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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01화 (201/257)

00201  (26) 일광천하(一匡天下)  =========================================================================

그것도 둘 다 병으로 죽었다. 오랜 고질인지 아니면 갑자기 얻은 병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정말로 공교롭지 않은가?

그러나 장뢰가 만약 그들의 병을 알고 일을 벌였다면 오랜 고질일 가능성이 컸다. 그것도 극히 극소수만 아는 비밀.

“동 대인이 너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왕연은 말 머리를 돌렸다. 이대로는 기세 싸움에서 밀릴 것 같으니 후퇴를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왕연을 따르는 자들은 몇 되지 않았다. 그만큼 맹재의 등장과 연이은 발언은 충격이었던 것이다.

주춤하던 그들을 잡기 위해 따로 노력을 보이지 않자 우왕좌왕하던 병사 중 열에 일곱은 왕연을 따랐다. 임충은 한숨을 쉬며 왕연을 따랐고, 왕진은 잠시 나를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이내 임충의 어깨를 두들기며 왕연을 쫓았다.

“동 대인? 환관 따위에게 대인이라니!”

떠나는 자들을 임백우가 비웃었다.

다시 공격해올지도 모를 적들을 상대로 서슴없이 도발하는 것을 보니 직언 상소의 양만으로 역사에 남을 만한 인물이기는 했다.

남은 병사들은 한세충만 바라보았다.

그들은 한세충의 열렬한 지지자들이었기에 한세충의 뜻에 따르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한참을 갈등하던 한세충이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내가 그대의 손을 잡으면 송의 역적이 되오. 충신으로 남고자 했지 역적이 되는 꿈을 꾼 적이 한 번도 없건만 불과 한나절 사이에 내 신념이 이리도 허망하게 무너질 줄 몰랐소. 한가지 물어봅시다.”

“얼마든지.”

“채왕 전하께서 기꺼이 명분이 되어주신다고 하나 어찌 되든 반란이오. 역적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잘 들었으니 성공하고 난 다음을 묻고 싶소. 그대의 편에 서면 북방의 요, 서하. 서방의 토번, 남방의 대리, 왜구의 위협에서 중원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겠소? 그대의 강한 힘이 온전하게 외적을 방어하는 일에만 쓰일 수 있겠느냐는 뜻이오. 만약 스스로 권좌에 오르기 위해 모두를 속이는 것이라면 차라리 나를 베고 가시오.”

현대에 이르러 한세충이 충정지사(忠情志士)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다운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송의 존속에 너무 치우쳐 있었다.

“자네의 말인즉슨 내가 권좌에 오르면 암군이 될 것이라 단언하는 모양새군. 그건 아마도 지금의 천자를 보면서 느낀 것이겠지. 천자가 정치를 못하면 신하가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일세.”

“그, 그건.”

천자가 밝은 정치를 하지 못할 것이라 가정을 내린 것은 경험에서 우러나는 것이었다. 그러함에도 신하들은 묵묵히 자신의 일에 충실히 매진하여 송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꿈꾸는 이상향보다 더 몽상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리석은 임금 밑에 제대로 된 신하가 계속 붙어 있을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뱀의 혀 같은 간신들이 득세할 뿐.

“솔직히 채왕 전하를 뵌 적이 없어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없네. 그러나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네. 임금이 백성을 버리면 백성은 임금을 버린다. 나 역시 백성의 한 사람일 뿐.”

그러자 지켜보던 맹재의 안색이 급변했다. 아마도 장뢰의 장담을 믿었던 모양이지만 채왕의 됨됨이에 따라 내가 언제든 칼을 거꾸로 들 수 있다는 말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천자는 무치(無恥)라 했다. 나는 그 말이 너무나 싫다. 자신 위에 아무도 없다는 오만함이기 때문이다. 하늘마저 인정하지 않는 그 오만함이 제국의 나태를 부르는 것이다. 누가 천자가 되어도 좋다. 그 공으로 나에게 소원을 묻는다면 나는 기꺼이 하나를 말할 것이다. 천자는 염치(廉恥)다. 그것을 천하에 고하고 사서에 남겨달라고 말이다. 그것은 내가 천자가 된다 하더라도 같다. 정치는 무치로 대변되는 오만한 자들의 경연장이 아니라 염치를 아는 자들의 겸손한 반성이어야 한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하하!”

대소로 침묵을 깬 사람은 다름 아닌 임백우였다. 그는 너무나 웃긴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고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신형을 휘청거릴 정도여서 진여의가 몸을 받쳐야만 했다.

그가 눈물까지 날 정도로 파안대소를 멈추지 않자 맹재가 제법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보게 덕옹(德翁, 임백우의 자)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가? 가산(柯山, 황뢰의 호) 선생의 절절한 요청으로 기꺼이 대업에 앞장서겠다고 나섰건만 양왕이 이리도 반골(反骨)인지는 미처 알지 못했군.”

임백우의 웃음이 뚝 그쳤다. 그는 지금까지 파안대소하던 사람답지 않게 정색하며 맹재를 바라보았다.

“반골? 지금 반골이라 말씀하시었소? 따지고 보면 채왕 전하를 옹립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모두 반골이올시다. 그건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면 역적 도당으로 사서에 기록되겠지요.”

“어허, 자네 말이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심하다니요. 나는 오늘에야 양왕을 만난 것을 크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복건에서 양왕이 벌인 일이 워낙 허무맹랑하여 그냥 넘긴 것을 보니 이 사람의 안목도 많이 흐려진 모양입니다. 천 년이 넘도록 천자는 무치라는 말을 반박하는 이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천자라면 때론 정상인으로서 할 수 없는 비정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천 년 중원의 역사 중 그 뜻을 이해한 천자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열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적지요. 그럼 다른 천자들은? 그들은 무치를 도덕도 인의도 무시하고 전횡할 수 있는 일종의 통행권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민 제국의 태조가 법과 제도는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고 천명하며 아무리 완벽한 법도 강산이 한 번 바뀌는 10년이 흘렀을 때 폐해를 찾고 보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태평성대일수록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도 했습니다. 그런 뜻으로 보자면 양왕의 지적은 실로 옳은 것입니다. 아니 이미 때늦은 감조차 있지요. 지금은 천자에게 무치가 아니라 염치가 요구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임백우는 말미에 이르러 정색을 풀고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맹재에게 말했다.

“양왕 스스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임금이 백성을 버리지 않는 한 백성은 임금을 버리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채왕 전하께서 염치를 아는 천자가 된다면 그것이 바로 백성을 위한 길이고 송을 지키는 길입니다.”

맹재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대꾸하지 않았다. 논쟁의 달인과 붙어보아야 자신에게 하등 유리할 것이 없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한세충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대의 말만 듣고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임 대인의 설명을 들으니 가슴이 뚫리는 기분을 받았다. 내가 바라는 송이 바로 그렇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인사치레로 남자끼리 손을 잡는 예의가 대중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전장에서는 자주 있었다. 손을 굳게 잡으면 목숨을 건 전우라는 뜻이었다.

“남창의 금군 4만은 동관의 지휘를 받을 것이다. 동관은 직속사병 10만을 제외하고도 강남 요지에 자리한 10만 이상의 금군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 가장 큰 난적이지만 그것만 넘으면 남은 것은 기껏해야 동경의 금군이다. 동경의 금군이 많다지만 실제로 싸울 수 있는 인원은 동관이 거느린 군대보다 적다. 서하와 요 국경에 배치된 병력을 빼고 싶겠지만 미치지 않은 이상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니…….”

한세충의 정황 설명에 모두 동의했다. 강남에서 마지막 남은 상대는 항주에 웅크리고 있는 동관이라 할 수 있었고, 실질적으로 송 군사 전력의 절반 이상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요나라 정벌을 위해 애써 모은 군대가 일개 환관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것이다. 만약 동관이 유능했다면 적절한 조치라 할 수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그는 돈 모으는 재주만 뛰어났지 군사방면으로는 무능했다.

그러함에도 그의 전공이 적지 않았던 것은 돈으로 유능한 무관을 영입하고 병사를 정예화시켰기 때문이다. 어쩌면 삼국지 시절 초기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군사적인 재능이 없다면 재물로 유능한 이를 끌어들이고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하는 것이 가장 최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항주를 지키겠다고 마음먹으면 지금 우리의 전력으로는 난공불락에 가까웠다. 동관의 풍족한 재물이 주는 매력에 빠진 장교와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맞서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20만이 넘는 병력을 다룰 수 있음에도 수성만 고집한다면 조정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동관이 항주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혹시 딴마음을 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겠지요. 우리는 당분간 복건의 기반을 탄탄히 하면서 동관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재물이 많다면 그 재물이 나올 구멍을 없애면 된다.

동관이 요나라를 치겠다며 사재까지 털어 거대한 군벌을 이뤘지만, 백성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한 것은 그의 자본이 백성의 기생자(寄生者)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귀족이 안 그렇겠느냐마는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애국을 강요하면서 수탈하는 것은 기생 자본 중에 가장 최악이다. 애국이 외려 반감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걷은 재물이 호의호식에도 쓰인다면 이미 불만은 하늘을 찌르게 된다.

‘질 들뢰즈(프랑스 철학자, 1925-1995)가 그랬지. 신자유주의는 기획하고 생산하는 자본의 역할을 기생자의 지위로 추락시켰다고. 자본은 아무 책임이 없다는 논리하에 초국적 자본들이 활개치고 대중은 그러한 자본에 정당한 개입이나 간섭할 권리를 잃는다. 그것은 곧 민주주의의 후퇴다.’

역사는 어찌도 이리 똑같은가?

송 시대의 중국은 세계 제일의 시장이었고, 과학의 선두 주자였으며 문화의 중흥지였다. 온갖 화려한 것은 중국에 다 있다는 말이 서양에 전해졌고, 개봉과 항주의 밤거리는 취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했다.

평화를 돈으로 주고 사는 전략은 자연 상업의 증대를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복건에만 머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요나라를 움직일 수만 있다면 동관이 항주에 계속 머물러 있지는 못할 터.”

채왕의 옹립이 대대적인 내부 반란으로 번지면 송 조정은 요나라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줘서라도 일단 북방의 급한 불을 끄고 내분을 진정시키려 할 것이다. 대대적인 농민 반란이 일면 항시 요와 서하에 사신을 보내 두둑한 공물을 약속하고 잠자코 있어 달라고 부탁한 전력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저들은 권세를 이용해 부를 쌓았고, 그것으로 힘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도의와 인의에 어긋난 욕망은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욕망을 칼로 삼아 그들을 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혹여 육적(六賊)의 내분을 꾀하려고 하시오? 그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관계를 갈라놓기란 쉽지 않소.”

자본이 발달한 사회는 상대적 빈곤이 커진다. 잉여 생산물의 순환으로 삶의 수준이 올라가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지만 욕구의 수준 또한 올라가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니 아무리 백성의 삶이 나아지더라도 가진 자들의 증대량을 따라잡을 수 없으므로 상대적 박탈감이 커진다. 물론 그 정도만 되어도 왕정에서 훌륭한 성군으로 칭송받는다. 대부분은 백성이 풀칠하는 것조차 다 가지려 하기에 참다못해 농민 봉기가 일어난다.

나는 애꿎은 백성의 피로 암군과 간신의 죄업을 치르기에는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다.

“중원에만 간신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작품 후기 ============================

200회 축하해셔서 감사합니다.

요 며칠 글을 쓰기 위해 사두었던 책들을 읽고 자료를 정리하느라 연재가 좀 늦었습니다. 삼국지 편이 이번 주에 네이버 장르소설 부분 1위를 차지한 것을 보고 참 여러가지 감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기대에 부응할 수있도록 더욱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제 글쓰기 성향상 장르소설 상의 재미나 호쾌함이 떨어져 호불호가 있는 것 잘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고견을 주시면 귀를 열어놓고 의견을 듣겠습니다.

끝으로 이 글을 쓰기 위해 참고한 책들을 알려달라고 하셔서 적자면 고려사나 송사, 자치통감, 수호전까지가 뼈대를 이해하는 주요한 참고서적이고 그에 더해 지엽적으로 나오는 송대 세금, 차 유통, 철학의 이해 같은 서적들이 더해집니다. 까페에는 참고서적을 올려놓곤하는데 아무래도 연재분에서는 글에 대한 의견이 더 많이 달리기를 원하는 까닭에 후기를 가급적 올리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그런데 궁금하신 점은 가급적 풀어드리려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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