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2 (27) 국난사양상(國難思良相) =========================================================================
나는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착각에 빠졌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나의 과거는 중원에서 출발했다. 그전엔 대한민국 사람이 어째서 중원에 이르러야 했는지 의아했고, 중화(中華) 사상을 중화(中和)로 만드는데 일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것은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 역사의 한 축에 중원을 빼놓을 수 없다고 단정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나의 무지에서 나온 아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게 모르게 동양고전의 영향력은 중원을 우위에 두게 하기 때문이다.
흔히 규모가 큰 국가를 이야기할 때 동양에서는 강국이란 말보다 대국이란 말을 쓴다. 주나라 이후 중원을 차지할 수 있는 정통성을 인정받은 나라를 뜻한다. 물론 지금에 이르러 자신보다 열세에 있는 나라들이 주변에 있다면 스스로 대국을 칭하기도 한다.
공자는 대국의 기준으로 힘의 우위보다 감화를 통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나라를 꼽았다. 나는 그 생각에 수긍하여 민 제국을 열었으나 동아시아의 세력 구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나는 그 판을 바꾸기 위해 최종적으로 고만고만한 나라들의 경쟁을 생각했다. 여진이 요동을 얻고, 요동에서 쫓겨난 요는 하북으로 간다. 송은 하남과 장강 이북에 존재할 것이고, 장강 이남에는 내가 세운 민이 자리 잡을 것이다. 고려는 한반도와 그 외 부속 도서, 옛 발해의 영토를 되찾는다.
그 정도라면 중원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어 동아시아의 전국시대라 할만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에게 예종은 고려는 어찌하여 중원처럼 천자국이 될 수 없느냐고 나에게 거꾸로 묻는 셈이었다.
왜 중원이 역사의 주인공이어야 하고 한반도의 왕조들은 다 들러리가 되어야 했는지, 사대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인의를 존중하는 대국의 시대는 북방 이민족들이 중원을 차지하면서 이미 사라졌고 이제는 새로운 가치와 질서로 대국을 정의해야 할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반문했다.
‘고려가 아니 한반도의 국가가 천하의 중심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이던가? 나는 무엇을 두려워했지?’
강한 이웃을 두는 것은 곧 한반도의 불행이라 여겨 최대한 자제시키려 노력한 것은 과거 이준경의 출생이 한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고려인이다. 고려인이 아랍과 왜국, 중원을 넘나들며 복건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게 된 것은 고려가 앞으로 천하를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할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고려가 그러한가?
나는 오지도 않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무인시대에 이어 몽골의 침략,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창궐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고려의 전성기다.
그리고 요와 송은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는 쇠약기다.
왜구는 감히 고려 수군에 막혀 창궐하지 못하고 아랍의 상인들이 벽란도를 드나들며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오직 명나라에만 의지하던 조선과는 다른 개방적인 면모가 바로 고려의 특색이 아니던가?
‘중원에서 내가 날뛰며 새로운 국가 건설을 통해 신권 정치의 본을 보이는 동시에 여진과 연계해 고려의 칼을 요로 돌려 내가 예상치 못한 역사로의 변혁을 기대했다. 동아시아 역사의 주인공은 중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믿음을 가지지 못했을까? 수천 번 외적에게 침탈당하며 힘겹게 버텨온 우리나라가 앞으로도 그러하리라고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원이 할 수 있다면 한반도 역시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왕패병용과 의리쌍행은 비단 나라 안의 일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나라 간의 관계를 정의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복잡한 심사를 한줄기로 꿰뚫으며 뜻을 정하고 있을 때, 내 고민이 제법 길어진다고 생각했는지 예종이 말했다.
“사기에 이르길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은 신(信)이라 했고, 대국이 소국을 보호하는 것은 인(仁)이라 했다. 소국이 대국을 배신하는 것은 불신(不信)이라 했고, 대국이 소국을 침공하는 것은 불인(不仁)이라 했다.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다고 보는가?”
예종의 표정으로 보아 진심으로 불평을 토로하는 것 같았다.
“대국이라고, 형제국이라고 칭할 때는 언제고, 밥 먹듯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던 나라가 요가 아니던가? 송은 어떠한가? 대국의 행세는 다 하면서 매일같이 어렵다며 병사를 보내달라 병량을 보내달라 사신을 보내는 것이 일이다. 우리의 사정이 저물어가는 송과 요보다 못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들이 좋아하는 사기에서 이르길 대국이 소국을 돌보지 않으면 소국은 사대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냥 다 떠나서……!”
예종의 눈에 불꽃이 이는 듯했다.
“대국이 되고 싶다. 모든 구차한 이유는 다 이 하나의 비원을 위한 것이다. 이런 내 꿈이 잘못된 것이냐?”
나는 잠시 곽여를 바라보았다. 예종의 스승이었으니 그의 학문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도사 출신답게 노장사상에 탁월했지만 묵자에 대한 이해도 높았다. 묵자를 왜 떠올렸느냐 하면 지금 예종의 생각이 묵자의 주장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묵자는 대국이 소국을 침략하는 것이 인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것은 그만큼 그런 일이 빈번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는 소국이 대국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밝혔다. 그 방법으로 인구의 증가를 들었다. 빈곤을 타파하고 백성의 민생을 살펴 숫자를 늘리면 그것이 대국으로 가는 길이고 침략을 받지 않는다는 논리다. 병사 숫자가 아직도 전력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시대이니만큼 능히 할 수 있는 생각이다.
반면 내가 만들어보려고 했던 고려는 관자(관중)의 사상을 바탕으로 했다. 국가의 크기는 국가의 존속과 크게 관계없다는 것을 기본으로 백성에게 거두는 것에 한계가 없고 나라의 씀씀이 역시 한계가 없으면 나라가 아무리 크더라도 망한다는 것이다. 즉, 국가의 존망은 국가의 크기로 따지기보다 정치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나라냐 아니냐로 따져야 한다고 했다.
즉, 나는 고려가 강소국 이상 발전할 가능성에 대해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존속에 유리한 방법을 선택하려고 했다.
나는 지도에 내리꽂힌 부월에 손을 뻗어 잡았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빛이 기대감에 젖은 것을 보았다.
나는 천천히 부월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렸다.
“나라가 한 곳 있었습니다. 그곳은 권세를 가진 귀족들이 힘없는 백성을 수탈하여 땅의 경계를 정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지자 하천과 산을 경계로 삼는 곳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절대 그러한 것을 용납하지 않을걸세.”
“북에서는 야인들이 남에서는 왜구들이 들끓었습니다. 백성을 지켜야 할 군대는 귀족들의 사병이나 다름없었기에 애꿎게 피해를 보는 것은 오직 백성뿐이었습니다.”
“귀족들의 천거로 뽑는 지금의 무관 제도가 파행적인 것을 잘 알고 있다. 문반이 치르는 과거 시험과 같이 무관도 나라가 주관하는 시험을 따로 만들어 뽑을 것이다.”
“나라 이웃에는 서서히 몰락하는 대국과 떠오르는 대국이 있었는데 신하들은 나라의 안위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보신을 위해 대국에 줄을 대고 반대편을 헐뜯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옛날이야기 듣듯 태연하던 예종의 안색이 변했다.
“혹시 송과 요를 가리키는 것인가? 그대가 하는 이야기가 모두 고려의 이야기인가 그 말이다.”
고려의 이야기는 맞았지만 고려 말의 상황을 그대로 읊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따져보면 지금의 상황도 그때보다 다르지 않았다. 단지 고려의 전성기이기에 외적 침입에서는 자유롭다는 것이 다른 점일까.
그러던 고려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정중부의 난까지 겹쳐지며 단숨에 악화 일로를 걷게 된다.
나는 예종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남겼다.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뜻이 중요할 따름이지요. 만약 부월이 정자의 바닥을 뚫는다면 폐하의 뜻을 전적으로 따를 것입니다.”
“만약…… 뚫지 못한다면…….”
예종이 걱정을 담아 말했다. 나는 피식웃었다. 사실 나도 성공을 장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자 바닥의 두께는 어림잡아도 어른의 허벅지만큼 상당했다. 게다가 왕이 사용하는 정자니 가장 좋은 품질의 목재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런 바닥을 작은 도끼로 산산조각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실 가능한 사람이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런 호기를 부린 것은 내가 척준경으로서 이 땅에 존재하는 의의가 어떤 것인지 확인하는 절차라고 할 수 있었다. 엉뚱한 확신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저 이준경 자체만으로 존재해도 충분했을 터였다.
큰 힘을 주는 것에는 그 이유가 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나는 있는 힘껏 부월을 내리쳤다.
굉음과 함께 부서진 나뭇조각이 내 볼을 때렸다.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던 예종과 곽여의 시선이 바닥을 가리켰다.
“짐작은 했으나 이럴 수가…….”
예종이 내밀었던 지도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조각조각 부서져 흩어졌고 그 아래로는 처음부터 뚫려 있었던 것 마냥 주먹 두 개는 능히 들어갈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부월을 천천히 앞에 내려놓고 신색을 가다듬었다.
“주례와 좌전에 이르길 소국은 대국을 섬겨야 한다. 그것이 제가 고려를 보는 시선이었습니다. 소국은 영원한 소국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소국이 소국으로서 존속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고려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위험을 무릅쓰고 송을 건너가 재상의 생신강을 털겠다고 했을 때부터 갸륵한 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까지 앞서 생각할 줄은 참으로 몰랐군.”
“묵자도 맹자도 공자도 순자도 관자도 한비자도 각자 주장하는 이상은 차이가 조금 있었지만 일관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누구도 대국보다 소국이 이상을 실현하기 편하다고 평한 예가 없다는 것입니다. 군주가 가진 이상의 본질은 더욱 나은 삶을 위해 가능한 최적의 정치 조건을 찾고 탐색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고려가 가능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복건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복건에서 이룰 수 있는 이상은 고려에서도 충분히 이룰 수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믿어주신다는 전제, 그 하나만 달랐을 뿐입니다. 폐하께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고 싶습니다.”
“얼마든지 몇 가지든 물어도 좋다.”
“설사 제가 왕이 된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제가 왕의 자리를 탐한다면 그 자리를 스스럼없이 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폐하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면 말입니다.”
예종의 눈이 한껏 치켜 떠졌다. 난제를 만난 기분일 것이다. 사실 왕위를 선뜻 주고 싶다고 해도 줄 수가 없을뿐더러 외려 혼란만 가중시키는 상황이 된다. 세도가였던 이자겸의 난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척준경의 변심도 있지만 아무리 세도가라도 왕은 불가하다는 기본적인 인식을 깔고 있었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이 오갔네. 솔직하게 말하지. 그대를 붙잡기 위해 그런 말을 했을 뿐, 아무래도 어렵겠지.”
“그러시리라 짐작했습니다.”
“표리부동해서 실망했나?”
“아직 실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게 부월을 주시고 친동생과의 국혼을 제의하신 것만으로도 왕권을 주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만족스럽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만족하기 어렵다……. 왕권에 버금가는 대가가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예종은 미간을 찌푸리며 내 말을 해석해보더니 말했다.
“군주가 속인(俗人, 평범한 일반인)을 등용하면 전차 천 대를 가진 제후국도 곧 망한다. 속유(俗儒, 평범한 선비)를 등용하면 그나마 나라를 존속시킬 수는 있으나 오래가지는 못한다. 아유(雅儒, 능력 있는 선비)를 등용하면 나라가 안정되고, 대유(大儒, 매우 뛰어난 선비)를 등용하면 3년이 지나기 전에 천하를 얻는다. 만약 대유가 전차 만 대를 가진 대국에서 등용된다면 군주와 손을 마주 잡고 있는 짧은 사이에 천하를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왕이 현명한 재상을 찾아 그에게 전권을 주면 천하는 이미 손바닥에 안에 있다는 말 일터. 왕이 된 것과 다를 바 없는 경지다. 그리고 그대가 복건에서 행하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예종은 순자의 대국론과 인재론을 혼합하여 자신의 뜻을 밝힌 것이었다. 왕 자리를 줄 수는 없지만, 신권을 왕권 못지않게 보장하겠다는 뜻이다.
“저는 대유가 될 수 없습니다. 대유의 재목들은 몇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폐하의 성의에 감읍하며 한 가지는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대무(大武). 제 역할은 현실을 바꾸기 위해 뽑아든 검입니다.”
============================ 작품 후기 ============================
연재가 많이 늦어져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삼국지 양장본 출시가 임박하면서 그쪽에 신경이 가있었던 것이 이유의 첫째고, 둘째는 고려편을 다시 읽으며 재검토를 했습니다.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다보니 글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결국 선택은 원래 하던 이야기를 풀자로 귀결되더군요. 이북 출시시기를 완결 뒤로 미뤄서 그동안의 피드백을 토대로 전체 글을 놓고 완급 조절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일도 한 편을 들고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