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5 (28) 호시마주(虎視馬走) =========================================================================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하하하, 그것이 너의 일타필살이라고?”
고영창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 찔끔 나와 닦을 정도였다. 그는 한참을 웃고 나더니 돌연 정색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화과산의 벌거숭이 원숭이가 많이 컸구나.”
수호전의 시대에서 손오공으로 평가받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복건에선 손오공에 대한 전설이 많이 회자하였고 그와 관련된 지리도 많아 나를 제천대성의 화신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영창이 나에게 던진 말은 더욱 의미심장했다.
“옛 민화를 보면 촐랑거리는 원숭이 한 마리가 나뭇가지 하나를 쥐고 굴 밖으로 몸을 내밀어, 따뜻한 햇볕 아래서 잠을 청하고 있는 호랑이를 찌르며 좋아서 웃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호랑이는 원숭이를 잡아먹을까 고민하지만 귀찮아서 그냥 둔다. 원숭이는 자기의 천적도 아닐뿐더러 언제든 잡아먹을 수 있는 약한 존재였으니까.”
중국이나 우리나라 민화에 원숭이는 주로 거대한 권력이나 관습을 조롱하는 역할로 나온다. 거대한 권력을 겨우 나뭇가지로 쿡쿡 찌르는 정도로도 기분이 좋을 만큼 백성의 고단함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사가들은 그 뒤에 이야기를 더 붙였다. 고영창이 하고자 하는 말도 그것일 것이다.
“귀찮아서 가만히 원숭이의 행동을 놔둔 호랑이는 죽고 말았다.”
“원숭이가 찌른 나뭇가지가 호랑이의 귀를 찔렀고 그곳이 급소였던지라 죽고 말았지요.”
“왜 하필 원숭이였을까?”
“물소나 코끼리는 호랑이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셉니다. 순하고 듬직하여 군자의 풍모라는 칭찬을 받기도 하지요. 그러나 원숭이는 원체 까불거리기를 좋아합니다. 원숭이가 무슨 장난을 치든 원래 그러려니 하지요.”
“나는 본래 물소나 코끼리가 되고자 했다.”
고영창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지난 10년간의 여정과 방황이 그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소나 코끼리는 워낙 듬직하여 이상한 행동을 보이면 오히려 호랑이가 경계합니다. 그러나 원숭이는 그렇지 않지요. 그런데도 원숭이를 싫어하는 것은 인간에 빗대어 경박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중원과 삼한, 왜에 한해서겠지.”
뒷말을 잇지 않았지만, 그가 인도를 언급하려 했음을 우물거리는 입 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시대 중원 사상에 크게 영향받지 않고 독자적인 철학을 구축한 곳은 인근에서 인도 외에는 찾기 어렵다.
“천축은 원숭이가 불의에 맞서 정의를 구현한다고 믿습니다. 불의한 일이 있을 때 징벌하는 정의의 사자 역할 말입니다.”
제천대성의 신화는 인도와도 관련이 있는 만큼 인도인들이 원숭이를 그런 시각으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따지고 보면 제천대성 전의 손오공은 중원에서 깽판을 친 것이지 천축에선 요괴를 잡는 신선 노릇을 하지 않았는가?
“손오공처럼 부처라도 만난 것이냐? 과거에 알고 있는 너와 지금의 너는 정말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하구나. 마치…….”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과거가 떠올랐다. 그는 나를 만나서 이런 말을 했다.
“전장에 서는 장수는 크게 보자면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성으로 전장을 판단할 것인가? 아니면 본능으로 판단할 것인가? 이성으로 전장을 판단하는 자를 우리는 지장이라 부를 것이고, 본능으로 전장에 임하는 자를 우리는 맹장이라 부를 것이다. 그 둘의 정점에 서는 자가 하나 있다. 나 역시 이르지 못한 자리이기도 하다.”
내 입에서 흘러나오자 고영창은 다시 껄껄 웃었다.
“그것이 명장이다. 인정하마. 네놈은 이미 제천대성이다.”
웃음을 멈춘 고영창이 내게 물었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하겠구나, 내가 필요한지를.”
“제 대답을 아시지 않습니까?”
“나를 어떻게 쓰려 함이냐? 나는 맹장도 지장도 이루지 못한 토룡(土龍, 지렁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고씨 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고영창의 검미가 일그러졌다. 본연의 능력도 아니고 그저 운이 좋아 타고난 핏줄이 자신의 유일한 장점이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기분이 좋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나 나는 그가 곧 이해하리라 믿었다. 원숭이가 촐랑거림은 인간의 경박함과 다른 것처럼 말이다.
“곽약사는 나를 부러워했다.”
뜬금없이 곽약사란 이름이 나왔지만 나는 그 짧은 말에 담긴 진의를 읽을 수 있었다. 곽약사도 고영창도 같은 발해 유민이었지만, 신분이 달랐기에 지향할 수 있는 목표도 아예 달라졌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자신이 왜 대씨나 고씨가 아니고 곽씨인지 한탄했었다. 발해를 다시 세운다고 한들 그것이 온전한 곽씨의 나라가 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그래서, 후주(後周)를 잇겠다고 나에게 선언하고 떠났다.”
오대십국 중 후주의 초대 왕이 곽위라는 사람이었다. 후주는 나중에 송나라의 전신이 되기도 하니 나는 그제야 사서에서 곽약사가 요와 송, 금을 넘나들면서 후대받았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송 태조, 조광윤은 선양으로 황제가 된 경우였기 때문에 후주 왕실을 보호할 것을 유훈으로 남겼다. 남송이 멸망할 때까지 300년에 걸쳐 보호받았다고 하니 매우 강력한 유훈이었던 셈이다.
곽약사가 후주의 후예임을 자처한다면 요와 송, 금 모두 상당한 이용가치가 있는 셈이었다. 중원 지배의 정당성을 어느 정도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능하기까지 하니 제대로만 다루면 이득이 더 클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곽약사는 무서운 사람이다.”
“저보다도 말입니까?”
“너도 강하지만 곽약사 역시 강하다. 서로 겨뤄보기 전에는 나는 그 승패를 쉬이 짐작할 수 없구나. 네가 나와의 대결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듯 그 역시 나를 그리 대했기 때문이다. 항간에선 그와 내가 호각으로 표현되지만, 사실은 나의 완전한 열세다. 내가 고씨라는 이유로 부딪치는 것을 꺼릴 뿐이다. 어쩔 수 없이 후주의 후예를 자처했지만, 고향에 대한 애정은 나보다도 더 뜨거운 사람이다.”
고영창이 곽약사를 그리도 높게 평가하니 나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송나라 입장에선 곽약사가 송에 투신한 후 나라의 기밀을 팔아 금으로 귀순한 천고의 모리배 같은 이미지로 서술되었고 우리는 한족을 역사의 중심으로 삼은 서술 관점에서 보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가 발해 유민이고 능력이 출중하다니 그의 행동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역사를 깊게 파고든 한국인의 관점에나 해당한다. 거기까지가 나의 입장이었다면 고영창의 발언은 곽약사를 직접 만나서 판단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발해도 좋습니다. 고구려도 좋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도움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움을 주겠다는 이야기냐?”
“완안부를 아십니까?”
“아구다? 그의 세력이 날로 강성해져 요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그래서 그를 견제하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다 썼지. 나 역시 그를 견제하기 위한 창으로 쓰이고 있고. 그러면서 세력을 키우고자 했다.”
“이미 요는 초원의 기상을 잃고 병약한 말이 된 지 오래입니다. 뛰지 못하는 말은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만약 완안부와 손을 잡고 요를 멸한다면 그들과 영역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들과 영역을 나누라? 완안부와 고려가, 아니 네가 무슨 밀약을 맺은 것이냐?”
“고려는 지금 별무반이라 하여 30만에 가까운 대군을 편성하는 중입니다.”
“뭣이!”
고영창이 깜짝 놀랐다.
30만이면 송나라나 요나라도 부담되는 병력이었다. 강조가 40만 대군을 동원했던 시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과도한 전쟁의 영향으로 고려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니 꼭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별무반은 제가 이끌 것입니다.”
고영창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내가 말한 것을 모두 합하여 계산하는 중이리라.
“대체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원을 견제하고 고려가 우위에 서기 위한 정족지세를 바라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보다 더 큰 대망을 노리고 있는 것인지 말이다.
“중원은 너무 큰 땅입니다. 지금껏 중원의 역사는 오로지 그 주변까지만 영향을 미치며 울타리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서역 원정으로 투르키스탄까지 나아가 아랍을 거쳐 서구 세계에 제지 기술과 나침반을 전하게 된 계기를 만든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이었다. 천하가 중원이라는 울타리를 부수고 세계라는 개념을 서양까지 확장한 칭기즈칸은 몽골인이었다. 명대에 아프리카까지 대함대를 이끌고 다녀온 정화는 아랍인이었다.
중화인을 자처하는 한족 중에 울타리를 부순 자는 누구인가? 아무도 없었다. 아니 한 명 찾아보라고 하면 이름을 댈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나다.
그러나 그 역시도 반쪽짜리에 그쳤다. 중원의 범위가 커지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써 통일을 하지 않고 비교 우위에 서는 선에서 만족했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유럽은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경계를 허물고 맹렬한 속도로 아랍과 아시아의 발전을 쫓고 있는 현실이다. 대항해 시대가 예전보다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저는 많은 나라를 보았습니다. 중원을 가진 자가 천하를 가진 자라는 인식에 사로잡힌 사이에 그들은 중원보다 더 큰 세계를 무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금은 중원의 주인이 그들보다 강할 수는 있겠으나 종국엔 더 큰 세계를 발판으로 삼는 그들을 이길 도리가 없습니다.”
“졸지에 나를 소인으로 만들어 버리는군.”
고영창은 다가와 성한 손으로 내 어깨를 짚었다.
“그래서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천하, 중원을 놓고 아웅다웅 싸우는 정도로는 너의 대망이 성에 차지 않는다는 뜻이렷다? 천하보다 더 큰 세계로 나가겠다?”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고영창이 말했다.
“호시마주라, 호랑이처럼 예리하게 보고 말처럼 힘차게 달린다고 했다. 내가 지금 이미 그러하다. 불가능하다고 여기면서 동족들의 비원을 외면할 수 없어 여기까지 이르렀다. 이런 나라도…….”
고영창의 말투가 흔들렸다. 아니 떨렸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인지 떠올렸던 것이리라.
“같은 꿈을 꿀 수 있겠느냐?”
나는 대답 대신 양손을 펼쳤다. 그러자 고영창은 격동에 찬 눈빛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거친 숨소리와 심장박동이 마치 나의 그것처럼 여겨졌다.
이제 화살은 완전히 쏘아진 셈이었다.
============================ 작품 후기 ============================
챕터의 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