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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20화 (220/257)

00220  (28) 호시마주(虎視馬走)  =========================================================================

나는 한순간 경직되었다. 이자겸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오기 전에 나의 뇌는 그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신선으로 평가받는 유해섬을 생각보다 쉽게 이겨서인지도 몰랐다.

실제의 척준경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천하제일은 응당 자신의 자리라며 자신감을 보였을까? 아니면 천하의 고수는 많다며 겸양을 떨었을까? 이제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나이니 결국 나의 행동이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하하하!”

내가 선택한 대답은 크게 웃는 것이었다.

대답을 피하기 위한 의뭉스러운 웃음이 아니었다. 확신에 찬 웃음이었다.

내가 천하제일이 되면 예종과 이자겸의 입지는 올라간다. 그 외의 귀족들은 둘 중 한 명에게 줄서기를 할 수밖에 없다.

그 내막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유야 어쨌건 예종이 이자겸의 독주를 막기 위해 나에게 안수궁주를 내리는 형국이다. 그러나 고려는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다. 귀족들이야 은밀하게 첩을 들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지만, 공주쯤 되면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러나 나의 신분이 이제 바뀌었다. 일국의 왕이 된 것이다. 그것도 바다 건너 문화와 습속이 다른 복건의 왕이다. 일부일처제가 그 힘을 잃는 것이다.

또한, 고려의 결혼풍습을 찬찬히 살펴보면 서류부가혼(?留婦家婚)의 성행이다. 쉽게 말해 남자가 처가살이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라는 것이다. 그래서 장인의 경제력이 중요했다. 장인의 경제력이 약해 딸들을 결혼 못 시켜서 미안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청렴한 관료의 딸들은 종종 여승의 길을 택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예종이나 이자겸이 경제력이 부족한 장인은 아니다. 예종은 전성기가 절정에 이른 고려의 왕이었고, 이자겸은 왕도 부귀영화를 논하지 못한다는 인주 이가의 거두이니까 말이다.

여기까지는 예종도 이자겸도 나에게 크게 기대할 것도, 내가 그들에게 기대할 것도 없는 셈이다. 그러나 조선과 고려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 중의 하나가 여성의 권리였다.

상속할 때 딸과 아들의 구분이 없다. 시집간 딸도 재산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즉, 출가외인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가 지금이다.

그래서 이혼과 재혼이 활발했다. 더 나은 조건의 남자가, 혹은 여자가 나타나면 주저하지 않고 떠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조건 중에 하나가 장인이 죄를 지을 때였다. 남자의 처가살이가 당연한 시대이므로 사위까지 장인의 죄를 같이 받았는데 그걸 피하고자 남자가 아내를 버리거나, 혹은 아내가 먼저 이혼할 것을 제의하는 식이다. 그래서 장인의 흠결이 있음에도 아내를 버리지 않으면 의리남이라고 칭송받을 정도다.

또한, 재혼의 자유로움은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고려 성종의 왕비였던 문덕왕후는 과부 출신이었고, 충숙왕의 왕비 수비 권씨는 과부였다. 이 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궁까지 치면 여러 왕의 사례가 나온다. 여자를 평등하게 보고 재혼을 터부시하지 않는 풍조였던 것은 이것으로 분명해 보인다.

또한, 여성은 호주가 될 수 있었다. 왕족들은 근친혼에 대한 편법으로 딸에게 어머니의 성씨를 쓰게 하는 경우가 많았고, 인주 이가 역시 그런 방식으로 왕비를 계속 배출했다.

‘예종도 이자겸도 참 많은 것을 노렸다.’

이자겸이 이소를 아껴주라고 신신당부했고 나는 약속했다. 그러나 예종은 안수궁주를 맡기겠다고 했을 뿐 나에게 약속을 받지 않았다. 그저 같은 꿈을 꾸는 동지로서 접근했을 뿐이다. 어쩌면 이자겸의 말마따나 안수궁주가 아름답고 현명하다면 알아서 잘할 것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이자겸은 이소를 통해 나의 모든 것을 가질 기회를 잡았으며 그 기회에 방해되는 경쟁자는 오직 한 명뿐이다. 그 경쟁에서 이소가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나도 애써 그걸 부인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장인의 흠결을 사위가 뒤집어쓰는 의리남이 될 것이 확실한 나는 자신의 모험 수가 최악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주는 신용장이나 마찬가지이기도 했다.

고려 왕의 장인이자 양나라 왕의 장인인 동시에 천하제일인의 장인이기까지 하다면 이미 그의 권세는 하늘에 닿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가?

‘명예가 우선인가, 아니면 재물이 우선인가? 이자겸은 재물이 아쉬운 사람은 아니다. 왕이 되고 싶어 한 것은 명예욕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가 그저 누군가의 장인으로만 남고 싶을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자겸이 왕이 되고 싶다고 가정할 때 가장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를 떠올려보면 되는 것이다. 뜻밖에도 그 시나리오는 내가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했다.

“양왕이자 천하제일인 사위의 위세가 필요한 일이니 흉중엔 오월(吳越)을 담고 계시는군요.”

“맞다.”

이자겸은 생각보다 순순히 시인했다.

당나라가 망하고 송이 들어서기 전인 오대십국 시절, 복건에 기반을 둔 민국 오른편에 오월국이 있었다. 항주와 소주 일대를 기반으로 한 오월국의 시조, 전류는 본래 소금 밀매상이었다. 이것은 일찍이 교역 상인들의 힘이 비교적 강했던 항주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특별한 명분 없이도 돈과 세력만 있다면 들고 일어나도 큰 거부감이 없는 지역이란 말이었다. 일찍이 율가가 이곳에서 기초했지만, 강남 교역의 중심이라는 점이 이재(理財)에 더욱 관심을 끌게 하였을 것이다.

“나는 너를 누구보다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너의 다음 목표가 항주인 것도 잘 안다. 항주는 강남의 젖줄이기 때문에 송도 역시 그곳에 십만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항주를 함락시키는 데 일조하겠으니 항주와 소주 일대를 터전으로 삼아 오월국을 부활시키겠다는 생각입니까?”

“나는 수로왕과 허 태후(허황옥)의 고귀한 핏줄을 이어받았다. 그런 내가 왕이 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고려 역시 시류를 잘 탄 송악의 호족이 왕이 되었는데 그에 비하면 나의 자격은 차고도 넘친다고 볼 수 있다.”

이자겸의 말이 새어나간다면 여기 있는 사람은 모두 역모죄로 잡혀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강한 발언이었다. 그만큼 이자겸은 이번 일에 승부를 걸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중원에 송과 요가 있으니 고려 안에서 아웅다웅해야 했다. 그런데 네가 길을 열었다. 그 틈을 타서 대리가 촉을 차지했다. 새로운 오대십국의 시대가 열리려 함이다. 그러하니 아등바등 이 좁은 고려 안에서 정쟁이나 할 필요가 있겠는가? 알겠느냐? 주상도 살고 나도 사는 방법이?”

이자겸이 오월을 세운다고 가정해봤다. 애초에 천하를 일통, 혹은 강남을 일통한다는 계획의 차질은 불가피해진다. 그러나 나는 유해섬과의 대결을 통해 화합보단 분열을 선택했다. 지금까지는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하면서 이후 중원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주제를 제시했다면, 나는 그러한 주제 의식의 방향을 바꾸려 하는 것이다. 강남이 탐라, 혹은 규슈와 같은 국가가 될 수도 있었고, 북해도가 연해주가 같은 국가가 될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중원이 결코 한족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천하를 하나로 만드는 일이 결코 필연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심어주는 것이다.

미국 하바드대학의 심리학자 엘런 랭어(1947~)는 ‘확신은 잔인한 사고방식’이라고 평한 바가 있었다. 확신은 가능성을 외면하도록 우리 정신을 고정하고, 우리가 사는 실제 세상과 단절시킨다고 말이다.

중원을 천하라 부르는 것 자체가 그러한 왜곡된 확신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중원만이 천하인가? 왜 그 주변부는 모두 변방이어야 하는가?

그러한 의문을 품으면 바로 공격이 들어왔다. 유학의 탈을 쓴 중화우월주의가 자신들의 확신을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을 적으로 돌리고 네가 틀렸다고 끊임없이 주장했다.

국가의 경계를 허물던 칭기즈칸 사후 원나라에 안주하자마자 그저 평범한 중원 왕조로 전락한 것은 끊임없는 사상 주입의 산물은 아니었을까?

누군가가 통일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통일이 중원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을 하고자 하는 셈이다.

누군가는 묘족의 통일을 꿈꾸며 나라를 세울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불교 국가를 꿈꿀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교역이 자유로운 상인 국가를 만들 수도 있다.

십자군 원정을 통해 동서양의 교류가 가속화되고 있는 지금만큼 동서양이 부딪치는 와중에 서로를 이해하고 섞일 수 있는 절호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이 버무려지면 세계는 각자의 풍습과 문화를 지키면서도 하나의 일관된 의식을 무의식으로 공유하게 된다. 그 의식이 어떤 것이든 종교와 인종, 세대를 초월하는 일관된 의지일 것이며 그 의지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철학을 가져올 것이다. 중원과 그 주변 국가들이라는 미망(迷妄)에 사로잡혔던 동아시아도 그때쯤엔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긍정적인 효과만 불러올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부정적인 측면 역시 불러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현대보다 더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러함에도 나는 기꺼이 변화를 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짊어질 작정이었다.

한때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1908-2009)의 구조주의를 열심히 공부했었다. 그의 저서 중 하나인 ‘벌거벗은 인간’에서 그는 서구인들이 비 서구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을 비판하면서 성찰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논리는 중원이 곧 천하이며 그 외에는 모두 변방이라는 동아시아 역사 인식에도 적용된다.

“서양의 종교는 지옥이 아주 무섭고 불결하며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있다고 말합니다.”

“불교도 비슷하지 않으냐?”

내가 지옥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주제와 무슨 상관인지 이자겸은 잠시 갸웃했지만 뭔가 연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지 금세 장단을 맞췄다.

“종교 대부분이 그리는 지옥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착하게 살라고 배웁니다. 그러나 점차 나이를 먹으면서 더 약삭빠르고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대개는 그래야만 현실적이라고 인정을 받습니다.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대전제는 모든 것을 이해하게 하지요.”

“내 선택도 이해한다는 뜻이더냐?”

나는 말없이 이자겸을 쳐다보았다. 이자겸 역시 무심코 나를 쳐다보다가 내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화색이 감돌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좁은 고려에서의 정쟁 따위 이젠 내 눈에 차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주상을 위해서도 좋은 결정이다. 나를 따르는 자들이 사라지면 주상은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네가 요나라를 상대로 천하제일임을 입증하면 말뿐인 천자국에서 진짜 천자국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주상이 진정으로 원하는 꿈이지.”

이자겸은 당장 왕이 되는 꿈이 이뤄지기라도 한 것처럼 기뻐했다. 나는 그가 이토록 기뻐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왕이라는 자리가 그토록 대단하다는 말일 것이다. 그것이 그저 자신의 대에서 끝나는 일장춘몽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사회를 차가운 사회와 뜨거운 사회로 구분했다. 차가운 사회란 ‘역사적 요인이 사회의 안정과 연속성에 끼치는 영향을, 스스로 만들어 낸 제도를 통해서 거의 자동으로 제거하는 사회’이며, 반면 뜨거운 사회란 ‘역사적 생성을 내부로 끌어들여서 그것을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사회’를 가리켰다. 이러한 구분을 한 이유는 한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안이냐 밖이냐에 따라서 너무도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럽인이 아프리카나 아시아인을 멸시했던 이유는 차가운 사회의 안에서 밖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족의 중화우월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나는 그런 정체된 의식을 바꾸는 실험에 나선 셈이다. 역사적 생성을 내부로 끌어들여서 그것을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사회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사르트르는 역사를 역사의식이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사회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현재에 도달했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떤 과정으로 흘러갈 것인가를 특정한 사건이나 계기 등을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해왔다.

레비스트로스는 그런 역사의식이 ‘환상’ 혹은 ‘사기(詐欺)’라고 비판했다. 역사라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의 집합을 의미하지만, 역사가가 과거의 사건을 서술할 때는 반드시 현재의 입장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역사가 연대기의 방식으로 서술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 역사서를 저술한 역사가의 선택과 구성이 동반되는데, 그 선택과 구상이 어떻게 잡히느냐에 따라서 역사는 실제 역사와 완전 다른 역사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역사를 옳다고 배우게 된다.

민 제국의 실록이 분실된 이후 편찬된 역사서들, 예컨대 당서나 자치통감 같은 것이 한족의 시각을 일방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진짜 역사가 아니라 ‘그 무엇을 위한 역사’가 되는 것이다. 지금의 역사가 가지는 의미는 진짜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가 더 중요한 편찬 이유가 된다는 말이다. 이데올로기의 도구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고전주의 시대의 사고 근거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 배치를 무너뜨리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인간이 마치 해변의 모래사장에 그려진 얼굴이 파도에 씻기듯 이내 지워지게 되리라고 장담할 수 있다.

푸코는 이미 ‘말과 사물’에서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철학을 점령한 어떠한 주체, 어떤 화제도 관심도 독점적인 주의와 집중을 요구받았던 그러한 주체, 그러한 주체를 제외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재통합을 위한 ‘해체’가 된다고 했다. 인종우월주의, 문화우월주의, 영토우월주의가 주는 좁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다 같은 인간으로 나아가기 위한 시작이기도 하다.

‘지옥은 멀리 있어서 회개하면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원시 신화에서는 지옥은 우리 안에 있다며 죄를 짓지 말자고 했는데, 오히려 이후의 인류는 지옥을 분리해서 죄를 짓는 것을 용납했지.’

지옥이 내 안에 있는 자와 지옥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진 자의 욕망 표출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인정해야 했다.

‘나와 지옥의 거리는 너희가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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