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05화 (205/257)

00205  (26) 일광천하(一匡天下)  =========================================================================

‘전진을 세운 이는 왕중양이다. 그가 태어나려면 아직도 몇 년 기다려야 하는 상황. 게다가 마흔이 넘어서야 전진을 만들었다고 나는 알고 있다.’

왕중양은 섬서성 세도가의 집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왕이정의 일맥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다. 다만, 아직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선에 의해 전진이 생겼다고 하니 내가 아는 역사와는 다른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역사의 흐름은 비슷하면서 세세하게 달라진 부분이 존재했다. 그것은 과거의 나, 또는 현재의 내가 끼친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화산논검에서 승리한 자는 천하제일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는 오랫동안 민간에 구전되온 의심할 바 없는 전설이었지. 그러나 승자가 가려졌다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만약 이선이 민국실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화산논검의 승자는 응당 민국실록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진정한 주인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들의 힘을 뜻있게 다뤄줄 진정한 천하제일인 말일세.”

단정홍은 말을 마치고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은 마치 그 사람이 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저는 한미한 집안의 말썽꾸러기였을 따름입니다. 그러다 우연히 운명처럼 무부(武夫)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힘을 쓰는 일에는 자신 있으나 이선 사문이 원하는 진정한 천하제일인의 자격에 맞는다고 보십니까?”

“나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네.”

단정홍의 단언에 외려 주변이 웅성거렸다. 이토록 단언할 수 있는 근거를 대체 알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속을 다 들여다보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도 확고한 주장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민 태조는 내가 알기로 백면서생으로 알고 있네. 그런 그가 천하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능력 있는 장수들을 수족으로 부릴 수 있었기 때문이지. 능력 있는 재사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것은 아닐세. 단지 민 태조의 뛰어난 정치적 역량이라면 충분히 재사들의 공백을 메울 정도는 된다고 보았지. 아무리 엄청난 계략을 세운들 전쟁에서 이를 뒷받침해줄 장수가 없다면 성공을 장담할 수 없고, 장구한 계략보다 외려 장수들의 개인 능력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예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당시 민 태조의 대업에 가장 필요했던 인재들은 뛰어난 장수들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였다. 그러나 역사가 흐른 뒤에 찬찬히 그 시대를 돌아보면 단정홍의 주장은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노숙과 가후를 얻으며 승승장구를 거듭했다고 믿었지만 위연과 허저, 태사자, 송겸 등이 없었다면 과연 초반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

“이선과 사문은 처음부터 그런 고민을 바탕에 깔고 생긴 것은 아닐까? 민, 당, 송은 차이가 있을지언정 문치(文治)를 통치 사상으로 정립했다. 뛰어난 재사는 얻기 쉬우나 뛰어난 무장은 얻기 어렵다는 말과 같다. 고래로 천하의 주인은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민은 백면서생 이준경이 천하를 잡았으나 그 후 혼란기의 왕조와 당, 송의 태조들은 모두 장군들이었다. 지금의 천하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북방과 남방의 군주 중 문치라고 자신할 만한 곳은 오직 송 밖에 없다.”

“결국, 강한 힘이 왕조를 만든다. 그러니 화산논검을 통해 천하제일인을 뽑아 그를 구심점으로 삼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내부의 일은 천하의 재사들을 운집시켜 처리한다. 장구한 세월 그러한 방침으로 이선과 사문이 존재한다는 뜻입니까?”

“동파 선생은 그런 생각을 내게 비췄네. 나 역시 그 생각에 동조하는 바이고.”

누구의 생각이었을까? 내가 이미 주장한 바가 있는 왕패병용(王覇幷用)과 같은 생각이었다. 과거, 시대에 따라 제도가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나이니만큼 그런 사상에 동조하는 신하들 역시 많았다.

그렇다면 시대의 변천에 따라 혼란을 종식하는 방법 역시 고민해봄 직하다.

왕패병용이란 것은 새로운 조류는 아니었다. 이미 한나라 시절부터 존재했던 주장이기 때문이다. 다만, 모든 것을 가진 군왕이 자신이 가진 권력 일부를 기꺼이 신하들에게 내줄 수 있는가가 화두였다.

“패란 것은 힘으로 인(仁)을 미리 빌리는 것입니다. 수백만의 백성이 죽기 전에 그러한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수만의 위정자를 처리함으로써 천하를 안정시킨다는 것이지요. 처리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위엄과 은혜입니다. 백성에게는 덕과 형벌이 함께 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안정을 위한 자용(資用, 밑천)과 같다는 것을 알리는 것 역시 중요한 일입니다. 이를 위해 군왕은 유약함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유약함은 육체적인 힘과 강한 세력이 있고 없고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강함입니다. 화산논검이 말 그대로 논검인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육체적인 강함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러한 힘을 정당한 곳에 사용할 수 있는 바른 인성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단정홍에게 하는 이야기였지만 기실 그중 반은 혼잣말처럼 나에게 되묻는 말이기도 했다.

그들은 오랜 세월 기다렸을 것이다.

천하제일인이 천하를 얻는다는 발상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고고한 자리에 있는 위인이니만큼 국정 운영에서도 신선과 같이 그저 지켜보는 태도를 견지할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나서야 할 때는 전횡하는 신하를 징계하여 본으로 삼는 것과 강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일이다.

이는 정도전이 외친 신권 정치와도 맥이 닿아 있다. 오늘날 영국식 의회정치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도 이와 비슷한 이유를 댔지.’

나폴레옹은 쿠데타에 성공하자 세 명의 총재가 프랑스를 통치하는 로마식 삼두 정치를 선보였다.

자신은 대외적인 군사 부분을 맡고 법과 내정 등은 다른 총재들에게 일임시킨 것이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패하지 않는 한 지지를 잃지 않을 것이라 자신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를 간과했다.

숱한 전쟁 승리로 얻은 지지는 패배했을 때 승리 이상의 대가를 요구한다는 사실이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 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 통치할 수 없는 법입니다. 통치는 말에 탄 자가 아니라 말을 키우고, 소를 몰 줄 아는 인자(仁者)의 몫입니다.”

나폴레옹의 실패를 뻔히 아는 내가 같은 실수를 범할 리 없었다. 복건에서 봉기한 이래 나는 믿을 만한 자들에게 권리를 이양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화산논검은 언제 열립니까?”

이선 사문이 정말 단정홍의 말과 같이 민의 뿌리를 계승한 자들이라면 내가 그들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천하제일인이 될 마음을 굳혔나?”

설사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선 사문을 거둔다는 것은 곧 천하제일인이 된다는 뜻과 같았다. 그러하니 단정홍의 질문에 주변인들이 눈을 빛냈다.

“본신의 실력으로 승부를 보는 것도 아니고 논검입니다. 무지한 제가 어디까지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그들의 진의를 알기 위해서라도 꼭 참가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로 화산논검은 기한을 두고 열리는 것은 아니라 들었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정말 시험해볼 만한 사람이 나타나야만 열리는 것이 화산논검이니…….”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하북에선 삼절을 모두 꺾는 자, 강남에선 오은의 인정을 받는 자. 사문에서 오랜 세월 실력과 인품이 출중하다고 판단하여 추천한 자. 이선의 제자. 이 정도가 되면 능히 화산논검에 초청받기에 부족함이 없지. 지금도 그들은 자네를 지켜보고 있을걸세. 그리고 곧 초청장이 날아들걸세. 그건 내가 보장하지. 모산의 도사가 자네와 함께 있고, 하북 삼절의 일인을 꺾었으며, 강남오은의 인정을 받은 자가 바로 자네 아닌가?”

단정홍의 설명에 단화예는 내가 달리 보이는 모양이었다. 표정부터가 존경을 가득 담고 있었다. 어쩐지 자꾸 매달릴 것 같아 귀찮은 짐을 지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정홍은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중요한 볼일은 끝났고 어디 코가 비뚤어지도록 한 잔 마시세. 나는 자네가 10년 동안 서역에서 겪은 일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란 말일세.”

“10년 동안 서역을 전전했단 말입니까? 그곳은 무척 험한 곳이라 들었습니다만…….”

단정홍의 말에 단화예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단정홍이 가장 바라고 있었던 것은 공적인 일보다 지금의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우리 일행조차도 나의 과거를 아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작은 연회가 베풀어지자 나는 그 자리에서 해남도를 떠나 서역에서 겪었던 일들을 풀었다.

이야기는 시간을 잊게 하였다. 그들은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에 무릎을 쳤고, 위기에 빠졌을 때는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일까?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그 사이 동이 텄을 때 유대 관계는 한층 깊어진 것 같았다.

논의되었던 고육계는 발 빠르게 진행되었다. 고가는 사천으로 사람을 보내 복건과 대리가 손을 잡았음을 알리고 만약 사천의 송군이 자신을 도와 대리로 얻도록 힘을 써준다면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다고 자신했다.

이때 성도부로(成都府路, 익주)와 동천부로(潼川府路, 동익주)의 지주(知州, 도지사)는 경사에 멀고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채경 일파와는 무관하게 영종의 핏줄인 조장(趙將)이란 자가 맡고 있었다.

휘종 즉위 초기 조심(趙?)이란 왕족이 모반을 기도하다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왕족들은 저마다 몸조심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조장은 마침 자리가 난 익주 지주의 자리에 선뜻 나서 경사를 떠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워낙 척박한 탓에 험난한 생활이 펼쳐질 것으로 여겼던 익주 지주의 자리는 뜻밖에도 그에게 잘 맞았다. 그는 천고황제원(天高皇帝遠)이란 말의 유래를 제대로 실감했다. 한 마디로 하늘은 높고 황제는 멀리 있으니 이곳에서는 자신이 왕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관리들은 그에게 줄 대기 바빴고 그렇게 거둔 재물은 풍성하게 쌓였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불순한 마음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왕처럼 살고 있지만, 그는 수십 명 지주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는 정말 왕이 되고 싶다.

그러한 때 대리의 재상이 역모를 일으키겠으니 도와달라는 밀사가 왔다. 복건의 반란 도당이 대리에 도착하여 남해 일대를 나눠 먹기로 했다는 정보도 전했다.

재상의 뜻대로 이뤄진다면 조장은 왕이 될 기회를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설사 일이 틀어져 왕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조정으로부터 큰 포상을 받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일단 군대를 출병시켜 국경까지 향한 후 재상의 말이 맞는지 검토하고 움직이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그의 명령에 향병(鄕兵) 3만이 남하를 시작했다.

그러나 조장이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천고황제원이라 불릴 정도로 중원 중심에서 떨어진 익주였기에 관리들은 지주의 눈치만 살필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관리들은 지주에게 바친 향응만큼 백성에게 뜯어내고 마음대로 법을 왜곡하여 재산을 부풀렸다.

게다가 서하와 인접한 섬서 지역의 국방비도 과중하게 물렸다. 안전함을 보장받는 내륙 지역이란 명목이었다.

그러하니 백성의 생활은 궁핍했고 민심은 폭발할 일대 계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소식을 듣고 혀를 찼다. 기대대로 움직여 주는 것은 우리가 바라던 것이었지만 그만큼 아래를 돌보지 못하고 욕망에 충실하다는 증거이기에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같은 조씨이거늘 어찌 이리도 다르단 말인가? 일금일학(一琴一鶴)은 기대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단 말인가?”

영종 시절, 왕족 중 조변(趙?)이란 자가 익주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는 익주에 부임할 때 거문고 하나와 학 한 마리를 가지고 갔는데 떠날 때도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즉, 청렴결백했고 백성의 민생을 살피는데 전력을 다했다는 뜻이다.

그런 자가 가득하다면 내가 나설 일은 없었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