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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07화 (207/257)

00207  (27) 국난사양상(國難思良相)  =========================================================================

궁에 도착할 때까지 정지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지한 얼굴로 가득한 것을 보아 내가 했던 말을 어떤 식으로 해석할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

왕이 머무르는 처소는 건덕전이라 그곳으로 갈 줄 알았지만, 정지상은 탁 트인 구정(毬庭, 격구장)으로 안내했다. 격구를 하는 곳답게 궁에서 가장 넓은 장소였지만 내가 본 풍경은 그 넓은 장소를 잔뜩 메운 승려와 대신들이었다.

그중 유난히 늙고 병약한 대신이 제단 앞에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있었다.

정지상은 나를 붙잡아 더는 앞으로 가지 못하게 막은 후 승려들 뒤에 나란히 섰다.

“시중께서도 참 고욕이시군. 폐하께서 억지로 불러낸 터라 심기가 불편하실 터인데…….”

시중이라면 문하시중을 가리키는 것이고 고려에서는 황제 다음가는 막중한 자리였다. 이 시기에 누가 시중을 했던가 떠올려 보았지만 잠시 시중에 올랐던 자까지 기억하기에는 나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시중이 누구냐고 정지상에게 귓속말했다.

“아, 나는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여겼는데, 생각해보니 저분을 만난 적이 없겠군. 그래도 이름은 들어보았을걸세. 위계정(魏繼廷) 대감일세.”

이름을 들으니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고려에서 격구장에 왕과 대신, 승려가 모이는 행사는 몇 가지가 있지만 지금 상황으로 보아 기우제를 지내기 위한 것이다. 여름부터 겨울까지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다 보니 예종은 기우제를 계획했고, 그것이 오늘인 모양이었다.

‘위계정이라…….’

내가 그를 잘 모르는 눈치인 것처럼 보이자 정지상은 옆에서 그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한 나라가 전성기에 들어선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중 하나로 훌륭한 인재들의 출현을 꼽는다. 고려는 현재 최전성기를 누리는 중이고 위계정은 그 중심에 있는 명신이었다. 문종부터 예종까지 고려 전성기 시절의 왕들을 모시며 항시 간언과 직언을 일삼은 신하로 기록된다.

게다가 그는 불교의 폐해를 거론하며 불교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종교가 국가적 행사로 거듭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나이가 들어 관직에서 은퇴하려고 했지만 새롭게 보위에 오른 예종이 경험 많은 어른이 필요하다며 문하시중에 앉히자 김부식 등이 반대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유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정무를 제대로 보지 못할 것을 우려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위계정은 정무를 거의 보지 못해서 몸 상태가 좋을 때만 가끔 나온다고 했다. 그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을 보면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인 셈이다.

‘장흥 위씨(長興 魏氏)라…….’

어쩌면 예종이 노리는 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탐라에 머무르던 시절, 전라도 지역 호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보지 않았던가?

‘마한 귀족과 백제 귀족이 서로 대립하고, 거기에 귀화 귀족과 경상도에서 분가하여 전라도로 온 신라 귀족들까지 엮여 있었다. 장흥 위씨는 당에서 귀화한 가문으로 문하시중이 가문의 수장인 탓에 전라도에서 누구도 만만하게 볼 사람이 없다. 예종이 즉위 초기 그를 통해 전라도의 귀족을 제어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해가 가는 조치다.’

탐라 사건 이후 흉흉해진 전라 귀족을 달래기 위해 유화책 또는 감시책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이었다.

“곧 가구경행(街衢經行)이 시작될걸세. 중신과 승려들이 물러나면 그때 폐하를 뵐 수 있을 것이야.”

가구경행은 본래 백성의 복을 비는 의식으로 임금과 신하들이 하늘에 제를 지내면, 승려와 향리들이 도성 곳곳을 돌아다니며 경을 읊으며 축원했다. 이는 반대의 경우도 해당하여 나라에 나쁜 일이 있을 때도 액을 물리치려는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불교 국가인 고려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의식이라 할 수 있었고, 조선 시대 이후 억불 정책이 시행되자 절 안에서 탑을 도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의식이 끝나자 그 많던 인원이 썰물처럼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승려들 뒤에서 조용히 기다리던 나를 알아보는 신하들도 여럿 있었다. 몇몇은 반가운 표정이고 몇몇은 의아함, 몇몇은 불쾌함을 드러냈다.

뻔히 이럴 것을 알고도 나를 기다리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했다. 예종은 애초부터 나를 만나는 것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자신의 사람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함인 것이다.

예상대로 예종은 나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들기며 마치 어제도 만난 사람처럼 친근한 표정을 지었다. 그 곁에는 곽여와 유재가 따르고 있었다.

윤관이나 오연총 같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마도 별무반 양성에 여념이 없어서일 것이다.

“하하하, 짐의 신하가 복주의 왕이 되어 돌아왔구나.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는 냉큼 대국(송)에 고하겠지. 취중에 상국(요)을 욕했다가 어찌 그 사실을 알고 항의 방문을 받았을 때처럼 말이다. 대체 일러바친 자들이 누구의 신하인지 알 수가 없구나!”

몇몇 신하는 뜨끔했을 것이다.

처음은 용서하겠으나 이번에도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엄포로 들렸을 것이다. 그만큼 조정의 파벌 싸움이 극심하다는 뜻도 될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마한, 백제, 신라, 고구려 귀족들의 권력 다툼이 있고, 지역을 기반으로도 편이 갈린다. 또한, 송과 요에 포섭되어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들도 있다. 이들 모두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다.

이건 마치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직후, 조정을 보는 것 같았다. 망국의 왕족과 신하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 결국, 하나로 역량이 모이지 못하고 금세 제국은 갈라졌다.

고려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실제로 무인들의 반란이 일어난 것은 그런 꼴 같지 않은 문인들의 경쟁에서 소외된 자들의 시위나 마찬가지였다.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기 전에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어찌 짐의 은인인 그대에게 차만 내릴 수 있겠는가? 오늘만은 술을 마신다 해도 부처께서도 이해해주실 것이다.”

“폐하!”

술을 마시겠다는 말에 일부 신하들은 깜짝 놀라 통촉을 외쳤다. 그러나 예종은 그들의 말은 귓등으로 흘렸는지 먼저 앞장서고 있었다.

그러자 퇴청하려던 위계정이 비틀거리며 예종의 길을 막아섰다. 그 모습이 워낙 위태로워 몇몇 젊은 신하들이 황급히 뛰어와 위계정을 부축했다.

“문하시중께서 짐에게 하실 말이라도 있소?”

“태조께서 어지러운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고자 고려를 열었습니다. 여러 성군께서 그 위업을 이어나가 지금의 폐하를 만들었습니다. 방방곡곡 가뭄으로 고통받는 이때에 통분을 느끼지 못할망정 군왕의 약속을 깨고 음주를 즐긴다는 것은 열성조의 위업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노신의 충정에 감동하기는커녕 예종은 코웃음을 쳤다. 나는 그것이 둘 간의 연극인지 아니면 정말 예종의 본 모습인지 헷갈렸다.

“맞다. 시중의 말이 천 번 만 번 옳다. 백성이 고통받고 있는데 진정 덕 있는 군주라면 음주를 사양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신하들이 순간 어리둥절할 정도로 예종은 천변만화했다. 나는 예종보다 곽여를 주시했다. 곽여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는지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 눈썹이 호선을 그렸다. 눈웃음이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단 말이 될 것이다. 내가 와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시비를 걸어 신하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한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경고를 줄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짐이 보위에 오르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올 2월 문하시랑 최사추가 늙었음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가 가뭄의 초입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비가 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폐하…….”

위계정의 백미가 꿈틀거렸다. 이게 연기라면 실로 대단하다고 여겼을 정도로 안타까운 표정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때 남도에서 가둔 물이 없어 농사에 애를 먹는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그때 경들은 무어라 말했는가? 수춘궁(壽春宮)에서 잔치를 벌여 최사추의 은퇴를 기려야 한다고 말했지. 그날 나 역시 참가하여 음주가무를 즐겼다. 그때 쓰인 돈은 다 어디서 나왔는가? 그대 중에 자신의 녹봉을 보탠 사람이 하나도 있던가? 다 왕실 재정에서 나왔다. 그래, 짐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속으로 불만을 품을 수도 있겠지. 그때부터 가뭄이 시작될 줄 어찌 알았겠느냐고 말이다.”

“폐하…….”

“8월에는 어떠했는가? 고구려의 시조이자 우리 고려의 시조이기도 한 동명성왕에게 제사를 지내고 기념으로 창화문에서 활쏘기를 했다. 그날 나는 과녁에 잇달아 적중시켰고 하나같이 축하한다며 잔치를 열자고 했다. 당시 아바마마의 병세는 깊은 상태였다.”

예종의 말소리가 점차 격앙되자 신하들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것 같았다. 어쩌면 예종은 자신을 우습게 보는 신하들에게 한 번쯤은 위엄을 드러내고 싶어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10월에 아바마마가 승하하셨다. 그리고 11월, 바로 전 달이다. 그때 다들 무어라 했는가? 임금이 되었으니 마땅히 팔관회를 열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그 자리에서 법주를 마셨고, 부처에게 엎드렸다. 묻겠다. 축하를 위한 법주는 술이 아니고 물이더냐? 그때 누가 나에게 가뭄이 계속되고 있으니 팔관회를 열지 말아야 한다고 간언한 사람이 있더냐? 몇몇 신하가 간청했지만, 한목소리로 팔관회는 꼭 열어야 한다고 했던 사람들이 바로 그대들이다. 만약 요에서 사신이 와 연회를 열 것을 주장하여 짐에게 술을 권한다면 그대 중 누구라도 나서 가뭄을 이유로 그럴 때가 아님을 말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어디 있겠다면 나서보아라. 내일이라도 당장 요의 사신을 초청하여 그 기백을 보도록 하자.”

나는 예종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숙종 때부터 고구려, 발해의 실지(失地)를 회복하겠다는 생각은 계속 있었지만, 원정에 소요될 천문학적인 재정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사실 조선보다 앞서 한성으로의 천도가 물거품이 된 것도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북벌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까지 고려 왕실의 재정은 제법 탄탄한 편에 속했다. 벽란도를 통한 해상 공무역, 요와 여진을 상대로 한 육로 공무역이 상당한 이득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쌓은 재정도 20만에 육박하는 원정군을 조직하려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도움을 주어야 할 지방 호족들은 도무지 도움을 주려고 하지 않고 외려 권력 다툼에만 골몰하고 있으니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그런 신하 중에는 북벌에 회의를 표명하는 자들도 많았다. 지금 고려의 땅도 비어 있는 곳이 태반인데 고토를 얻은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주장이 하나, 여진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곳을 터전으로 살고 있고, 고려를 상국으로 모시고 있는데 괜히 적으로 만들어서 좋을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주장이었다. 대체로 그들의 공통점은 왕실 재정이 국방에 쏠리는 것보다 국토 개발에 쓰이기를 바란 것이다.

그것은 곧 그 땅을 사는 귀족들에게 상당한 이득이 될 뿐 아니라 왕이 지나친 군사력을 가지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광종이 호족의 사병을 철폐하면서 막무가내식으로 밀렸던 선례가 있기에 더욱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숙종이나 예종은 강단 있는 왕이었다. 최소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추진하는 근성이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문종, 선종, 헌종 같은 순한 임금들을 상대했던 귀족들은 숙종이나 예종 역시 그러리라고 잘못 생각한 셈이었다.

“그러나 짐은 노신의 충언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짐이 노신의 충언을 받아들여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는 만큼 그대들 역시 짐의 신하라면 몸가짐을 단정하게 가져야 할 것이다. 문하시중의 생각은 어떠한가?”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제왕이 본을 보이면 신하 역시 따르는 것이 법이옵니다. 만약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어찌 폐하의 신하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제야 몇몇 신하들은 눈치를 챈 듯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종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 눈에 선하게 그려졌을 것이다. 실제로 이시기에 예종이 내린 교지가 있다. 읽었을 때는 그저 그렇구나, 정도로 넘어갔지만, 이런 상황을 겪으니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백성 간에 매매되는 쌀과 은제품의 질이 떨어진다는 상소를 받았다. 그대들이 짐에게 그토록 배울 것을 강조하는 태조 이후 선조 임금들은 법으로 쌀에 모래를 섞지 말고, 은에 구리와 쇠를 섞지 말라고 가르쳤다. 짐 역시 그것이 옳다고 여겨 그대들 앞에서 다시 말하고자 한다.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가 법으로 금지한 것을 무시하는 것은 고려의 법통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처사다. 이러한 짓은 하늘도 용서치 않으며 백성의 빈곤을 더욱 가중시키는 행위다. 짐은 오늘 추밀원에 명하노니 만약 그러한 저질품을 유통하거나 방조한 관리들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짐의 처사가 그르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어디 앞으로 나와 이유를 말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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