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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06화 (206/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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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국난사양상(國難思良相)

여름 4월(1105년 음력 4월) 대리의 재상 고재가 반란을 일으켰다. 성도 지주, 조장은 고재의 반란에 동조하여 3만의 향병을 파견했으나 이는 대리의 술수였다.

양산(凉山)에 집결한 3만의 향병은 미리 협곡을 점거하고 있던 대리 군의 공격에 대패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에 놀란 조장은 조정으로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으나 마침 요에서 사신이 와, 대명부가 대국을 침지(侵地, 침략당한 땅)했으니 마땅히 돌려주고 손해를 배상하라며 조야가 시끄러운 형국이었다.

대리 군은 파죽지세로 성도로 진격했고, 조장은 금은보화를 챙겨 서역으로 달아났으나 이후 전해지는 소식은 없다.

이로써 대리는 운남, 귀주 외에 사천까지 장악하여 송의 근심거리로 떠올랐으나 서하와 요의 압박, 거기에 더해 복건의 반란까지 더해지면서 어느 쪽에 중점을 두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송 조정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더욱 혼란에 빠트리는 일이 벌어졌다.

*

겨울 10월 고려의 왕이 훙(薨, 왕이 죽음) 했다.

묘호를 숙종이라 했고, 태자 우(예종)가 그 뒤를 이었다.

윤관, 오연총, 곽여가 새로운 고려 왕의 근신이 되었다.

*

“복건의 난이 네 녀석의 주도였다니……. 이름이 같아 설마 했지만 정말이었구나.”

이자겸 믿을 수 없다는 듯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몇 가지 사실을 밝히자 그제야 믿음이 생기는지 수긍하는 눈치였다.

“상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미 그곳은 독립한 왕국이나 다름없다고 들었다. 일국을 창업하고 유지하는 것은 한시도 부족한 판에 나를 만나러 고려로 돌아온 연유가 무엇이냐?”

이자겸의 눈매는 내가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 샅샅이 살피겠다는 듯 예리했다.

그러나 나는 태연하게 읍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원하던 국혼이 성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먼저 축하를 올리는 것이 예의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이자겸의 얼굴에 살짝 기쁨이 떠올랐다.

숙종에게 꾸준히 견제를 받으며 막후에서 세력을 쌓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였으나 숙종이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자신의 딸을 예종과 결합해 옛 영화를 되찾고자 했었다.

이자겸은 장밋빛 미래를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예종은 그리 녹록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예종 곁에는 국사 교과서를 수십 장 채우고도 남을 명민한 신하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의 견제로 이자겸은 예종 시절에도 그리 빛을 보지 못한다. 예종이 죽고 외손자인 인종이 즉위하고 난 다음에야 본격적으로 세도를 휘두르는 것이다.

나는 예종이 살아 있는 동안 이자겸이 품을 절망감을 다른 방향으로 분출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내가 이번에 새롭게 본 딸이 있다. 내 일찍이 장녀를 너에게 주려는 생각을 품었던 만큼 이번에는 내 뜻을 받아들여 주는 것은 어떠하냐?”

이자겸의 난은 흥미로웠던 만큼 이자겸의 가계도는 어느 정도 꿰차고 있는 나다. 이 시기 권세가들끼리 합치는 수단으로 애용되었던 혼례에서 짝이 부족한 집안은 양녀를 들여 결합의 수단으로 쓰기도 했다.

물론 나는 이 제안을 받아들일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이자겸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이소도 너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리 각별한 것을 안다. 앞으로도 그 마음을 변치 마라. 그건 그렇고, 어디 본론을 들어보도록 할까?”

이소와 잘 살라는 이야기는 인사치레로 들렸지만, 이자겸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인사치레로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의도가 담긴 것일까? 생각하다 보니 과거 형주를 방문하여 유표가 내게 혼인을 제의했던 것이 떠올랐다.

‘설마.’

누군가 나에게 혼인을 제안하려고 하고 있고, 그 사실을 이자겸이 미리 알고 있다면 내 의중을 확인하고 못을 박으려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자겸이 경계할 만한 자. 그런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이자겸의 우려는 바로 현실이 되었다.

대화를 막 시작하려는 찰나 궁에서 사람이 나왔기 때문이다.

“박정한 사람 같으니, 그동안 무얼 하느라 그리 소식 듣기 어려웠는가? 새롭게 보위에 오른 폐하께서 그대를 보고자 하니 속히 입궐하라는 어지가 떨어졌네.”

그는 정지상이었다. 그는 이미 어엿한 문인 대가의 풍모를 풍기고 있었는데 그를 보는 이자겸의 눈빛이 그리 곱지 않아 보였다.

아마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황실의 인척으로서 꾸준히 권력을 잡고 있던 인주 이가는 새롭게 떠오르는 사림 명문가들에게는 타도의 대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존 세력이 사라져야 그 세력의 빈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 세력 또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신진 세력과 맞설 수밖에 없다.

이자겸은 겉으로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보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척 바쁘신 폐하니라. 직접 찾는 사람은 몇 되지 않거늘 너를 찾았으니 이는 촌각을 다룰 일이니라. 이야기는 나중에마저 하기로 하고 속히 가보도록 하여라.”

고려에 도착해서 이소, 히카리 등과 대화를 제대로 나누기도 전에 이자겸을 먼저 만났다. 벽란도를 통해 들어오는 외인들은 모두 기록되어 조정에 보고되는 만큼 윤관이나 오연총, 곽여 같은 이들이 나를 보자고 할 줄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며칠 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부르는 것을 보면 나름 급한 일이 있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어쩌면 혼인에 관계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종이라면 이자겸이 가장 두려워할 만한 사람이 아닌가?

정지상과 급히 문을 나서면서 왠지 이소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회포를 풀지도 못하는 것은 나로서도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도사 영감 때문에 자네의 행적은 관심의 대상이었네. 자네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멀리서 자네를 지켜보고 있었지.”

정지상에게 도사 영감이라고 불릴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금문우객 곽여였다. 그는 나의 성정과 실력을 체험한 사람 중 하나였으니 그가 그때부터 나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아니 어느 정도 의도한 바가 있었다. 예종과 윤관의 관심이 나에게 쏠릴수록 나는 고려에서의 활동이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무슨 목적으로 이자겸에게 갔는지도 우리는 알고 있단 말일세. 항주에 웅크리고 있는 환관(동관) 때문이겠지.”

그 정도까지 유추할 수 있을지는 몰랐다. 생각해보니 김부식, 정지상, 윤언이 같은 자들이 합심하여 내 경로를 통해 생각을 추측한다면 능히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폐하께서는 자네 때문에 무척이나 고민을 거듭하셨네. 도사 영감은 자네가 고려의 신하가 확실하다고 주장했지만, 자네의 행적만 보고 있자면 그게 어디 신하가 할 일인가? 태조(왕건)와 같은 행보지. 그래서 폐하를 뵙기 전에 한 번 물어나 보세.”

주위에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정지상은 바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진중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자네는 폐하의 신하가 맞는가?”

그 질문은 일 초의 고민도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즉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정지상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질문이 틀렸네.”

“질문이 틀리다니?”

“고려의 신하냐고 물었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을 걸세.”

“폐하의 신하가 아니라, 고려의 신하?”

영민한 정지상은 그 뜻을 금세 알아차렸다.

“신임 폐하는 양군(養君)의 재질이 있네. 신하로서 매우 흡족한 일이지. 일찍이 요 사신의 씨름 내기를 모두 이기고 폐하의 권위를 지킨 자네라면 나는 틀림없이 고려 부흥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네. 설사 다른 사람이 보위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고려 부흥에 앞장서겠다는 그 마음가짐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는가?”

“부흥이라……. 지금 고려의 사정은 어려운가?”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지. 가뭄이 계속되어 농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유랑 걸식하는 백성이 늘고 있네. 게다가 권문세가들은 백성의 경제적 어려움을 틈타 싼값에 땅을 얻고 노예처럼 부리고 있으니 어찌 어렵지 않다고 할 것인가?”

“여진을 공격하기 위해 별무반 17만을 양성하는 것은 유랑 걸식하는 백성의 구휼에 조정은 무관하다고 판단한 것인가? 어찌 책임을 권문세가에 떠넘기는가?”

정지상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그에게는 일침이었을까?

이 물음은 윤관의 여진 정벌을 볼 때마다 항시 떠올랐던 것이다. 흉년이 들어 백성이 어려운데 3년에 걸쳐 17만의 병력을 훈련했다. 우리나라 역사를 모두 둘러보아도 이만한 훈련과 재정, 병력이 동원된 원정은 없었다.

윤관의 동북 9성 개척은 그 당시 활화산 같은 기세였던 여진족을 상대로 했던 탓에 실패로 끝났을 뿐만 아니라 국내 경제를 권문세가에 예속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정중부를 시작으로 무인의 난이 일어난 계기도 결국 그렇게 커진 권문세가들의 횡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이자겸은 그 시작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렇게 많이 배우고 똑똑했다는 김부식조차도 권문세가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고, 외려 무인 시대로 가는 불씨가 되었다.

“참으로 통렬한 질문이군.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도가 되네. 자네의 질문을 들으니 자네가 고려의 신하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되는군. 그저 생각난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질문으로 보이네만, 그렇다면 그 답 역시 자네는 가지고 있겠군.”

정지상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묻지는 않겠네. 내가 들어보았자 한미한 관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작은 일뿐일세. 결국, 폐하가 자네와 만나야 하는 이유가 있었구먼. 노리고 있었는가?”

여유를 되찾은 정지상은 내 마음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같았다. 이자겸을 먼저 만나고 예종을 만날 것으로 예측했던 것이 어긋나 예종을 먼저 만나고 이자겸과 다시 자리를 갖게 된 것이 과연 어떤 결과로 되돌아올지 나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원칙은 있었다.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군왕이 정치하는 이유.”

“음?”

정지상은 무슨 말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다.

“자리를 유지하고자 백성을 다스리는 것인가? 백성을 지키기 위해 자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인가? 폐하의 선택은 어떤 것일까?”

“자네…….”

정지상은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이내 말없이 종종걸음을 했다. 내 질문의 답에 따라 내 태도가 바뀔 것임을 은연중에 눈치챈 것이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겠지만 나는 외려 시원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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