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3 (27) 국난사양상(國難思良相) =========================================================================
“대무…….”
예종은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무릎을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이름이야 무엇이든 나와 뜻을 같이한다는 뜻으로 알겠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게. 조만간 국혼 절차를 밟을 것이니 그리 알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려는 나를 곽여가 잠시 잡았다.
“고맙네. 어려운 결정이었음을 아네.”
아직 건국 선언만 하지 않았을 뿐 왕이나 다름없는 내가 고려 왕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고려의 위신을 올려주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 상황에서 나의 쓰임새는 전쟁에 있으니 항상 목숨에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내가 쓰러진다면 복건은 고려의 손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아직 어려움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설득해야 하니까요.”
나는 웃으며 떠났다.
그렇게 궁궐을 갓 벗어났을 때 누군가 나를 부르며 급하게 달려왔다. 그를 보니 이미 마주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예부상서 유재였다.
멈춰선 내게 다가온 그는 잠시 멈칫했다. 나를 뭐라고 부를지 호칭을 아직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랜만입니다.”
“양왕 전하의 소식을 이제야 들었습니다.”
예전의 그는 나의 까마득한 윗사람이었다. 부르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는 이미 결심했는지 존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유재는 복건 출신이었다.
“개민왕의 유지를 이었을 뿐 아직 국호가 완전히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신하는 의미에서 바다 양(洋)을 국호로 삼고자 하니 아마도 그리될 가능성이 클 듯합니다.”
근대까지는 해양 시대라 불릴 정도로 바다의 중요도는 높았다. 그런 뜻을 담고 있기도 했고 넓게 포용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국호들이 개진되어 재상 이하 대신들에게 알아서 결정하라고 던져두고 왔지만 내 뜻이 반영될 가능성이 가장 컸다.
“양나라라 참으로 좋은 이름입니다. 이소 그 친구와 몇 차례 서신을 주고받으며 복건의 사정을 들었습니다. 복건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큰 복일 따름입니다. 지금이라도 고려 관직을 내려두고 복건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는 내가 제의한다면 당장에라도 관복을 벗을 각오였다. 우연히 만났긴 했지만, 어차피 그를 만날 생각하고 있던 나였기에 차근차근 그에게 설명했다.
“새롭게 보위에 오른 주상께서 저를 안수궁주의 짝으로 생각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제힘을 빌려 이참에 요를 칠 생각도 하고 계시지요.”
“헉, 그게 정말입니까!”
목소리가 너무 컸던 것을 깨달았는지 유재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더니 나를 인적이 드문 곳으로 안내했다.
“승낙하셨습니까?”
내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유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중대사를 그 자리에서 결정하셨단 말입니까? 양이 고려를 우군으로 삼을 만하지만, 매제를 자처하셨으니 이는 고려를 상국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대신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명예는 가지되 실권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잠시 품 안을 보여주었다. 그 사이로 부월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자 유재는 순간 얼어붙은 눈치였다.
“세상에…….”
고려가 심혈을 기울인 별무반의 병권이 내 손에 들어왔다는 의미는 별무반으로 당장 고려를 뒤엎을 수도 있음을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안수궁주와의 국혼보다도 예종이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믿음의 표시였다.
“나를 따르시겠습니까?”
“따르라 하심은…….”
“나는 고려에서도 할 일이 많은 몸입니다. 그러나 도성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적지요. 도성에서 내 손발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고려와 주상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물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려와 주상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확실히 약조하실 수 있는 것입니까?”
“나를 믿고 부월을 내린 주상입니다. 그런 주상과 뜻이 맞아 고려를 도우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저는 또 다른 사돈이 있습니다.”
“이자겸…….”
“이자겸을 제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실권을 잡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주상께서 영민하시니 크게 신경 쓰일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 그런 일이라면 의당 분부가 없더라도 신하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사실 이걸 부탁하고 싶었습니다.”
유재는 성품이 소박하고 지조가 있어, 재산을 부정하게 늘리는 일을 하지 않았고, 어느 한 계파에 드는 것도 피했다고 한다. 딱 하나의 단점이라면 선비의 자부심이 강해서 아랫사람과는 말조차 섞지 않으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친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성격 탓에 그가 관직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순수하게 그의 실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현재 고려는 여러 파벌이 이합집산하고 있습니다. 탐라 사태에서 보듯 장군들은 그런 파벌들의 사병 노릇을 하고 있지요. 광종께서 사병을 혁파하여 성과를 거두었으나 공신 또는 문벌 귀족들만이 장군을 천거할 수 있다는 이상한 제도 탓에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사병을 500명 이상 동원할 수 있는 가문의 명단과 그들의 성향을 은밀히 조사해주십시오.”
“흠……. 그런 일이라면 어느 곳과도 연줄이 없는 이 몸이 적격이군요.”
지금 고려의 파벌은 서경파와 개경파, 도성파와 비도성파, 신라 귀족 대 백제, 마한 귀족, 친송파와 친요파, 상업파와 농업파 등등 다양하게 얽혀 있었다. 먼저 복잡한 실타래를 한눈에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겨우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달이 중천에 떠오른 야심한 밤이었다.
방에 들어가자 이소는 그림 같은 자태로 수를 놓고 있었다.
“왔어요?”
다소 무심한 이소의 말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눈동자에 어린 서운함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안해.”
이곳까지 오면서 안수궁주를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인가를 계속 생각했다. 안수궁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고려 왕실과 연결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받아들였다. 여자를 좋아해서? 출세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자겸이 그토록 자신의 딸을 왕비로 만들고자 했던 것은 권력을 잡을 수 있는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왕까지 되고자 마음을 품었던 것도 그런 배경이 없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국혼은 왕과 나의 믿음을 공고히 하는 수단임과 동시에 신임을 실어 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숙부께서 말씀하셨죠. 오라버니의 용력은 특별하여 그 용력을 아는 자라면 탐을 내지 않을 수 없다고 말이에요. 행여나 주상께서 오라버니를 차지한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다고요. 저에게 잘해주신 이유에 그런 부분이 포함되어 있었겠죠. 저를 통해 오라버니의 장인을 자청하면서도 숙부는 진짜 장인이 되어야 안심이 되겠다는 말을 종종 했어요. 그럴 때는 무척 속이 상하기도 했었죠.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니 주상께서도 숙부와 같은 제안을 했나 보군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소는 서늘한 시선이 바늘처럼 따갑게 느껴졌다. 이소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가 특별한 사람인 것은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언젠가 이런 일이 올 것을 상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니 기분은 그리 좋지 않네요. 한 가지만 약속해줘요.”
이소는 수를 내려놓으며 나와 마주 보았다.
그러더니 가녀린 손이 거친 내 손을 잡았다.
“지두하인세여향(指頭何忍洗餘香)이라…….”
손끝에 남은 임의 향기는 씻을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알았다. 약속하마.”
사람에게 있어 손은 두 개다. 두 개의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두 사람이다. 이소는 안수궁주를 끝으로 더는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완곡한 주장을 내비친 셈이었다.
약속했지만 이소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다시 떠나시겠죠.”
전장의 장수는 필연적으로 한곳에 오래 안주할 수 없었다. 예전 재상이었을 때 나는 필요에 따라 장수들을 이곳저곳으로 보내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들의 고초를 알 것 같았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고려를 떠나 복건으로 갈 때는 꼭 함께할 것이다.”
이소는 놓았던 수를 다시 집어들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수는 화려한 호랑이 문양이 반쯤 그려져 있었다.
“양규 장군의 수패를 잊지 않으셨겠죠. 이번에 가실 때 챙겨가세요. 도성에 머무르는 동안 수패의 안감을 완성해놓겠어요.”
수패는 이제 나에게 무의미했지만 이소의 마음을 봐서라도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소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오랜만의 해후는 행복감을 만들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이자겸의 부름을 받았을 때 전날 밤의 흔적이 얼굴에 남아 있었는지 가벼운 놀림을 받았지만, 그것도 즐거울 정도였다.
“주상의 제안이 참으로 대단한 모양이었구나. 주상의 국혼 제의를 받아들이다니.”
내가 자신의 딸을 거절하고 예종의 동생을 받아들인 격이 되었는데 이자겸은 그리 화나는 표정이 아니었다. 외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차분했다.
“예부상서가 너를 전하로 칭했다 하니 복건의 일은 사실이고 그렇다면 너를 주상이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이제…….”
하룻밤 새에 궁궐 안팎의 정보가 이자겸에게 들어간 것을 보니 역시라는 말이 내심 흘러나왔다.
“귀하신 몸인 것을 확인했으니 존대를 해야 마땅하다. 나에게 그것을 바라느냐?”
“편하신 데로 부르십시오.”
이자겸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그럼 밖에서 존대하되, 둘이 앉은 자리에서는 편히 대하도록 하마.”
“그러십시오.”
내가 시원스럽게 대답하자 이자겸은 잠시 뜸을 들였다.
“나를 어찌하려 하느냐?”
과연 이자겸이라고 해야 할까? 예종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예종의 노선과 함께 한다는 뜻과 같다. 물론 딴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니 이자겸으로서는 내가 어떠한 생각을 가졌는지 아예 대놓고 물어보며 내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어찌해 드리길 원합니까?”
“주상의 비로 내 딸이 결정된 이상 주상과 척을 질 생각은 없다. 주상도 살고 나도 사는 방법. 그 방법을 듣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