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04화 (204/257)

00204  (26) 일광천하(一匡天下)  =========================================================================

단정홍은 내가 말한 것이 가능성이 있는 방법인지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듣도 보도 못한 방법이지만 아예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군. 그렇다고 모소를 모두 내쫓을 수도 없으니 잘 구슬려 금사강 하류로 옮기도록 조처해야겠네.”

그 정도면 충분한 조치였다. 최소한 대리는 쿠빌라이를 상대하면서 멸망 분기점 하나를 지운 셈이었다. 물론 단정홍에게는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단정홍은 나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정보가 민국실록의 값어치만큼 한다고 볼 수 없네. 그러니 우리 이리하세.”

알려주기 싫어서 그런 것인가 잠깐 생각해보았지만 단정홍은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움켜쥐자 그제야 그 뜻을 알아챘다.

“비무입니까?”

단정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실의 아이들은 내가 무적이라고 믿고 있지. 삼절과 오은을 비롯해 심지어 이선 사문 일사도 감히 범접지 못한다고 말일세. 그래서 자네가 대리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같이 비무를 청원했다. 천하제일이 바로 나라는 것을 증명해주길 바란 것이지. 나를 이긴다면 기꺼이 귀물의 행방을 알려주지.”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왕실에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하하하. 내 말이 그렇게 들리나?”

내 질문에 단정홍은 쓴웃음을 흘렸다. 그는 내 제안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민국실록의 행방을 자연스럽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무인들끼리의 승부를 두고 내기를 거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영향력이 상당한 물건이다 보니 쉽게 행방을 말해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본래는 대리가 온전하게 그 물건을 수습할 수 있는 수단을 취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고민은 비무에서 승리한 다음에 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비무는 미리부터 준비되어 있었는지 왕실과 재상 측 인물 몇몇이 참관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그중 왕실의 참관자들은 청년들이 유독 많았다. 나는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 중에 단예가 있지 않을까?’

김용의 소설, 천룡팔부는 세 명의 주인공이 존재한다. 그중 한 명이 단정순의 아들로 차기 대리국왕 자리를 예약받은 단예가 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호리호리한 미남자는 이곳에는 없었다. 역시 소설은 소설이었다는 이야기일까?

‘따지고 보면 내 이야기 역시 소설과 다름없는데…….’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일을 겪었다. 실제 척준경이 그러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10대 중반에 숙종의 거사를 도와 얼떨결에 벼슬길에 오른 척준경이 10년의 세월을 거슬러 재등장했을 때, 무적의 신위를 보였다는 것 그 하나는 진실이었다.

나는 과거로 돌아가 고영창에게서 수벽타를 전수받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의 호흡을 기억하며 숨을 고르게 안정시키자 주위는 적막으로 뒤덮였고 오직 승리라는 목표만이 떠올랐다.

단정홍은 세월이 무색하게 여전히 재빨랐다. 그는 중앙을 점한 나와 일정 거리를 두고 주변을 배회하며 틈을 노렸다. 이른바 아웃복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손 마디마다 동전이 꽂혀 있었다. 평범한 동전이지만 그의 손에 들어가면 언제든지 목숨을 노릴 수 있는 무서운 암기였다.

하나의 전장이 생성되고 마치 독수리가 하늘에서 바라보듯 입체적인 영상이 뇌리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런 경험은 이미 몇 차례 경험한 바가 있었지만, 위기 순간마다 항상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지금이 진짜 위기라는 뜻일 수도 있었고, 그렇지 않다면…….

‘체득(體得),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몸이 깨닫는다.’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이미 승패를 떠나 나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아니 승패를 초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승패는 내 손에 있는 셈이었다.

동전이 공기를 가르며 번개같은 속도로 나를 때릴 때 나의 손끝 역시 빠르게 움직였다.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하나씩 쳐내자 주변에서 탄성이 흘렀다.

손가락 마디에 넣을 수 있는 동전은 모두 8개. 시차를 두고 전신 요혈을 노린 공격이 허망하게 막히자 단정홍은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이제 늙긴 늙었구나. 예전 같았으면 네가 손가락으로 튕기는 순간, 외려 손가락이 부러졌을 것이다.”

“서로 이제 시작이 아닙니까? 아직 몸도 풀지 않았습니다.”

“존장의 체면도 봐주지 않는 비정한 놈 같으니라고.”

한 번의 공격, 한 번의 방어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단정홍은 더 공격할 흥미를 잃어버렸는지 주위에 외쳤다.

“모두 잘 봤으렷다!”

모두가 대답하자 단정홍은 그대로 비무장에 양반 다리로 주저앉았다.

“지금 본 것이 다들 알겠지만 팔전비(八錢飛)니라. 8개의 동전을 사람이 가장 막기 어려운 전신 요혈에 시차를 두고 때려넣는 나의 비기가 실패한 이상 더 해볼 필요도 없는 비무다.”

“그러나 숙부님. 소질들이 보기에 숙부님께서도 아직 온 힘을 다하지 않는 것이 보였습니다. 설사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하더라도 일 합에 무너진 것이 천하에 알려진다면 숙부님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소질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화예(和譽), 그럼 네가 한번 양왕을 상대해보겠느냐?”

“예? 소질이 어찌…….”

화예라는 이름을 들으니 그제야 단예의 실존 인물이 단화예였다는 이야기가 얼핏 떠올랐다.

“무인이 일 합에 지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처음부터 비기를 아껴 일백 합을 겨룬 들 그런 비무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그리고 설사 수치를 당하더라도 내가 당하는 것이지 네가 당하는 것이 아니다. 혹여 왕가의 이름이 실추될 것을 걱정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내가 몸소 너를 가르치고자 했을 때 잘 따랐더라면 비무자가 바뀔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느냐? 11년 전, 눈앞의 양왕은 지금의 너희와 비슷했다. 천둥벌거숭이였지. 그러나 지금의 그는 이미 내가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숙부님.”

단화예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숙부의 질책이 너무 뜻밖이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런 기회를 노린 것인지도 몰랐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하거라.”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양왕과의 비무를 소질도 꼭 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겁을 집어먹은 단화예를 보며 단정홍은 고개를 흔들었다.

“재상이 고육계를 펼칠 것이다. 서천의 송군을 대리로 끌어들여 섬멸하기 위한 행동이니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서라도 왕부는 양왕과 손을 잡았다고 믿게 해야 한다. 태자인 네가 양왕과 함께 행동하는 것만큼 확실한 것이 어디 있겠느냐?”

중국도 그렇고 고려나 조선도 그랬지만, 태자는 차기 권력자라는 의미였고 그 중요도가 매우 높았다. 그러나 대리는 왕이 불도를 닦기 위해 자리를 내놓는 경우가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자식 역시 일찌감치 불자의 길을 걷는 경우도 많았다. 굳이 장자 계승을 내세울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대리의 역사는 그래서 타 왕조들과 다른 신기한 점이 있다. 왕권을 둘러싼 씨족 간의 다툼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단화예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재상의 고육계에 앞서 숙부께서 위신을 버리는 고육계를 보이셨는데 소질이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꺼이 이 한 몸을 던지겠습니다.”

단화예는 단정홍이 일부러 일 합에 패했다고 믿는 눈치였다. 이리 허무하게 질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단정홍은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직 그와 나만이 이번 비무의 결과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더라도 내 허리춤에서 칼이 뽑히는 순간 일도양단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그는 과거에 이탁을 걸음이 느린 중장보병에 비유하며 자신이 그를 죽이지 못하더라도 이탁 역시 자신을 잡지 못할 것이라 자신한 적이 있었다.

현재로 돌아와, 단정홍의 팔전비를 막고 내 손이 허리춤으로 향하는 순간, 나도 그도 느꼈다.

뽑는 순간 끝이라는 것을 말이다. 중장보병보다 강해진 중장기병? 그런 것으로 설명하기에는 이미 한계를 뛰어넘었다.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나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데 단정홍이라고 어찌 잴 수 있으랴?

단정홍은 툴툴거리며 말했다.

“귀물은 종남산(終南山)에 있네.”

“네?”

종남산이라니? 민국실록이 종남산에 있단 말인가?

“정확하게 말하면 이선의 수중에 있지.”

이선의 수중에 민국실록이 있다는 단정홍의 말에 나보다도 주위가 더 난리였다. 그들은 민국실록을 자신들이 보관하고 있다고 믿었던 모양이었다.

“자네가 서역으로 떠나고 5년이 지나 동파 선생을 찾아갔었지. 동파 선생이 그때 모든 사실을 알려주었네. 자네 혹시 민 태조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나?”

내가 민 태조였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믿어줄 상황도 아니었고 단정홍의 질문도 내게 딱히 답을 요구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침묵을 지키자 단정홍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설명을 이어갔다.

“동파 선생은 호기심을 가지고 민국실록을 찾아 나서려 했지만, 정적들 때문에 거동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여건이었지. 결국, 모든 것은 동파 선생의 머릿속에서 나온 상상이었네. 그렇지만 워낙 그럴듯해서 나도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지.”

소동파는 내 아내들에게 집중했다. 특히 후한 황실의 비밀 재정을 담당하고 있던 왕가와 안식국, 신라 이 셋 중 하나에서 망국의 과정 중에 민국실록을 빼돌린 것은 아닐까, 의심한 것이다.

그중 안식국과 신라는 내가 이미 거쳐온 바가 있다. 그러나 흔적을 찾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왕가뿐이다.

“왕가가 일찍이 후한 황실의 재정을 관리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고 따라서 민 태조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민국실록의 보존을 왕가에 부탁했을 수 있다는 것일세.”

물론 나는 그런 언행을 남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쩌면 왕가에서 나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들은 후한 시절에도 겉포장에 이목을 치중시켜 자신들의 실체를 감추는 모습을 보였다.

“민 제국의 도성은 장안이었지. 자네 종남산이 어디 있는지 알고는 있나?”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장안.”

장안 남쪽에 종남산이 있다. 나는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면 가끔 그곳에서 제를 올리곤 했다. 실효성이 없어 내키지 않아도 때로는 백성에게 보여줘야 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선의 정체는 참으로 모호하지.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이 또는 그들의 후예가 이선을 자처하며 수백 년간 종남산에 머물고 그곳을 신성하게 여기는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는 행위일세. 근자에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사문과 같은 문파를 만든다고 하더군. 전진(全眞)이라고 하던가? 그런데 그곳만 수상한 것이 아니야. 화산논검이란 이름은 들어봤겠지?”

몇 번 들었었지만, 그저 소설로만 보던 익숙한 이름이라고 여겨 별로 관심을 두지는 않았었다. 현실에 몸담은 나와 관계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동파 선생은 사문의 존재에 의문을 품었지. 다들 종교적 색채를 띠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같이 힘을 가진 무림인들의 집단이다. 이는 종교를 내세워 관의 관심을 피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나같이 자리가 절묘하다. 청성과 화산, 소림은 종남을 보호하듯 옹기종기 모여 있고 모산은 민 태조 힘의 근원이었던 강남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가설이 단정홍에게서 쏟아져나왔다.

============================ 작품 후기 ============================

연재 많이 기다리셨을텐데 이제야 글을 올려 죄송합니다.

까페에도 글을 올렸지만 며칠 새 in 삼국지의 마지막 교정 작업을 끝내느라 시간을 보냈습니다. 새로운 외전이 2편 분량정도 들어갔습니다. 현재 출시일은 7월 25일 이전 정도로 잡고 있습니다. 5~6월 사이 조아라에서 구입 공지가 나올 것입니다.

지금 막 불꽃처럼 쓰기 시작하고, 고려편 다음 글은 월요일쯤 쓸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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