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0 (27) 국난사양상(國難思良相) =========================================================================
그런 나를 예종은 가만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짐이 준비한 것이 있네.”
어디선가 내시 두 명이 나타나 화려한 문양의 나무함을 하나씩 내 앞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무슨 뜻일까 싶어 예종을 바라보니 그는 웃으며 열어볼 것을 권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함을 열었다. 그리고 얼어붙었다.
“이것은 구류관(九旒冠)과 구장복(九章服)이 아닙니까?”
구류관과 구장복은 바로 고려 왕의 예복이다. 고려가 필요에 의해 거란에 사대하자 거란은 고려 왕에게 구류관과 구장복을 보냈다고 한다. 요나라에서 구류관과 구장복은 친왕(親王)에게만 허락되었기에 고려 왕을 황제의 아우 정도로 대접했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내린 예복을 받아 입었다고 하면 굴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명나라에서 받아 입었다. 동아시아 조공 외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나를 친왕으로 생각한다는 의미인가?’
고려 왕이 자신이 입는 예복과 같은 것을 내 앞에 내놓았다. 그건 즉, 고려 왕과 동격이라는 것이다. 양국을 정식으로 인정한다는 뜻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나를…….
‘그렇구나!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는 방법이 있구나. 아니 모든 토끼를 다 잡는 방법.’
내 표정이 복잡하게 변하자 예종이나 곽여는 그 심경을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더니 곽여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절을 하기 시작했다.
“양국의 신왕(新王)께 고려국의 태사(太師)가 인사를 올리고자 합니다.”
외국의 왕을 만났을 때 할법한 예법으로 곽여는 정중하게 절을 마쳤다. 결국, 여기까지 오기 전에 정지상이나 곽여, 예종이 나에게 보여준 언행은 자신들이 관찰했던 내가 맞는지 다시 확인하는 절차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고려에 여전히 마음이 있는지, 왕에 대한 충성심은 가졌는지에 대한 시험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거만하게 나왔거나 왕 대우를 직접적으로 거론했더라면 예종과 곽여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나는 예종과 곽여의 진실을 보지 못하고 양국으로 급히 떠밀렸을지도 모른다.
“비록 고려가 천자를 자칭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고려국 내부에서만 국한한 것. 송과 요가 보자면 양국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 고려다. 그래서 여진을 쳐서 북방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고 그 여세를 몰아 요마저 물리치고 진정한 천자를 꿈꿨다. 나라의 힘을 모두 별무반에 쏟아 환웅천인이 이 땅에 내려온 이래 누구도 가지지 못한 강력한 군대를 손에 넣었다고 자부했지만, 막상 실전을 겪으니 송의 군대보다 겨우 나은 정도라는 것에 의기소침해졌다.”
생각해보니 이 시기에 크고 작은 여진의 발호가 이어진다. 약한 여진 세력은 고려에 의탁했지만, 힘이 제법 강한 부족들은 고려군과 부딪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종은 양성 중인 별무반의 실전을 겸해 출전시키지만 기대했던 것만큼의 성과를 보이지 못하자 더욱 단련에 박차를 가할 것을 명한다.
“거란족의 전사들을 모조리 꺾던 그대는 당시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뿐. 나는 곧 그대를 잊었지. 그러다 탐라에서 올라온 태사의 보고에 지대한 관심을 두게 되었다.”
아까와 달리 ‘그대’, ‘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니 같은 왕으로서 대하겠다는 의지가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예종의 설명을 들으며 다시 한 번 내 앞에 놓인 구류관과 구장복을 바라보았다. 양국을 세웠지만, 아직 나는 즉위식을 올리지 않았다. 즉, 천하에 아직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가장 먼저 고려에서 나에게 구류관과 구장복을 내렸다.
이는 다른 나라보다 앞서 고려가 양국과 형제국이 될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바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순천에서 송의 칠만 병력을 단신으로 유린하고 재상의 아들을 사로잡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사실인가 싶어 볼을 꼬집어야 했다. 재차 소식을 다시 물었을 때 그것이 사실이라 하니 참으로 안타까워 한숨이 나왔다. 그대라는 사람을 나는 먼저 겪었음에도 요나라의 협박이 무서워 내쳐야 했다. 그때 요나라가 무슨 소리를 했어도 내가 그대를 품었어야 했다. 나는 그때부터 그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길 원했다.”
예종은 나의 모든 행적을 꿰뚫고 있었다. 윤관과 오연총이 예종의 측근인 것도 나란 사람에 대해 알기에 수월했으리라. 심지어 내가 완안부, 백산부 등과 손을 잡고 있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예종이 김한충과 강증을 어르고 달랜 성과였다.
“기실 강동 6주를 얻은 것은 상당한 운이 따랐다. 요와 아국 사이의 여진이 양국을 분탕질 치는 것을 두고 누가 관리할 것이냐를 놓고 따진 덕분에 가능했지. 그러나 강동 6주가 안정되고 갈라전을 위시한 동북 9주의 여진들이 완안부로의 복속을 거부하고 요의 적극적인 개입을 원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요는 완안부의 세력 확장이 상당히 위험스러운 상황이라고 판단했고 군사를 모으고 있지. 완안부 역시 그런 요에 맞서 군사를 모으고 있다. 요는 야율대석을 보내 우리에게 함께 완안부를 치자고 제의했는데 아직 그 답을 명확하게 주지 않았다. 내가 보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정국이 어수선하다는 핑계로 말이지.”
내가 씨름으로 거란 용사들을 모두 꺾자 요의 왕족, 야율대석이 자신의 밑으로 올 것을 제의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야율대석은 지금의 예종과 같은 말을 했었다. 혼란스러웠던 강동 6주를 고려가 정리하겠다고 하여 빌려주었던 것이니 다시 내놓을 것과 동북 9주에 사는 여진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곳마저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그게 실제로 이루어지면 고려는 오직 요와 국경선을 마주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느슨한 체제를 가진 여진이 차라리 국경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수비를 위해서는 그나마 나았기에 고려로서는 절대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이자겸이 은밀히 사람을 모으면서 그대가 자신의 사위라고 은근히 자랑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보내 그대의 내자가 어떤 성정을 가진지 살펴보도록 했지. 그러면서 왜국의 규수가 있는 것도 확인했다. 그 규슈가 철기 공방으로 유명한 다타라 가문의 장녀라는 것도……. 천하를 종횡무진하며 많은 인연을 쌓은 그대를 보며 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대의 행적을 보면서 나는 심중에 거대한 용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 용에 아직 눈을 그리지 못했다. 그 눈은 바로 그대이기 때문이지.”
예종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내관이 나타나 하나의 두루마리를 내게 주고 사라졌다. 나는 말린 두루마리를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이게 뭡니까?”
“풀어보면 알걸세.”
예종은 나를 맞이하기 위해 실로 많은 준비를 한 것 같았다. 그중 하나가 이 두루마리일 것이다. 나는 끈을 풀러 두루마리를 펼쳤다.
“이건…….”
대충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보게 되니 이를 어찌 넘길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안수궁주(安壽宮主)일세. 내 친동생이지. 본래 족내혼을 고려했으나 그대를 알고 나서 허락지 않았네. 오직 그대의 배필로 미리 내정된 아이라 할 수 있네.”
두루마리는 한 폭의 미인도였다. 꽃이 만개한 듯한 미모의 여성이 단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런 미인도의 여인을 보고 예종은 자신의 친동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오기 전 받은 이자겸의 제의나 구류복과 구장복이 등장하는 것 등을 봤을 때 예종의 제의가 혼인과 관련 있으리라고는 짐작했다. 그렇지 않다면 송과 요의 눈치를 보고 있는 고려가 가장 먼저 양국의 형제국이 될 것을 자초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직 내 제의는 끝나지 않았네.”
예종의 말에 다시 내관이 나타나 이번엔 작은 손도끼를 하나 내려놓았다. 그것을 보자 나는 안수궁주와의 혼인을 제의받은 것보다 더한 격동을 느꼈다.
“이것은…….”
“무슨 물건인지 따로 설명은 필요 없으리라 보네.”
“부월(斧鉞)을 제게 내린 것을 신하들이 알면 조야가 시끄러울 것입니다.”
말 그대로 부월이었다. 죽고 살리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임금에게 위임받은 작은 손도끼모양의 징표였다. 무엇보다 손도끼에 작게 쓰인 한문이 유난히 크게 들어왔다. 그곳에는 별무반이라 쓰여 있었다.
“별무반을 통째로 맡기겠단 말입니까?”
“공식적으로는 윤관과 오연총이 책임을 지겠지. 그러나 그들은 전장에서 자네의 말을 거역하지 않을걸세.”
이는 곧 자신의 통치 기반을 송두리째 나에게 주겠다는 것과 같았다. 예종은 대체 나의 무엇을 보고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아니 내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런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은 범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내가 물끄러미 예종을 바라보자 예종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복주의 상인들을 통해 그대가 천각 선생에게 한 말을 들었네.”
천각이면 장상영을 일컬음이다. 나는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대체 어떤 부분에서 예종의 믿음을 이끌어 냈는지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정의를 위해 굶어라. 대의를 위해 굶어라. 신념을 위해 굶어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너의 것을 가져가는 것이니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라. 지금 백성에게 그리 권할 수 있는 정치를 하고 있는가? 그렇게 허황한 소리를 내뱉으며 불순한 이익을 탐관오리가 차지하는 현실에서 말일세. 며칠을 굶더라도 백성이 원하는 것은 목민관의 말이 진실이길 원한다고 했지. 굶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위정자들의 무관심이 백성에게 가장 무섭다는 말, 그리고 자네는 바로 잔치를 열었지.”
기억이 났다. 복주의 주도를 점령하고 나는 관아의 재물을 모두 풀어 잔치를 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빼앗은 재물을 돌려주는 것은 쉽게 민심을 얻는 방법이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기존의 불만을 모두 나에게 덧씌우는 어려운 과정이다. 그건 하나의 의식과도 같다. 불만이 해소되면 희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오늘 술이 있었으면 참으로 좋았을 날이군. 그대를 다시 보기를 소원하여 그것이 이루어진 날이거늘.”
예종은 목이 타는지 물을 마셨다. 그의 얼굴은 술을 몇 잔 먹은 사람처럼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내가 그토록 그에게 중요하게 두드러졌다는 뜻일 것이다.
“자네는 이리 말했다. 발해는 술, 소금, 누룩의 유통을 국가가 독점하지 않았다. 세금의 징수가 관대한 탓에 백성의 살림살이가 여유로웠고 그 때문에 국가에 내는 세금이 자연적으로 늘어나 부유했다고 말일세. 내가 꿈꾸는 나라는 그런 나라일세. 구정물에 맑은 물 한 바가지를 부어 잠시 맑아지느니, 구정물을 모두 쏟아버리고 맑은 물 한 바가지를 남기겠다는 심정이란 말일세. 그러니 나를 도와주게.”
예종은 내 손을 강하게 잡았다.
“17만의 별무반을 어찌 써도 상관하지 않겠네. 아니 자네가 고려 왕에 오르고 싶다면 그리하게. 그러나 내가 본 자네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가진 것을 언제든지 놓을 수 있는 사람이지. 그러니 양국을 세우고도 명망 있는 신하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두고 혈혈단신 고려로 온 것이 아니겠는가? 고려를 변화시키고 싶었겠지. 자네가 그동안 뿌려둔 씨앗들을 통해서 말일세. 내 마음이 바로 그러하네. 자네의 꿈에 동조한 신하들을 신뢰하듯 나 역시 자네를 그렇게 신뢰하고 있네. 그러하니 나와 함께 대업을 이루어보지 않겠는가? 부처께서 말한 극락정토를 이뤄보잔 말일세.”
예종의 진정성은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런 와중에 곽여가 품속에서 하나의 두루마리를 꺼냈다. 이미 미인도와 병권을 내게 주었으니 더는 줄 것이 없다고 여겼는데 대체 무엇일까 싶었다. 곽여는 망설임 없이 두루마리를 잘 보이도록 펼쳤다.
이 정도였던가? 내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이것은……!”
“이것이 내가 꾸는 꿈일세.”
한 장의 지도였다. 그러나 그 한 장의 지도에는 예종뿐 아니라 이 땅의 군왕들이 꿈꿨던 비원(悲願)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