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6 (29) 남산가이(南山可移) =========================================================================
(29) 남산가이(南山可移)
굳게 마음먹은 결정은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다.
나흘 후, 나를 비롯해 고영창과 아구다, 그리고 숙여진을 대표하는 해가 부족, 갈라전 여진을 대표하는 백산부가 비밀스럽게 모였다.
내 뜻에 따라 마양도에 은거한 백산부의 고욕은 소식을 대강 들었으면서도 고영창이 실제로 자리한 것을 보고 꽤 놀란 눈치였다.
야율대석의 음모로 완안부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나는 백산부의 추장, 고욕을 잡으며 상황을 반전시켰다. 그때 나는 고욕과 고영창이 힘을 합친다면 어떨까 상상한 적이 있었다.
고욕은 오천의 병력으로 요에 반란을 일으켰고, 고영창은 팔천의 병력으로 대발해의 건국을 비슷한 시기에 선언했기 때문이다. 결국, 둘 다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금나라를 세운 아구다의 기세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는 유럽보다 훨씬 넓은 땅임에도 겨우 몇 개의 국가가 역사를 이끌어 갔다. 중원이 춘추전국시대 그 이상의 열국(列國)으로 갈라지고, 만주와 연해주, 시베리아 역시 국가의 형성을 이룬다면? 일본 역시 각 섬, 혹은 가문과 문화에 따라 갈라진다면? 이것은 한국인으로서 분열의 씨앗을 심기 위함이 아니라 분열과 경쟁이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사상이 나왔던 춘추전국시대와 유럽의 근대를 동시에 심기 위함이다.
결국, 하나로 다시 합쳐질지도 모른다. 아니 누군가는 반드시 시도할 것이다. 유럽에서 나폴레옹이나 히틀러가 꿈꿨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유럽은 통합되지 않았다. 그들의 능력이 모자라서? 다양해진 사상과 문화를 하나로 강제하는 일은 이미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었다.
지금이 딱 좋은 시기였다.
완안부의 아구다가 여진을 완전히 통합하여 금을 건국하는 시기는 대략 10년 뒤다. 지금도 강하지만 여전 전체로 따지면 대략 절반 정도를 점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아구다는 나에게 빚을 졌다. 야율대석이 완안부를 몰락시키려 치밀한 계획을 세웠지만, 나의 등장으로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협상의 여지가 있었다.
물론 아구다는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한창 잘나가고 있는지라 시간만 더 주어진다면 완안부가 여진을 모두 통합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여진이 따로따로 행동했을 때의 경우다. 지금처럼 숙여진과 갈라전 여진의 대표 추장들이 자리한 이상, 제대로 된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요나라로 향할 창날이 완안부로 먼저 향할 것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봉에는 내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구다는 손을 번쩍 들었다.
“외통수니 어쩔 도리가 없군. 무조건 함께하겠다.”
고려의 별무반 30만을 상대한다면 아구다는 월등한 기병 자원을 활용하여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하며 지공을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숙여진과 갈라전 여진의 기병이 합세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거기에 요나라는 얼씨구나 하며 고려 편을 들어줄 가능성이 컸다. 기세 좋던 완안부지만 모두를 적으로 돌리고 살아남을 방법은 없었다.
아구다가 조건 없는 참여를 선언하자 그제야 해가 부족의 추장, 내가와 백산부의 추장, 고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는 강대한 적이었지만 그 적이 같은 편이 되니 믿음직하게 보였을 것이다. 또한, 고려가 중간에 끼는 바람에 완안부에 흡수 통합되는 형태가 아닌 연합의 형태가 된 것도 매우 바람직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의 결의만으로도 능히 요를 도모할 수 있으나 동조자를 더 구하고자 합니다.”
“동조자?”
내 발언에 고영창이 반응을 보였다. 아니 고영창뿐 아니라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송과 일본을 끌어들일 참입니다.”
“송이야 연운 16주를 되찾고 싶다고 쳐도 멀리 바다 건너 일본이 참전할 까닭이 있는가?”
연운 16주는 현대 중국의 베이징(北京)과 다퉁(大同)을 중심으로 타원을 그린 형태의 땅이라고 보면 대략 맞다. 연운 16주가 송에게 절실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실리적인 관점에서는 크게 2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첫째는 만리장성 이남 지역이라 방어가 어렵다는 점이다. 장벽도 요새도 없고 평야가 펼쳐지니 거란 기병이 조금만 움직인다 싶으면 중원을 사방팔방 헤집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 지역이 철이 많이 나고, 농경 자원 역시 풍부하다는 점이다. 그러하니 보급이 원활하지 않은 고려를 상대로 드잡이질을 벌이는 것보다 자체 보급이 가능한 중원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요나라로서는 이득인 상황이다. 반대로 송으로서는 그만큼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천하제일인에 가장 근접했다는 노준의가 요와 접경 지역에 붙박이로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송이 연운 16주를 되찾는다는 것은 만리장성의 수복을 의미하며 이는 북방민족에 대한 방어가 크게 향상되고 중원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합제의는 받아들일 것이 분명했다.
일본의 참가가 필요한 이유는 솔직히 나에게 있었다. 일본의 분열을 위한 몇 가지 장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의 일본이 처한 상황을 보면 연합에 능히 응할만했다.
일본은 6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중국과 한반도의 영향을 받아서 모방 문화를 꽃피웠다. 9세기에 이르러 중국의 당나라가 쇠퇴하고, 신라 역시 막장에 접어들면서 선진문물이라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기에 ‘견당사(遣唐使)’로 대표되는 교류를 잠정 중단했다. 이제 더는 배울 것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사무역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려 문종 시절 일본은 비교적 적극적으로 국가적인 교류를 추진하기 시작한다. 문종 역시 일본과의 교류에 호의를 보인다. 그러나 양국이 서로를 바라보는 차이점이 있는데 고려가 외교적인 면에 치중했다면 일본은 경제적인 면에 치중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송에 대해서는 고려를 대하는 것보다 더 매몰차게 대했다. 송의 휘종이 먼저 통교의 뜻을 알렸으나 일본은 화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 송이 우수한 것을 인정했으나 요나라의 패자(?者) 지위를 인정하던 일본으로서는 송과 국가 간 교류를 지속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이점만 본다면 송보다 고려가 요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일본과 교류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에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견당사를 파견하지 않고 독자적인 국풍 문화를 연 헤이안 시대는 치명적인 단점을 하나 가지게 되었다. 견당사 파견을 중단하고 일본 내부 일에 치중하면서 항해술과 조선술이 과거보다 퇴보했다는 것이다. 일본 상인 중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중국과의 직접 무역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그래서 송의 상인들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무역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초기엔 송의 상인들이 중원과 고려, 일본을 오가는 삼각 무역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일본은 그나마 근해를 따라 고려로 오는 것이 가능했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 문호가 열리지 않았기에 작은 규모의 사무역만 이루어졌다. 그러다 문종의 호의로 문호가 개방되자 40명에 이르는 상인이 한꺼번에 벽란도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그들의 항해술과 조선 여건상 자유자재로 교역할 수 있는 국가로는 고려 외에 달리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고려 수군의 강력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고려 조선술의 발전도 있지만, 왜구들이 타고 다니는 배의 수준이 신라 말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탓이다.
그렇게 교류가 열렸음에도 일본은 외교적으로는 소극적이었다. 송나라의 통교 요청을 거절했던 것처럼 요나라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고려와의 교류는 일본을 대표해서 오는 관 무역 형태가 아니라 각 지방의 영주가 필요한 물건을 수급하기 위해 고려로 오는 형태가 주종을 이루었다. 그중 가장 교류가 활발했던 대표적인 지역이 대마도다. 식량 해결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각 지역 영주들이 교역을 통해 필요한 것을 해결하고 부를 쌓아가니 자연 세력이 확장될 수밖에 없다. 일본 정부로서도 선택해야 할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고려처럼 무역 창구를 단일화해서 일본 정부가 직접 교역에 나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러나 이미 돈맛을 본 영주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들은 밀무역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일본 정부가 기댈 것은 고려나 송이 관 무역이 아닌 개별 무역에 대한 수출 품목을 제한해 주는 것을 원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풀기 위해서는 외교가 선행되어야 한다.
영주들의 힘을 줄이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자 전쟁을 도구로 택했던 것은 이미 여러 사례가 있다. 대표적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들 수 있다.
지금 일본은 시라카와 상황이 천황을 대신해 권력을 휘두르며 전제정치가 열린 상황이었다. 그를 견제할 수 있던 노회한 대신들이 사망하고 정치적으로 미숙한 대신들이 뒤를 이으면서 생긴 현상이다. 힘이 자신의 손에 있을 때 잠정적인 골칫거리를 쳐내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요시치카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제거당하던 시기가 이쯤이니 말이다.
내가 그런 사실을 얼추 말해주자 좌중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었다. 시라카와 상황으로서는 요나라의 멸망이 확실하다면 이제 눈치 보지 않고 송, 고려와 적극적인 관 무역을 시도할 수 있으며 이는 권력의 집중화를 의미한다. 선박 기술의 전수까지 약속한다면 아마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다.
‘요시치카가 사라진 이상 시라카와 상황은 다른 달갑지 않은 영주를 본보기로 처단할 것이다.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관 무역 강화와 겹치며 영주들의 불만을 부를 것이다. 그때 요시치카가 나타나 그들을 규합한다.’
내가 대략 생각한 밑그림이었다. 나는 확실히 성공할 것이라 믿었다. 천황을 인정하는 봉건 국가가 아니라 아예 다른 국시(國是), 내 생각으로는 불교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것도 다 천황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상황이라 가능한 설정이었다.
막부 체제에서 천황이 상징적인 존재라면 그 적들은 맞서기 보다 옹립하는 것이 더 유리했다. 그러나 그래서는 천황과 일본이란 국가가 가지는 동질성이 계속 유지되므로 천황이 지금처럼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고 황제, 혹은 천자처럼 인식되는 것이 차라리 나의 의도에 부합되는 것이다. 천황이란 이미지가 신화의 영역이라면 황제와 천자는 언제든 역성혁명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일본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가 생기기 전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특히 일본이 고려와의 문호가 열리자마자 가장 원했던 것이 불경이었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별무반 소집은 여진 토벌에 있다는 점을 요나라에 인식시키면서 본래 역사대로 별무반과 여진이 대치를 이루고 그 병력 그대로 동경요양부로 향하기로 했다.
의견 일치를 보자 나는 대략의 사정을 김덕진과 강증에게 알리고 개성으로 돌아왔다. 예종을 만나 이곳에서 일어난 일과 이자겸의 일을 논의하고, 이후엔 이자겸과 임안(臨安, 항주)의 처리를 문제를 논의해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바쁘게 돌아갔다.
먼저 예종은 나와 관련이 있는 이들을 요직으로 올리는 인사를 단행했다. 이미 손발을 맞추어본 사람들이 나와 관련되도록 만들어 일을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함이었다. 김한충이 상서좌복야, 김덕진이 병부상서, 강증이 우산기상시, 김경용이 지문하성사로 임명되었다.
내가 첫 공을 세웠으나 그 공을 탐했던 임간은 수사공(守司空)으로 임명한 후 은퇴하도록 종용하는 일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자겸이 시어사중승에 임명되었다.
이자겸의 헌책을 받아들이겠다는 뜻과도 같았다.
나는 이제 양나라의 건국을 시작으로 폭풍같이 달려볼 참이었다. 부푼 마음을 안고 복주에 도착했다. 감회가 새로웠다. 예전엔 탐라를 떠나 양산박의 무뢰한처럼 움직이겠다고 다짐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사방이 적이었지만 지금은 사방이 나의 복귀를 환영하는 문무백관과 백성들이었다.
대제국을 이끌던 과거가 있었음에도 그때 못지않은 벅찬 감동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 중 이곳에 있을 만한 인물이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나는 의아한 기색을 지었다.
“우마르 당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지?”
햇병아리 군관 시절의 나였다면 우마르에게 존대했어야 마땅하나 복주에 발을 디딘 이상 이제 나는 왕이었다. 하대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와 나의 인연은 알라무트에 본부를 둔 하사신(어쌔신)을 궤멸하면서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암살의 위협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킬리지 술탄은 친구를 항상 그리워했습니다.”
“그가 아직 살아 있었나?”
우마르의 설명을 들으니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나와 동갑인 그는 십 대 중반부터 롬 술탄국을 부활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나 역시 실전경험을 쌓으며 일조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중병에 걸려 오늘내일한다고 했다.
십자군 전쟁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비잔틴 제국은 예전의 강국으로 돌아왔고 셀주크 제국은 비록 콩가루 집안의 면모를 보일지언정 세력만은 강력한 상황에서 틈바구니에 끼인 나라들의 신세가 그러하듯 롬 술탄국도 생존을 위해 눈치를 보아야 했다. 용맹하던 킬리지의 생사가 오락가락한 이상 말이다.
“10년 전 당신을 도왔고 킬리지를 도왔지. 이제 킬리지의 아들도 도와달라는 말인가?”
한 번쯤 예상하던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마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10년 전 전하께서 보인 위명이 대단하다고는 하나 소식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찌 그런 것을 예상했겠습니까? 우연히 상인들의 입을 통해 전하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메수드 왕자(킬리지의 아들)의 후견인으로 호라산의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가 지명된 다음입니다.”
“아흐마드 산자르?”
그 이름을 곱씹다가 나는 내심 매우 놀랐다. 그 이름이 결코 흔한 이름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셀주크 제국의 분할령 중 이란을 온전히 지배한 마지막 술탄!’
무엇보다 그는 이스마일파를 적대한 것으로 유명했다. 호라산의 술탄이 그였고 호라산에 알라무트가 있기 때문이다. 언제 하사신이 자신의 멱을 따러 올지 모르니 걱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바뀌어 내가 알라무트를 멸했다.
“알라무트가 한때 신의 징벌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었습니다.”
우마르는 그것이 혹시 내가 아닌지 확인하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그러나 나는 모르는 척했다.
“그러나 알라무트에만 이스마일의 자식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각지에 퍼져 있었지요. 호라산의 술탄은 그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겠다면 모두 죽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나는 그런 자들을 몇몇 알고 있었다. 카라미타와 드루즈, 남아랍의 베르베르, 베두인들이었다. 그때 우리를 가로막았던 자들은 페르시아의 강자 중 하나인 가즈나 왕조였다. 그들은 수니파였지만 술탄의 힘이 강해서 전제군주에 가까운 형태를 보였던지라 종교와 정치가 어느 정도 분리되어 실리적인 면을 따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알라무트의 암살자들은 가즈나 왕조가 세력을 서쪽으로 펼치는 데 필요한 동업자였기 때문에 돕고자 나섰었다. 그러나 그때 그들은 나와 타티키오스를 알지 못했다.
그렇게 가즈나 왕조가 서쪽에 신경을 쓰는 틈을 타서 고르(아프가니스탄 지역)의 영주가 반란을 일으켰었다. 그에 더해 북부의 카라한 왕조가 가즈나와 셀주크의 영토를 동시에 노리며 군대를 일으켰다. 그들은 중앙 아시아에서 크게 위세를 떨치던 때도 있었으나 셀주크와 가즈나가 아랍, 페르시아, 중앙아시아까지를 거의 반분하자 북쪽에서 칼을 갈고 있던 참이었다.
알라무트의 하사신을 처리하겠다고 나선 나와 타티키오스의 행보가 중앙아시아의 굳어진 세력판도를 제대로 흔든 것이었다. 물론 그때의 나는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또 그것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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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