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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11화 (211/257)

00211  (27) 국난사양상(國難思良相)  =========================================================================

우리의 역사라고 알고 배웠던 고려 이전의 국가들.

발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최전성기가 중국과 한반도, 일본을 대략 그린 지도 위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붓으로 그려진 경계만 보더라도 가슴이 뛸 정도였다.

그러나 곧 냉정을 되찾았다. 정복 군주는 역사에 족적을 남기지만 백성에게 좋은 왕이었을까? 나는 예종이 능력 있고 괜찮은 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너무 무리한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기도 했다.

“태조께서 남기신 훈요 십조는 태조께서 이루지 못한 고려의 숙원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열에 관계없이 덕 있는 왕자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한 것이나 중원이나 거란의 풍습, 언어를 함부로 따르지 말고 우리의 것을 지키라는 것.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계승한 점을 잊지 않기 위해 서경에 1년 중 100일 이상을 머물도록 명시한 점. 상벌을 분명히 하고 백성의 신망을 잃지 않도록 한 점. 고유의 역사와 학문을 널리 알려 항시 옛일을 교훈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자세를 지키도록 한 것. 마지막으로…….”

나는 예종의 말에 나의 과거를 떠올렸다. 민족이란 개념이 19세기 이후 생겼다고 하지만 그전까지 아예 그런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는 지역이 같고 말이 같고 풍습이 같으면 타 지역민보다 동질감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발해가 멸망했을 때, 발해의 마지막 태자가 고려로 귀순한 이유나 이후 발해 유민들이 지속적으로 고려에 유입되는 과정을 보면 같은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민 제국은 당을 표방한 국제 국가에 통치 철학을 율가로 삼았다. 인의의 유가와 도덕의 도가, 질서의 법가를 모두 아울러 그것으로 현대의 어긋난 중화사상을 범애(汎愛) 사상과 결부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생각하니 그것이 성공이었던가? 여전히 중원을 차지한 제국이 천하의 주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가 너무 역사의 단계를 빨리 건너뛰려고 했던 것일까?’

율가와 화쟁을 통한 통치는 현대에 이르러 나타나는 세계인 관점을 옮긴 것과 다름없다.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넓게 보고 미래지향적이며 자유분방하지만, 책임을 아는 사람이 많아졌을 때 내가 상상하지 못한 역사로 진일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한국인이라 자각하면서도 한민족이란 정서에서 애써 초연해지려 했다.

문제는 그러한 사상이 참신하고 혁신적이어서 이후 나타난 왕조들이 따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상황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그런데 나 같은 생각은 제자백가와 불교 등에서 문구만 다를 뿐 비슷한 생각들이 이미 존재했다. 그런 상황에서 민 제국에 이어 나타난 당과 송이 굳이 민 제국의 계승을 천명할 이유가 없었다. 대체할만한 학문과 통치 이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처럼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기존 왕조의 구습 철폐를 외친다.

율가가 민 제국 말기 부패의 온상으로 지목되어 유학에 주류 학문의 자리를 내준 것은 역사의 예를 봤을 때 거의 필연적이었다는 말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던 때 통치 이념의 변화를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중원에서 유학이 자리를 잡았지만, 송의 실정으로 유학은 민 제국 말기의 율가와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는 말은 유사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유학과 율학의 객관적 비교가 가능해진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과거의 향수를 상기하며 율가를 국가 이념으로 삼자는 세력이 출현하게 된다. 그것이 지금의 나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 서한, 연한, 조나라를 무리하게 공격하여 손해를 입기보다 명신들에 의한 신권 정치를 유세(有勢)로 삼이 위정자와 백성의 각성을 촉구하는 정치 형식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것이 옳은 것인가?

나는 예종의 말에 그 질문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른바 나폴레옹의 아이러니. 나폴레옹 헌법에 자유, 평등, 박애를 못 박고 그것을 유럽에 전파시켜 오늘날 민주주의에 공이 있다는 이면에는 무력으로 유럽에 이념을 강권한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른바 옳은 결과를 위해 불의한 수단을 쓰는 것이 맞는가 하는 것인데 나는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과정을 중시했다.

그런 나폴레옹과 나. 누가 더 역사에 영향을 미쳤는가?

깊게 고민해볼 문제였지만 이어진 예종의 말에 현실로 돌아왔다.

“무예가 특출난 사람을 찾아 벼슬을 주고 우대할 것. 어떤가? 나는 지금 선조의 훈시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단 말일세.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나, 백성을 위해서라도 말일세.”

왕건은 발해와 고구려의 후신임을 잊지 말고 언젠가 다시 옛땅을 찾기 위해서는 상무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를 설득하기 위해 그걸 들먹일 줄은 몰랐다.

“아까 극락정토를 말씀하셨습니다. 고려가 고구려와 발해의 후신임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옛 땅을 얻는 것만으로 극락정토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예종은 나를 보며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르지…….”

뜻밖의 대답이었다. 어리둥절한 나를 보며 예종은 미소를 지었다.

“내 대답은 잠시 미뤄두기로 하고 이거 하나만 물어보지. 내가 옛땅을 되찾아 누대에 쌓을 명성을 원한다고 생각하나?”

“고토 회복으로 얻는 것은 곧 권력과 명성입니다. 얻은 땅을 고스란히 백성에게 돌려줄 생각도 아니지 않습니까?”

나의 심사는 조금 뒤틀려 있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예종의 호기가 부러웠는지도 몰랐다. 나는 항상 역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하고 싶은 것을 눌렀다면 예종은 그 끝이야 어쨌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도 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나폴레옹의 아이러니를 떠올렸을 때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아랍에 낙타라는 동물이 있다더군. 아, 자네는 직접 봤을 수 있겠군. 내가 듣기로 그 낙타라는 동물은 물 없이도 뜨거운 사막을 사흘 동안 걸을 수 있다고 들었네.”

“알고 계신 사실이 맞습니다.”

“맞다니 다행이군.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쓸뻔한 건 아닌가 걱정했으니 말일세.”

낙타를 가지고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내가 알고 있는 우화를 떠올려 보았지만, 도무지 지금 상황에서 적절한 것을 찾기 어려웠다.

“낙타의 등에는 혹이 있는데 그 혹이 낙타의 물 주머니라고 하더군. 혹이 크면 클수록 낙타는 오래 걸을 수 있다고 했네.”

엄밀히 따지면 물 주머니라는 표현은 틀린 것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니 나는 잠자코 들었다.

“즉, 혹이 크면 클수록 낙타는 생존에 유리한 것이지. 나는 나라 또한 그러하다고 생각했네. 나라가 커지면……. 그래 나의 권력과 명성도 그만큼 커지겠지. 그 커진 권력과 명성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소국의 비애는 비단 자국 내의 사정을 돌보는 일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외적의 침입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점에 있다. 고려 말이 그러하지 않은가?

“민 제국의 태조를 알고 있나?”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중원의 역대 제왕 중에 참으로 특이한 인물이지. 재상이 왕에 오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말일세. 누군가 민 태조를 가리켜 성공한 왕망이라고 하던데 나는 그것이 틀린 말이 아니라 생각하네. 은주시대의 이상을 당대에 구현해서 결국 성공했으니까……. 그러나 내가 보기엔 반쪽의 성공이었어.”

“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

나에 대한 평가였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천하를 얻는 것을 주저했기 때문이지. 선정을 타국과 비교하여 역사에 남긴다? 그 선택으로 이득을 본 사람은 누군가? 태조 자신뿐이었네. 삼국이 연합하여 초를 공격하자 병사는 병사대로 죽고 백성은 백성대로 죽어나갔지. 그 와중에 태조는 재상에서 황제가 되었고…….”

이런 식의 지적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러나 허투루 흘려들을 수가 없었던 것은 결과론적으로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내 고집 때문에 결국 죽지 않아도 되었던 원요가 죽었다. 적이 공격할 것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방관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런 나를 두고 교묘한 차도살인의 예로 삼는 학자도 있다고 했다.

“이미 다 된 밥을 떠먹여 주기만 기다리는 것은 수저를 잡지 못하는 갓난아이나 할 법한 행동이지. 나는 그러하지 않기로 했다. 그대를 수저로 삼아 마음껏 배를 채운 후, 혹시나 사막의 낙타처럼 환난을 겪더라도 능히 버틸 수 있는 몸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내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깨트려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왕위도 예법도 관습도……. 모든 걸 말이다.”

재상으로 남았다면 초나라는 얼마나 유지되었을까? 중신들이 그 점을 우려한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다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한동안 정무를 보지 못했었다. 내가 위선자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재상이었더라도 정도전이 세우고자 했던 신권 정치처럼 입헌군주의 뿌리를 세울 수 있는 기초는 충분히 닦을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본심은 원요가 죽기를 원했을까? 나조차도 혼란스러웠다.

그때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곽여가 말문을 열었다.

“문왕, 무왕, 주공의 도가 공자에게 전해졌고, 공자는 맹자에게 도를 전했습니다. 임금들의 도는 정치의 틀을 만들었고, 공자와 맹자는 학자로서 그 뜻을 널리 퍼트리고 전했지요. 그렇다면 지금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곽여의 질문은 논어의 구절을 인용한 것이었다.

“불파불립(不破不立). 내 키보다 높은 기둥 위에 서는 방법은 기둥을 부숴서 그 위에 서는 것이다.”

“또 하나가 더 있네. 자네도 잘 알고 있는 말이지.”

예종은 바닥에 놓인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의리쌍행(義利雙行) 왕패병용(王覇?用). 의와 이득은 같이 가고, 왕도와 패도는 같이 쓰일 수 있다.”

분명히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예종은 내 앞에 있던 부월을 잡자 지도를 내리찍었다. 그러자 중원의 한복판이 갈라져 버렸다.

“패도는 현실을 바꾸고 왕도는 앞날을 바꾼다. 그대와 나 둘이서 고려와 민, 요와 송의 처지를 바꾸는 것이다. 재미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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