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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98화 (198/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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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일광천하(一匡天下)

-한 번의 움직임으로 천하를 잡는다.

선봉 한세충이 척준경에게 내지른 창은 곧 전설의 시작이었다. 그와 함께 주장 왕연은 신묘한 기병 운용을 자랑했고, 출중한 금군 교두 2인이 자신들의 모든 힘을 다해 척준경을 공격했다.

그에 반해 척준경을 돕는 자는 오직 척준경 본인뿐이었다.

척준경이 격주(擊走, 부딪치는 것을 깨고 전진)하고 추급(追及, 뒤쫓음)하니 기세에 눌린 송 기병은 쟁주(爭走, 다투어 도망감)하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송의 장수들은 각기 근처에서 쟁주한 기병을 본보기로 도륙하니 마음을 고쳐먹은 기병들이 분격(奮擊)하여 척준경을 공격했다.

척준경이 굴하지 않고 10여 개의 기치(旗幟)를 빼앗아 단숨에 부러트렸다.

처음엔 무모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지만, 강주성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백성은 승패를 떠나 척준경이란 인물에게 매료되었다. 어쩌면 다음 날 자고 일어나면 흩어질 꿈같기도 하여 더욱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 마음이 더욱 짙어진 것은 왕연과 한세충이 잠시 기병의 숨을 고르며 두 번째 전투를 벌이려고 할 때였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아득해졌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며 가로막는 것은 모두 베어버릴 뿐이었다. 기가 질렸는지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창을 휘두르지만, 시늉만 하는 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왕연, 한세충, 왕진, 임충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1만의 기병이 고작 1명을 상대하지 못하고 물러났다는 소문이 천하에 퍼진다면 송의 위신은 바닥까지 떨어질 것이었으니 그것만은 목숨을 걸고 막으려고 했다.

그들은 전열을 가다듬었다.

100명 이상을 벤 순간부터 서서히 체력의 압박을 느끼고 있는 내 상황을 눈치챈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나를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살기로 드러났다.

나는 그제야 서늘한 바람을 느끼며 약간의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칼끝이 바닥을 짚자, 전투 중에 미처 흐를 곳을 찾지 못했던 피가 흘러내리며 바닥을 적셨다.

그때 강주성 동쪽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척 보기에도 군대는 아니었다. 백성의 행렬로 보였다.

그들 선두에는 젊은 스님이 있었다.

그 스님은 인세의 지옥도를 보며 뜻밖에 놀라지 않았다. 외려 담담하게 나와 송 군을 향해 합장하며 정체를 밝혔다.

“임제종(臨濟宗) 황룡파(黃龍派)의 종고(宗?)라고 합니다.”

이 자가 바로 간화선(看話禪)의 창시자 대혜종고였다.

나는 그가 언젠가 나를 찾아오리라 여겼지만 척 봐도 수천의 백성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타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니 전투가 이곳에서 일어날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니 우연인가?

“지금 이 자리가 어떠한지 모르는가? 이 자리는 역도를 처단하는 자리다. 역도를 아는 척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멸문지화를 면하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리고 뒤의 저들은 다 무엇이냐? 설마 역도를 도와 반란이라도 일으킬 셈인가!”

한세충이 나에게 보내는 살기는 실로 거대해서 일반인이라면 두려워해야 정상이건만 종고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외려 미소로 화답했다.

“반역은 누가 정하는 것입니까? 황상이 정하는 것입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감히 말장난하자는 것인가? 다 같이 죽고 싶다는 뜻이렷다!”

왕연까지 나서며 버럭 화를 냈고, 기병들은 창을 백성에게 돌리며 위세를 보였다. 종고를 따라온 백성은 애초부터 싸울 생각은 전혀 없었는지 다들 두려운 표정이 역력했다.

“천하에 육적(六賊)과 일우(一愚)를 모르는 자가 없습니다. 간신 채경이 육적의 그 첫째요, 뒤를 이어 동관(童貫), 주면(朱?), 양사성(梁師成), 이언(李彦), 왕보(王?)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육적에게 권력을 준 일우가 있습니다.”

“닥쳐라! 감히 일개 승려가 천자를 욕보이는 것이냐!”

왕연이 다시 크게 꾸짖었다. 종고가 정말 길거리의 흔한 행려승이었다면 앞뒤 보지 않고 베어버렸을 기세다. 그러나 강남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임제종 황룡파의 차기 수좌라는 것이 문제였다.

휘종은 진시황처럼 불로장생을 꿈꾸며 도교를 신봉했다. 그것도 전통적인 도교가 아니라 온갖 괴이한 주술과 진언으로 가득한 배도(背道)였다. 불교로서는 황제의 이런 태도가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처럼 무모하게 백성을 거느리고 나설 자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가 내 뜻을 관철하기 위해 기꺼이 일인군단으로 나선 것처럼 종고 역시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한 행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태학(太學)이 진동(陳東)과 구양철(歐陽澈)이라는 젊은 학사를 중심으로 의견을 모아 상소를 올린 것이 이미 천하에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당연히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강주 부윤이 그런 사실을 장군에게 알릴 리 없겠지요.”

그러고 보니 채구가 죽은 사실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몰랐다. 내가 성에서 나온 것을 보면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추측은 해도 단칼에 죽었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기꺼이 목숨을 걸고 진언한 2가지가 무엇인지 알려 드리지요. 첫째, 포면 대인의 죄는 누명에 의한 것인지 사해야 마땅하다. 둘째, 육적이 정사를 어지럽혀 천자에게 누를 끼치고 있으니 그들을 징치하고 문잠(文潛, 장뢰)와 천각(장상영)을 스승의 예로 맞아 정치를 맡기는 것이 옳다.”

송 군의 표정들이 볼만했다. 물론 종고의 이야기는 나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아마도 종고에게 개인적으로 연결된 정보라는 뜻일 것이다.

어쨌거나 육적을 처벌하라고 태학이 나섰다는 것은 실로 고무될만한 일이었다.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진동과 구양철은 북송 멸망의 원흉으로 육적을 꼽아 탄핵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휘종의 뒤를 이은 흠종 역시 간신들을 총애하며 지금은 내 휘하에 있는 이강 같은 이를 내치는 실수를 범했다.

“송이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천자가 본분을 찾아야 하고, 육적이 사라져야 합니다. 소승은 이 말을 강주 부윤에게 직접 하고 싶었습니다. 중생의 고달픔을 깊은 산 속 사찰에서 귀로만 들으며 세상과 멀어졌던 소승이 실로 어리석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소승의 죽음이 옳음을 되살릴 수 있다면 이는 바로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왕연이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 역시 육적의 존재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고, 언젠가 그들을 처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점차 나이를 먹고 가진 것이 많아지다 보니 점차 정의와는 멀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틀리지 않은 말을 옳다고 말할 정도로 염치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왕진도 임충도 마찬가지다.

한세충의 경우는 출세를 통해 자신의 뜻을 관철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 맥락에서 송이 살아야 자신들이 산다를 견지하고 육적은 단지 시대의 필요악 정도로 여기며 처리의 순서를 뒤로 두었을 뿐이라고, 그것이 대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육적은 필요악이 아니라 해충이었다. 외국의 공격은 내국인의 목표를 하나로 만들지만, 내부의 해충은 내국인을 분열시키고 서로 의심하게 한다.

나는 왕연을 향해 말했다.

“육적을 멸하고 천자가 본분을 다한다면 나는 기꺼이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겠다. 그리고 천자의 검이 되어주지.”

내 뜻이 이 자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은 안다. 단지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한 초석일 뿐이다.

저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번민이고 그 번민의 답은 각자가 내릴 수 있지만, 최소한 조언은 해줄 수 있었다.

“내가 바라는 천자는 이러하다!”

나는 크게 소리쳤다.

“백성의 근심을 즐겁게 해주는 자, 가난과 비천함을 부유와 귀함으로 바꿔주는 자, 외세와 내정의 횡포로부터 안전함을 줄 수 있는 자, 후대가 번성할 수 있도록 화육(化育)에 힘을 아끼지 않는 자!”

돌이켜보면 여러 생각이 오갔지만, 그 중심에는 항시 관중이 자리했다. 나는 하고많은 위인 중에 왜 관중에게 빠져들었을까 생각해본다.

당시 천하에 강대한 나라가 진과 제였다.

그러나 두 나라의 강대함이 만들어진 원인은 극명하게 달랐다.

진은 백성의 욕구를 억제하여 나라의 부를 채웠고, 제는 관리의 욕구를 억제하여 백성의 욕구를 채워주었다.

정책이 공정하여 바로 서면 사람은 몰려들기 마련이다. 권력자들도 입버릇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천하고 있는가?

지금의 송과 고려 시대는 내가 경험했던 현대와 정말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사회다. 경제와 문화가 나름 융성했지만, 그 과실은 극히 일부분이 독점하는 현실.

그것까지는 좋다. 더 심각한 것은 법을 지키면 오히려 손해를 보고, 법을 피해 이익을 챙기는 자를 부러워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차 옳은 말을 귓가로 듣되 실천하지 않고, 외려 속으로 냉소를 던지기 시작한다.

사회의 신뢰가 무너지면 국가의 존재 가치는 이미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천자의 본분을 지킬 수 있는 자, 네 앞에 나서라. 내가 그를 천자로 만들어주겠다. 내가 천하에 원하는 것은 다들 아는 것을 그저 행동에 옮기자는 것뿐이다. 그것이 어려운가? 옳은 말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릇된 말에는 충고를 아끼지 않으며, 공이 있으면 상을 주고, 죄가 있으면 벌을 준다. 그것이 그토록 어려우냔 말이다! 내가 이상한 것인가?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천지가 개벽하며 바뀌었는가? 대답해보라!”

아무도 대꾸하지도 나서는 자도 없었다.

역대의 훌륭한 제왕이나 재상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기존의 관습이나 예법에 구애받지 않고 그저 자신의 입에서 나온 기준을 자신에게 예외 없이 적용하는 엄격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엄격함이 곧 신뢰를 줄 수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신뢰가 정치의 근본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소리쳤다.

“채구는 이미 죽었다.”

개똥철학 같은 장광설(長廣舌) 뒤에 충격적인 현실 이야기가 들어가자 다소 풀어졌던 병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송이 채구의 목숨과 내 목숨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떨까? 당연히 채구의 목숨이 우위에 있을 것이다.

재상의 아들이자 재상의 자금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던 채구가 죽었다면 나를 죽여도 병사들은 이미 밑지는 장사였다.

왕연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속에는 설마 하는 기대감도 한 줄기 들어 있었다.

“이것으로 너희의 좌천은 예정되었다. 그래도 계속 헛된 애국으로 덤벼들겠다면 나는 기꺼이 받아주겠다. 그러나 다른 길도 있다. 나는 기꺼이 강주성을 너희에게 내어주겠다. 역도에 의해 채구가 죽고 포면 대인이 풀려났으나 대신 강주성의 재물을 지킨 것으로 해주지. 채구는 채경의 아홉 아들 중 겨우 하나일 뿐이다.”

채경에게 채구의 목숨이 귀한 것은 채구가 관리하고 있는 재물 때문이다. 채구가 죽었더라도 그는 가장 먼저 강주성의 곳간이 털리지 않았을까 확인할 것이 틀림없었다.

왕연에게 채구가 죽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그런데도 나는 곳간을 수습하지 않았다.

왕연은 갈등했다.

설사 강주성의 재물을 고스란히 지켰다고 해도 채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피할 길이 없다. 동관이 왕연을 지켜주기 위해 직접 나선다면 좌천을 피할 수 있겠지만 승승장구하던 경력에 오점이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게다가 압도적인 다수에게 당한 것도 아니고 극소수의 역도들에게 당했다고 알려질 것이 뻔한 상황에서 누가 그를 믿고 일군을 맡길 수 있을까?

왕연의 갈등을 지켜보며 한세충이 중얼거렸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자다. 강주성을 그냥 내어주겠다고?”

“필요가 없으니까.”

“강주성이 필요가 없다고? 내륙의 물산과 재화가 강주성으로 모이거늘, 이토록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니. 천하를 언제든지 농락할 수 있다고 믿는 무모함인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는 잘못 알고 있다. 아니 그대의 그런 생각 때문에 송에 망조가 든 것이다.”

“내 생각이 틀렸다고?”

도무지 뭐가 틀렸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한세충만큼이나 왕진, 임충도 심란해 보였다.

“민 제국의 융성기는 실로 찬란했지만 결국 멸망의 길을 걸은 것은 제도의 우위를 너무 믿고 후인들이 개혁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진 문공이 교훈이 될 수 있다. 그는 지금 제도를 개혁하는 근본 목적은 시간이 흘러 제도가 시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다시 개혁할 수 있는 다양한 인재가 공직에 오를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고 밝혔다. 이래도 모르겠나?”

도대체 이것이 앞서 내가 했던 말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때 종고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재물도 재화도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 송이 강주성을 다시 얻을지언정 부민의 마음은 이미 송을 떠났으니 어찌 영화를 바랍니까? 아무리 궁벽한 곳이라도 사람이 모여들면 그곳이 바로 나라이거늘. 험한 산악 지형에서 강국을 일군 진(晉)의 예를 든 것이 바로 그 때문이겠군요.”

종고는 내 뜻을 정확히 알았다.

천하의 패자가 되어 평화를 일구려던 관중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애써 얻은 타국의 땅을 모두 되돌려주고 외적의 침입에는 앞장을 섰다. 그러자 제후들은 그를 자연스레 구심점으로 여겼다.

“나라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병기와 군마, 산더미 같은 재물이 필요하다. 송은 그 모든 것을 다 가졌음에도 왜 요와 서하를 이기지 못하는가? 진 문공의 신하들이 왜 자신들은 기름진 중원이 아니라 척박한 황토 고원에 자리 잡고 있느냐고 왕 앞에서 한탄하자 왕이 한 마디를 남겼다. 나는 오직 인재가 필요할 뿐이다. 그것이 무슨 뜻이겠는가? 사람이다. 사람이 먼저다.”

나는 왕연 등을 향해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것이 나의 왕도다. 패도는 왕도를 지키고, 왕도는 패도에 힘을 보탠다. 그래서 칼을 잡았다. 그대들이 칼을 잡은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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