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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27화 (227/257)

00227  (29) 남산가이(南山可移)  =========================================================================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에 휘말리게 되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언젠가 겪을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이렇게 한꺼번에 터져주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쨌거나 즉위를 위한 귀환이었다. 우마르와의 논의는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나를 기다린 이들에게 화답해야 했기 때문이다.

장상영이 문무백관을 대신해 나에게 다가올 때, 오십 중반의 문신이 그 뒤를 따랐다. 나는 그를 처음 보았기에 아마도 장상영이 그를 소개해 주려 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건 무척 대단한 일이다. 재상으로 내정된 장상영이 만사를 미루고 소개해줄 인물이면 그와 버금가는 인물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전하, 먼 길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궁으로 향하여 전하의 옥음을 경청해야 마땅하나 어진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 일터, 대유(大儒)를 심성으로 맞이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대유면 유학자의 거두를 일컫는다. 현 유학자의 거두라면 장상영이나 장뢰도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정통 유학에서 벗어나 실리적인 행정가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설마?

“중립(中立)이라 합니다. 전하의 현문(玄門, 오묘한 법)을 이제야 듣고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구산(龜山) 선생이 짐을 찾아오다니 이는 진정 복건의 홍복입니다!”

내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의 손을 잡자 구산 선생은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이었고 장상영은 ‘이렇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라며 구산 선생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양시(楊時)! 내가 왜 양시를 잊고 있었을까!’

양시는 복건 출신의 유학자이자 관리다. 그렇다고 단순히 그가 이곳 출신 괜찮은 유학자, 혹은 괜찮은 관리라서 놀란 것이 아니다.

‘이정(二程)의 제자!’

이정은 정호, 정이 형제를 일컫는 말로 북송 유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입바른 선비를 싫어하던 간신들에게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던 그들에게 몇 명의 제자가 있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그중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바로 양시다. 이유는 간단하다, 양시의 문하를 내려가면 바로 주희가 있기 때문이다! 명과 조선에 큰 영향을 끼친 주자학의 그 주희 말이다!

물론 양시가 주희의 사조이기 때문에 중요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정의 고명 제자 중 유일한 복건인이었다. 그는 도남(道南)이란 발언을 남겼는데, 이는 유학자 대다수가 장강 이북 출신인 것을 지적하며 ‘나의 도는 남쪽을 간다.’고 말한 것이었다. 이는 남송이 들어서면서 그의 학문이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장강 이북에 기반을 두고 있던 학파에 비해 일찌감치 장강 이남에 기반을 마련한 양시의 영향력이 두드러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복건에 자리를 잡은 덕분에 출중한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유학자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은 것은 기존 학문의 편견에서 벗어난 다양한 성향의 인재들이 출현했다는 뜻이다. 주희의 등장이 그 시대에는 파격이었듯이 말이다.

또한, 의도치 않았겠지만, 양시의 도남은 송이 장강 이남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았을 때 예비 관료를 미리 양성해놓은 것과 같은 결과를 가지고 왔다. 그것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정에서 양시로 이어지는 낙학(洛學, 이정의 고향이 낙양이라 유래한 이름.)의 비약적인 세력 확장으로 이어졌다.

잡설이 길었지만, 이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고 가장 중요한 것, 그래서 어쩌면 이것은 기가 막힌 하늘의 장난이 아닐까 생각되는 점이 하나 있었다.

‘이정은 왕안석을 맹렬히 비난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개혁 취지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정치관을 비난했던 것.’

왕안석은 신법을 통해 민 제국 시절 영화롭던 그때로의 회귀를 꿈꾼다고 하였다. 주나라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던 과거의 명신들과 별다를 바는 없다. 그러나 왕안석과 이정의 학파는 남송 때까지 이어지며 격렬한 당파 싸움으로 번진다.

이른바 정학론과 왕학론의 대결이다.

조선 초기 정도전과 태종 이방원의 대립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정학론은 조정이 중심이 되는 정치를, 왕학론은 왕이 중심이 되는 정치를 하자는 것이다.

왕안석은 왕학론이었고 정학론은 이정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정의 고명 제자인 양시 역시 정학론의 신봉자였다. 역사적으로 그런 양시의 학문이 주희를 통해 만개하여 정도전까지 이르러 조선까지 열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고려까지 그 영명이 알려진 고산 선생이 출신도 변변치 않고 가진 것도 없이 그저 의기 하나로만 일어난 짐을 찾아주다니 참으로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아마도 양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이나 해보자고 왔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내가 정중하게 숙이자 그의 눈빛이 부드럽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고려 숙종 시절에 양시의 이름은 고려까지 알려졌다. 숙종이 직접 양시가 송 조정에서 쓰임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고려로 오는 것은 어떠한지 아쉬움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송나라 사신은 재상 채경에게 달려가 고했고, 채경은 혼란한 조정의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양시를 대신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양시는 병을 핑계로 출사하지 않았다. 간신 채경에게 잠시 이용만 당하다가 내팽개쳐질 것이 눈에 환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장상영과 그의 차이이기도 하다.

장상영은 그것을 깨달았지만, 채경의 출사 요청을 받아들였던 것은 어쨌거나 그가 있는 몇 년 동안은 그나마 송과 백성이 숨을 쉴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불교적인 연민 때문이었다.

채경이 불렀으나 출사하지 않았던 그가 제 발로 나를 찾아왔다는 소문이 퍼지면 나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질 것이 틀림없었다. 또한, 그의 정학론은 방향을 어찌 트느냐에 따라 이 시대로서는 그나마 최상인 입헌군주제를 통한 민주주의 실현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비록 방향이 바뀌었지만, 본을 보인다는 것은 잊지 않았다.’

통합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고, 이제는 분열을 논하고 있다. 그러나 밑바탕에 깔린 생각은 같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유럽은 영국, 프랑스, 스위스, 포르투갈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군주제 국가였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국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그럼 영국은 언제부터 시작했는가? 17세기부터를 시작으로 볼 수도 있지만 13세기부터 이미 의회의 지위와 권한을 순조롭게 발전시켰다. 시작에서 확립까지 400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유럽이 받아들이기까지 300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지금은 12세기였다. 우리도 충분히 기회가 있고 가능성이 있었다. 민 제국 시절의 율가와 다양한 정치 실험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당과 송을 거치며 많은 학자에게 영감을 주었고 논의가 이루어졌다. 왕안석과 소동파, 장상영, 양시는 개성 있는 학문관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온전히 유학에서만 나왔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송 대까지의 유학은 유학이 아니라 도학(道學)이었다. 여러 길을 찾아 버릴 것은 버리고 올바른 길을 탐구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세계적인 상황 또한 그와 비슷하게 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칭기즈칸 같은 형태의 미국, 즉, 경찰국가 같은 형태를 꿈꾸기도 했고, 아예 중원을 통일해 내가 원하는 데로 바꿔보겠다는 생각도 가졌던 것이 아닌가?

과거의 나는 내가 할 도리를 다하고 후인에게 맡기자는 생각이었다. 그 도리를 다한 것에 대해 후회는 없지만, 그 도리가 그때 최선이었는지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약간의 후회가 남는다. 손을 데려고 했다면 중원뿐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다는 생각 말이다. 연대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 그저 당대의 미담 정도로만 남게 되었다.

“전하께서 평소 어진 인재를 대하는 모습을 여러 지우에게 들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으니 복건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송은 여전히 대국이고 양은 복주를 근간으로 삼았던 오대십국 시절의 민나라처럼 소국입니다. 지금은 전하의 용맹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으나 전하께 자칫 불경한 일이 벌어졌을 때 복건이 받아야 할 혼란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전하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생전에 반산 선생(왕안석)께서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을 주장했다 들었습니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답을 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제 대답입니다.”

양시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놀란 기색으로 한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결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경악에서 깨어난 것은 장상영이 그의 소매를 잡고 몇 번을 흔든 뒤였다. 그런 장상영 역시 내 대답이 놀라웠던지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왕안석이 양시와 대척점에 선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다지만 왕안석의 개혁 의도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왕안석의 학문적 견해에 대해서도 동조하는 면이 있었다. 다들 지식이 하늘에 닿은 사람들인데 극에 이르면 통한다는 말이 딱 그 짝일 것이다.

성무선악설은 성(性)은 선이나 악 어느 한쪽에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을 사람으로 바꿔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성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선악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선을 추구하는 것이 좋은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악을 다 몰아내고 나면 완전한 선을 이룰 수 있는가?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악이 다 제거되면 선도 따라서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악을 달래는 것이 중요하다 보았습니다.”

“악을 달랜다?”

“그렇습니다. 선에 이르는 방식이 다양한 것처럼 악의 방식 또한 다양합니다. 선과 악이 성을 이루고 있다는 자체가 사람의 온전함이 본래 그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회란 그 온전함을 다소 포기하고 질서를 얻고자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내가 그의 주장을 어느 정도 안다고 해도 확실히 아는 것은 아니다. 단지 머릿속에 맴돌고 있던 말을 단숨에 정리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에서 디테일, 혹은 정교함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도가 오직 하나라는 것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도를 이루는 천, 지, 인은 셋이고, 모든 사물을 가리키면 만(萬)이라 부릅니다. 일이 삼이 되고, 삼이 만으로 나뉜다는 것은 만개의 도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도를 구해야 하는 것은 결국 만물이 도라는 일(一)에서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정학론과 왕학론의 대립 역시 그러합니다. 신권이 강하여 정치가 문란하면 왕권의 강화를 바랄 것이 당연하며 왕권이 지나치게 강하면 신권이 견제하길 바랍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로 오직 옳고 그름은 그 시대에, 그 지역 백성의 평안함으로 판가름할 수 있습니다. 그러함으로 저는 절충(折衷)의 묘를 내세웠습니다. 학문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이, 지식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이, 오히려 나라를 망가트리는 모습을 종종 봐왔기 때문입니다. 전하의 생각은 어떠하나이까?”

한 마디로 왕권과 신권이 서로 옳다고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선과 악을 가르는 일보다 시대에 걸맞은 타협을 통해 백성의 안위를 우선하는 것이 정치라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신권을 내세우게 된 것은 아무래도 북송의 사정 때문일 것이다. 얼핏 보아서는 채경이나 동관 같은 간신들이 활개 치니 신권 정치가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이는 모두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진정한 신권 정치는 집단 지성의 합의 도출로 가능하다는 점에서 의회제도와 비슷한 면이 있다.

그것이 현대인들에겐 양시의 장점이겠지만 이 시대엔 단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필요에 따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가 하는 명확하지 않은 주장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희는 자신이 이정의 학문을 명확하게 해석하고 통합했다고 주장했다. 양시는 왕안석과 이정의 주장을 절충하는 어중간함을 보였다는 것이다.

“구산 선생께서 하고 싶은 일을 하십시오.”

너무나 쉽게 내지른 백지수표 발언에 양시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양시의 손을 잡고 힘껏 위로 끌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양시는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인파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의 재능과 재주는 모두 다르나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기 위해 모인 것은 똑같다! 그 일은 불의한 일인가!”

“아닙니다!”

그저 눈길만 마주쳤을 뿐 아버지 이소 옆에서 가만히 나와 양시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소년, 이강이 소리쳤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모두가 소리치기 시작했고, 다시 잠잠해졌을 무렵 나는 다시 외쳤다.

“고향을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아이를 소중하게 여기고, 이웃과 친하게 지낸다! 복건인이라면 당연히 지키는 가치를 천하에 논하고자 할 따름이다! 그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우리가 숨을 쉬는 것처럼 마땅히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내 귀가 먹먹할 정도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변방이라 치부 받던 복건인의 자존심을 충분히 살려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광경에 미소를 짓는 양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도남을 외쳤던 것은 변방이라 치부 받던 고향이 중원과 별 차이 없는 학문의 성지라는 것을 심어 주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나는 한 발 더 나갈 것이다.

우리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우친다면 굳이 남의 것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어진다. 아니 남들이 우리 것을 받아들이게 될 때도 올 것이다. 중원이 지금까지 변방을 교화의 상대로 보았다면 이제 동등함을 뛰어넘어 변방에서 배울 것도 있음을 인식하면서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다.

푸코의 해체주의 담론과 비슷한 것이다.

============================ 작품 후기 ============================

주시는 의견들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다음 글은 수요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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