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2 (26) 일광천하(一匡天下) =========================================================================
공교롭게도 천하 사방에 각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권신들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백성에게 가혹한 사회일지 몰라도 권력자들에게는 태평성대라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호오, 차도살인(借刀殺人)에 동패구상(同敗具傷)이라……. 참으로 생각을 많이 하셨구려. 쉬이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을 보니 강주성을 처리한 후의 상황까지 모두 염두에 두었다는 말.”
임백우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의 짐작대로 확실히 그러했다.
나는 장뢰에게 명했다.
“오늘 내로 강주성의 관리와 백성에게 고하십시오. 우리를 따를 자들은 짐을 싸라고. 그러나 1년이 되기 전에 다시 강주성을 밟을 수 있을 것이라 약속하십시오.”
“어차피 지키지도 못할 땅이니 복건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순리. 그러나 1년의 기한이라……. 허허허. 전하께서는 알면 알수록 노신이 모르는 기이한 일면이 있소. 그러나 그 자신감이 좋소.”
문득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 옛날 가후가 나에게 찾아와 둘이 함께라면 1년 안에 천하의 판도를 바꾸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의 말을 제대로 믿지 못했다. 반신반의하며 따랐다가 대계를 알게 되면서 얼마나 소름이 돋았던가.
아무리 경험과 연륜을 갖췄다고 해도 내가 가후같은 생각을 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러나 나는 가후가 없는 장점이 두 가지나 있었다. 인물을 알고 홀로 전장을 좌지우지할 힘이 있다.
“채구가 제게 목을 잘린 것을 목격한 관리들이 강주에 가만히 남아 있을 리 없습니다. 이후 채경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관리들은 시류에 따라 흔들리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설사 옳은 일이 아니더라도 당장 처자식을 부양해야 한다는 현실 때문에 눈을 감고 말지요. 그런 자들은 스스로 용기를 내지 못하지만, 누군가 용기를 내서 앞장서면 궂은 일은 해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복건은 비록 천하에 비하면 궁벽하고 좁은 땅이지만 가꾸기에 따라 천하의 으뜸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진바, 하급 관리들의 가세는 그 가능성을 더 빠르게 앞당겨 줄 수 있습니다. 그러하니 설사 개인 사정에 의해 이곳에 남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추후 언제든지 우리에게 합류해도 불이익이 없다는 안심을 주기 바랍니다.”
“옳거니!”
진여의가 추임새에 가까운 동의를 보였다. 그건 임백우나 장뢰, 맹재, 종고 등도 마찬가지였다.
“출중한 무장답지 않게 참으로 세심합니다. 그저 우리를 따라나설 자들만 안으려 했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과연 그 말이 옳습니다.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이 미덕이라 가르친 것은 조정이거늘 이제 하급 관리의 불의함을 따져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것이 옳으나 천하에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처럼 마땅히 새 술의 의미는 올바른 조정을 세워 거름망으로 삼아 폐해를 거른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이었는데 뜻밖에 반응이 좋았다. 종고 역시 감탄을 섞어 말했다.
“이는 불법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공안(公案)을 통해 불성을 자각하는 것이 올바른 선법임을 평소 생각하고 있었으나 다른 수행자들은 좌선(坐禪) 없는 선법은 선법이 아니라고 하여 참으로 어리둥절했습니다. 불타께서 세상의 고통을 안고자 하신 불법의 참된 의미를 따르자면 속진(俗塵)을 멀리하고 심산유곡의 청정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는 생활 그 자체에서 도리를 깨닫는 것이 진정 부처가 되는 길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밝음만 아는 사람은 어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속됨을 모르는 자가 어찌 속세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종고를 따르던 백성이 두 손을 모아 합장으로 화답했다. 집단의 무의식 행동은 뼈까지 유학자라던 임백우와 진여의마저 두 손을 모으게 할 정도였다.
나는 이들 앞에서 선언했다.
“1년입니다. 1년. 그 사이 천하는 지금과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사람은 기한 없는 기다림을 참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그래서 약속이란 것을 한다. 약속을 믿고 참게 되는 것이다. 의도치 않았다지만 결과적으로는 백성의 인내를 내가 선금으로 얻은 셈이었다.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배로 다 옮길 수 없어 일부는 육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육로의 가장 큰 걸림돌은 남창의 금군 4만이었다. 만약 그들이 나를 피해 백성을 도륙하는 일이라도 벌인다면 우리의 명망은 땅에 떨어질 것이 뻔했다. 그래서 선수를 쳐야 했다.
힘 좀 쓴다는 군웅을 모두 끌고 가 남창성 앞에 섰다. 그리고 선언했다. 만약 우리가 가는 길을 막는다면 대지주의 땅을 모조리 짓밟겠다고 선언했다.
남창성 밖 인근의 토지는 모두 대지주 소유였고, 부의 원천이었다. 워낙 쌓은 부가 많기에 토지를 훼손한다고 해서 그들이 금세 휘청거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골치 아프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복구가 시작되면 당장 그들의 땅을 소작하던 소작농의 1년 수입이 사라지는 셈이었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대지주에게 전가된다. 물론 무시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냥 지나가는 것을 묵인하기만 하면 자신들이 해코지 당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원래 가진 자일수록 남의 중병보다 자신의 손가락 가시를 더 아프게 여기게 때문이다. 나는 특별하다는 특권 의식의 발동이다.
채경이나 동관의 문책이 부담될 수 있겠지만, 남창의 대지주에게는 좋은 변명거리가 있다. 강주성이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패하고 일부 기병까지 이탈하여 적 편으로 돌아섰는데 자신들이라고 별수 있겠느냐는 이유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 성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고 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변명이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남창성은 묵인했다.
강주성을 우리가 점거하고 있었다면 이들은 육지의 섬이나 마찬가지라 저항을 시도할 수 있었겠지만, 우리가 애써 점령한 강주를 버려두고 복건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며 굳이 자극하지 않고 싶었을 것이다.
한세충이 이끄는 기병, 강주성의 관리, 백성에 이르기까지 물경 4만에 달하는 인원이 복건에 무사히 도착하자 나는 참았던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조조의 추격군에 쫓기며 수만의 형주 백성을 이끌었던 유비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 사이 내정을 책임졌던 장상영은 훌륭히 나라의 기틀을 세워놓았다. 유능한 인재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듯 그는 나를 따라 도착한 인재들의 배치까지 미리 계획해놓고 있었다.
군사 방면으로나 내정으로나 북송 최고의 인물들이 함께 있으니 내가 없어도 복건은 족히 수백 년은 유지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건주에서 다시 무리가 둘로 나뉘었다. 맹재 일행은 명주의 가업을 정리하고 채왕과 함께 포섭한 명사들을 모두 끌고 오는 역할이 있었고, 나는 천주의 대상 유염과 함께 천주로 향했다. 최종 목적지는 대리였다.
중간에 해남도를 들려 그곳의 군권을 접수했다. 그들은 중원의 소식이 어두워 정확한 사정을 모르던 상황이었기에 호연작과 동평이 관인을 내밀며 새로운 지휘자를 자청하자 그대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일대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유염까지 대동하고 있었기에 더 쉽게 속아 넘어갔다.
해남도에서 며칠을 머무르며 억울하게 유배를 당한 구법당 인사들을 포섭하고 첫 아내 자매의 묘소가 있는 묘족의 마을을 방문했다.
자매의 부모와 오빠는 예전보다 늙긴 했지만, 생활은 그대로였다. 내가 자매의 복수를 갚기 위해 이슬람 광신도들을 쫓은 이후로 대체로 해남도는 평안했다고 하여 외려 고맙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대리로 떠나기 전날, 나는 자매와 함께 올랐던 백화봉 정상에 올랐다.
내 석상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그때보다 약간의 이끼를 더 머금은 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그 석상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참으로 멀리 돌아왔다. 기억을 얻고 나서 내가 벌인 일은 치기의 연속이었다. 이미 어려운 과거를 경험한 바가 있으니 이제는 언제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과잉이었다. 모두를 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나만 위하고 있었다.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 길이 열린다고 믿었다.”
나는 10년간의 나를 떠올렸다.
그냥 초야에 묻혀 살며 방관자가 될 것인가? 세상을 변혁할 것인가를 고민했고, 세상에 적극관여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모두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인지 지금의 세상에 군림하는 절대자가 될 것인지도 고민했다.
“이상(理想)을……. 신념(信念)을……. 나는 너무 쉽게 생각했다.”
독선(獨善)이란 말이 있다.
반대로 독악(毒惡)이란 말은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욕망, 욕심에 의한 이기심, 악의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쉽게 타협하고 쉽게 뜻을 꺾으며 때를 기다린다. 약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나눌 줄도 안다. 그것이 더 큰 이득으로 돌아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기적인 결정임에도 모두가 이득을 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올바른 이상을 관철하고자 하는 신념에는 타협이 없다. 타협은 곧 선의의 부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대쪽같은 인물들이 이런 유형이다. 이들은 이기적인 악의를 무엇보다 경멸하며 이상을 그 우위에 두려고 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가치 외에 모든 신념은 타파하고 내리깔아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독선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독선이 되고 말았다. 무엇을 하든 내 뜻이 이루어진다는 자신감 자체가 올바른 이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초심으로…….”
나는 현대의 직장인 시절 초심으로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은 세월이 가면서 생각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에 따라 행동 양식이 변하게 된다. 초심으로라는 말은 그런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심의 의미란 결코 그런 것만이 아닐 것이다. 어릴 적 마음만이 초심이 아니다. 초심은 결코 젊은 날의 순수했던 열정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지금까지 겪은 삶을 통해 세상을 더 넓게 조망하고 그렇게 밝아진 이해를 바탕으로 하루하루 반복되는 삶에서 벗어나 작은 변화를 만들어간다.
한 말 시절의 나 역시 그러했다.
노숙을 만나 의견을 나누었을 때, 우리가 만능이 아님을 깨닫고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통해 가장 가까운 이를 먼저 챙기는 것에서부터 개혁은 시작된다고 합의했다.
내가 지금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찾는 것이 초심의 시작이었고, 왕도는 패도에 힘을 주고 패도는 왕도를 지킨다는 무척 단순하면서도 쉽게 와 닿는 강령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수많은 생각 끝에 내린 결론. 그것이 옳은 선택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른다.
나는 석상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아신아.”
석상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 역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다음 날이 되어서 나는 유염과 함께 대리로 가는 배에 올랐다. 유염이 따르는 이유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대리에 나를 비롯한 몇몇 일행을 내려주고 곧장 안남으로 갈 생각이었다.
중원에 강주에서 있었던 일이 소문 나면 본격적인 유민 유입이 시작될 것으로 보고 이 시기 쌀이 가장 풍족한 안남과의 교역에 힘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나라보다도 안남과의 교역에 신경을 쓰고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에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올해 숙종이 사망하는 해지만, 그것보다 백성에게 더 큰 일이 있다. 올해 가을부터 내년 가을까지. 북송은 홍수, 고려는 가뭄. 왜는 지진과 역병이 일어난다.”
천변(天變)을 겪으며 민심은 극도로 불안해지고 각국의 정세가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