 베네치아의 상인처럼 실리적이었어요. 그래서 남양 자치령을 괜히 동양의 베네치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지요. 심지어 정치 제도도 비슷한 면이 있으니까요.”
선생은 화면에 보이는 지도를 포인터로 그려가며 당시 상황을 최대한 설명했다. 그 시작은 아랍이었다.
*
나는 왕이 되었다.
흥분되기는 했지만 기쁨은 아니었다. 이제 시작이라는 중압감이 나를 감쌌다. 나의 선택이 실패한다면 나는 본래 역사보다 퇴보를 불러온 원흉이 되기 때문이다.
왕이 되었다고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송은 적대적이었고 서하나 요는 관심도 없었다. 주로 남해 교역을 하던 일본 상인과 아랍 상인들 정도가 관심을 보였을 뿐이다. 그저 운 좋게 왕을 스스로 칭했다가 곧 몰락하리란 생각도 했을 것이다.
별무반이나 이자겸 건을 실행하기에 앞서 먼저 아랍과의 끈을 정리하고자 했다. 나는 우마르에게 자세한 사항을 전해 들었다.
이야기는 이러했다.
하사신은 크게 두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알라무트에 무조건 충성하던 자들과 알라무트에도 충성했지만, 시아파의 종주인 이집트 파티마 왕조를 위해서도 충성하는 이스마일파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극단적인 상황이 아닌 한 아군이었다.
알라무트가 궤멸하자 좋은 도구를 잃었다고 판단한 파티마 왕조는 남은 하사신들을 지원하여 알라무트를 재건하려고 했다. 그러나 알라무트는 이미 호라산의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의 손에 있는 상황이고 그는 시아파를 배격하지는 않지만,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반대파를 치는 중이다.
그러자 하사신은 십자군 일부와 손을 잡았다. 힘들게 성지까지 왔건만 영지를 얻지 못한 자들이다. 새로운 영토를 얻을 때마다 십자군 국가가 들어섰지만, 이곳에서 부익부 빈익빈은 적용되어 대영주들이 좋은 영지를 싹쓸이하는 현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운의 꿈을 가지고 출병한 중소 영주들로서는 대영주들의 신하로 기어들어가지 않는 한 길이 안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용맹한 왕이 몸져누운 룸 술탄국이다. 하사신은 알라무트를 되찾길 원한다. 그러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상당한 전력으로 탈바꿈한 상태였다. 파티마 왕조는 그것이 십자군끼리의 다툼도 유발할 수 있다고 보았기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현실이라고 했다.
이제 룸 술탄국의 어린 후계자는 하사신의 암살을 두려워해야 했고, 그런 어린 후계자의 후견인인 호라산의 술탄은 하사신과 동맹을 맺은 또 다른 적, 가즈나 왕조를 견제하기 위해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 룸 술탄국의 영역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그러자 지금까지 얻은 영토로 만족하고 있던 비잔틴 제국이 욕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복잡한 형세였다.
그러한 상황을 다 설명한 우마르의 제안은 이런 것이다.
============================ 작품 후기 ============================
일단 초고가 완성되어 올립니다. 수정을 하는 중 입니다.
그리고 제목을 바꾸려고 생각 중입니다. 왠지 고려에 매몰된 제목인거 같아서 중세와 현대까지 역사를 의미하는 외전 형식의 제목을 검토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