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7 (25) 진(眞) 만인적(萬人敵) =========================================================================
천하를 향한 일갈.
누군가는 사자후(獅子吼)라고 부르는 형태일 것이다.
어떤 이름을 붙이든 지금의 나는 어떠한 기교도 의식하지 않은 본연의 외침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왔던 모든 여정 속에서 끊임없이 방황했던 정체성에 마침표를 찍는 결의이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나를 짓밟을 기세로 달리던 흉포한 말들이 두 발을 치켜들며 매우 놀랐다. 말 못지않게 병사들 역시 천지를 가득 메운 맹수의 울부짖음에 공포가 서렸다.
그리고 소리가 사라졌을 때, 하늘과 땅 사이에 오롯이 서 있는 자는 나 하나뿐이었다.
폭풍이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감도는 적막함이 사위(四圍)로 쓰러진 자들을 애도할 뿐이었다.
내가 그들을 향해 걷기 시작하자 마치 사자의 위엄에 눌린 양 떼처럼 감히 도망칠 생각도 못하고 굳어 있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왕진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미 사람의 벽을 넘었구나. 전설의 이선이 이러할까.”
나는 그를 스치며 말했다.
“틀렸습니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저 준경, 준경이란 인간일 뿐입니다.”
사람의 일은 사람이 해결하는 법이다.
신의 이름을 빌려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신이 직접 강림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신의 명령을 전하는 자 역시 사람이다.
셀 수 없는 기병의 숲을 헤치며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누구도 내 앞길을 막지 않았다. 그리고 그 끝에 주장 왕연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만의 기병은 일국을 도모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다. 앞섰던 왕진과 임충의 선봉과 달리 왕연의 본대는 소리의 여파에서 멀쩡했지만 아무것도 못하고 쓰러지는 선봉을 보며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눈이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소리쳤다.
“요는 기병만 30만에 달한다. 그들이 일시에 공격해온다면 송 기병 1만으로 당적(當敵)할 수 있겠는가?”
침묵은 오래갔다.
설사 답하고 싶어도 지금의 분위기에서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서하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개개인이 질 좋은 창과 방패로 무장하여 항시 전쟁에 대비한다. 날카로운 긴 창과 철 방패로 무장한 12만의 병사를 송 기병 1만으로 당적할 수 있겠는가?”
*서하는 여자도 병사로 징발하여 전투에 나섰다.
역시나 대답하는 자는 없었다.
그러다 하나둘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고 서서히 현실로 돌아오고 있는지 고삐와 창을 잡은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기게 해주겠다.”
의외의 발언에 놀라는 자들이 속출했다.
“천자는 천명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는 자이다. 천명이 천자에게 주어지는 까닭은 유덕(有德)한 자이기 때문이다. 천자가 천자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덕을 잃어버리고 민심이 등을 돌린다면 하늘은 기꺼이 다른 유덕한 자에게 명령을 내린다.”
“탕무방벌(湯武放伐)!”
왕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탕무방벌이란 은의 탕왕이 하의 폭군 걸왕을 내치고, 주의 무왕이 은의 폭군 주왕을 공격한 일을 의미한다. 즉, 걸왕과 주왕을 공격하여 정권을 탈취한 일을 비도덕적 정권은 응징할 수 있다는 선례로 작용한 것이다. 맹자는 전국을 유세하며 탕무방벌이 역성혁명의 정당함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다.
“제(齊)의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신하가 임금을 죽여도 옳은 것이냐 물었다. 그러자 맹자가 답하길 ‘의(義)를 해치는 자는 잔(殘)이라 하고, 인(仁)을 해치는 자는 적(賊, 도둑)이라 하여, 천자와 귀족이 제 의무를 다한다면 잔적지인(殘賊之人)에 오를 턱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주 무왕이 은 주왕을 죽인 것은 임금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저 잔악한 도적 한 명을 처리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송 군은 숨을 죽이고 내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위민의식(爲民意識)이다. 백성을 위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고 공자, 맹자, 순자 등의 제자백가가 이구동성으로 내린 결론이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한, 민, 당, 송에 이르기까지 어떤 왕도 나라의 시작에 위민이 있음을 이야기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지금 송에 위민은 살아 있는가! 살아 있다고 여기는 자는 내 앞으로 나서라!”
나서는 자는 없었다. 침묵에 비례해 기이한 열기가 주위에 피어오를 뿐이었다.
그때 간신히 쥐어짜듯 말하는 이가 나타났다.
“사마광이 맹자를 가리켜 잔인한 사람(殘人)이라 평했다. 민본은 분명히 중요한 가치이지만 탕왕과 무왕 같은 도덕적으로 완결된 인격의 소유자만이 역성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도무지 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평한 것이다. 지금 그대는 스스로 탕왕과 무왕의 인격을 지녔다고 말하는 것인가?”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한세충이 비틀거리며 기병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마광은 군신의 구분은 천지에 피할 곳이 없다는 말로 역성혁명을 부정했다. 어느 왕조든 자신들을 대신하는 새로운 왕조가 생기는 것을 원하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당금의 천자는 외세의 험난함에 맞서 능력 있는 신하를 중용하기보다 외려 간신들의 입김에 휘말려 정사를 멀리하고 자신의 고상한 취미에만 빠져 백성의 도탄을 가중시켰다. 임금이 신하를 토개(土芥, 바닥에 떨어진 겨자씨)처럼 여기면 신하는 임금을 따를 수 없다고 말한 공자나, 충언을 반복해서 간(諫)해도 듣지 않으면 임금을 갈아 치우는 것(易立)이 옳다고 말한 맹자의 말씀은 이상의 험난함이나 현실의 자잘함을 탓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 결과로 말미암아 백성의 고난을 덜어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어찌 모르는가?”
“말은 번지르르 하지만 결국 민의를 대변하여 그대가 천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그럼 그대는 왜 군문에 들었는가? 천자를 지키기 위한 야망인가?”
“천자가 송이다!”
한세충이 버럭 화를 냈다.
“그대가 강한 것을 알겠다. 그러나 그대의 반란으로 송이 도탄에 빠지고 북방의 대적들이 그 틈을 타서 남하할 것이다. 난세의 시작이다. 지금보다 백성의 괴로움은 더 커질 것이다. 그것을 그대가 어찌 책임지겠는가! 집이 부실하다면 수리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이지 집을 새로 짓겠다며 애먼 가족을 풍진노숙(風塵露宿) 시키는 것이 옳다는 말인가!”
“집이 부실하니 수리를 하면 된다? 그것이 나와 너의 견해차이다. 백성은 이미 집이 주는 혜택을 받지 못하고 풍진노숙을 하는 것이 지금이다. 부실한 집이나마 비를 피하고 추위를 피할 여건이 된다면 당연히 수리해야겠지. 그러나 집을 뛰쳐나와 천하를 전전하며 도적이 된 자는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요와 서하라는 맹수를 막아주지 못하고 먹이만 던져 연명하는 무너진 집이 바로 송이 아닌가? 외우(外憂)도 막지 못하고 내환(內患)도 다스리지 못한다. 백성의 고혈로 영화(榮華)를 누리는 것에만 급급한 자들과 그런 자들을 편애하여 권력을 쥐여준 천자가 기둥을 다 갉아먹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것이 지금이다. 장천각이 나를 선택한 이유이고 포면 대인이 나를 선택한 이유이다.”
“웃기지 마라! 천하에 충정이 가득한 의협지사가 부지기수로 널려 있다. 지금 우리를 이긴다 해도 언제까지 그 위세가 갈 것 같은가! 스스로 개민왕을 닮겠다고 했지! 복건의 작은 왕국은 불과 100년도 채 존재하지 못했다.”
“100년을 버티지 못하고 복건의 민나라가 망한 것이 바로 민의(民意)다. 하늘의 의지는 무언(無言)으로 전해지고, 민심은 곧 천심이란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송은 지금 민의를 듣고 있는가!”
한세충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가치관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만 들지 않았지 한 판의 진검 승부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천하에 고한다! 천자는 패도를 걷는 자이다!”
“민의를 들먹이더니 한다는 말이 결국 서초패왕의 흉내인가!”
한세충과 내 대화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왕연이 잘 걸렸다고 생각했는지 크게 꾸짖었다. 그 사이 나를 둘러싼 원이 조금씩 좁혀졌다. 어느새 왕진과 임충 역시 그 대열에 나타나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언제든 공격 명령을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나는 팔짱을 꼈다. 포위망이 조금도 두렵지 않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신하는 왕도를 지향한다.”
“그것이 무슨…….”
한세충 역시 발끈하려고 했지만 왕연이 먼저 선수를 치면서 가쁜 호흡만 내뱉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다음 말을 이어가니 분노 속에서 궁금함이 떠올랐다.
“사람은 마땅히 인의를 따라야 한다. 그것이 여러 사람이 평안하게 사는 도리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득도 추구해야 한다.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를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인의를 따르며 이득을 천시할 필요가 없고, 이득을 추구하면서 인의를 쓸데없는 이상으로 치부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왕도와 패도는 하나의 본(本)을 지향한다. 근원은 백성이다.”
민주주의가 현대에 이르러 가장 최신의 이론이라고 하지만 이미 고대 그리스나 중국에서 주류로 통했던 경험이 있다. 요는 그것을 이후의 권력가들이 싫어하여 배척하고 묻어버리려 했다는 데 있었다.
정권의 시작은 항시 역성혁명이었으며 정권을 잡으면 역성혁명을 터부시하기 시작한다. 이건 어느 왕조나 공통된 절차였다. 현대에 대한민국이 정부를 수립하고 이후 역사를 보더라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법칙에 가깝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다는 것은 기득권을 뒤바꾸는 변혁이다. 기존 기득권의 반발을 두려워하여 하기 어려웠던 부조리의 개선이 이루어지고 고였던 경제는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기득권은 공고화되고 사회는 정체되기 시작한다. 그럼 다시 사회는 새로운 탄생을 준비한다.
역사는 그렇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런 역사에서 우리가 중시하는 관점은 변혁이 그저 인물과 기득권만 바꾼 것에 쏠려 있을까? 단언하지만 결코 아니다. 한 시대를 관통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시되었는 지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지금까지 숱한 경험의 탐구를 통해 인의와 이익, 왕도와 패도가 새롭게 통합하는 시대상을 제시하고 싶었다.
옛 시대는 먹고 사는 것만 해결되면 인의라는 관습에 약간의 법치로 사회가 굴러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대량 생산이 이상하지 않은 기초 산업화와 그렇게 축적된 잉여물의 순환과 자본의 축적이 문화를 촉진했다. 그렇게 송은 역사상 기술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가장 화려한 시대를 열었다. 그것은 즉, 먹고 사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가치들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옛 왕도를 지키자고 주장하는 것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그건 내 생각의 일대 변화이기도 했다. 초와 민 제국 시대는 시대상에 맞춰 제시한 제도와 이론들이 그저 좋은 왕, 좋은 왕조가 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지금도 그와 같은 목적을 이루고자 했다면 율가를 강령으로 삼아 내 과거나 광무제 유수의 길을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진정 내가 할 일은 끝난 것일까? 과거의 나처럼 100년 정도의 평화를 지켜주고, 이후는 후인에게 맡기는 것은 그저 과거의 답습일 뿐이다. 민의 재림이라는 이야기는 들을 수 있을지언정 스스로 과거보다 진보했다고 칭할 수는 없다.
“왕도는 패도를 배제했고, 패도는 왕도를 배제했다. 내가 가는 길은 누구도 걷지 않은 길이다. 왕도는 패도를 만나서 왕도답게 되고, 패도는 왕도를 만나서 패도답게 된다.”
“요설이다! 그런 것이 가능했다면 역대의 현인(賢人)과 현사(賢師)가 논하지 않았을 까닭이 없다!”
한세충은 힘을 더 준다면 눈의 실핏줄이 터질 기세였다.
물론 그런 주장이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기 시작한 것은 가까운 미래다. 북송이 남송으로 바뀌는 시대적 상황에서 식자들은 북송의 패망이 주는 교훈을 연구하며 앞으로 나아갈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뿐, 그것을 실제로 이해하고 움직이는 군주는 청 시대 강희, 옹정, 건륭 정도였다.
“의리쌍행(義利雙行) 왕패병용(王覇?用)!”
인의와 이득이 함께 가고, 왕도와 패도가 함께 쓰인다.
나는 아득히 먼 과거,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그때 혼몽 속에서 관중을 만났던 것을 떠올렸다. 가후는 관중이 나도 인식할 수 없는 내면의 분신이라고 했다.
“도가(道家)가 현실에서 멀어지지 않고, 유가(儒家)의 예와 인이 현실을 인정하며 중용을 이루고, 법가(法家)의 비인(非人)에 융통성을 심으며, 종횡가(縱橫家)의 언변에 신의를 담는다. 상가(商家)가 이득에 집착하지 않으며, 병가(兵家)는 호전적이기보다 평화를 추구하며, 농가(農家)는 증산(增産)을 통한 나눔을 고민한다.”
관중은 그것이 바로 화쟁의 뜻이라며 나를 깨우쳐줬다. 당시 나는 그것이 진정한 왕도의 진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보니 화쟁의 뜻을 반만 이해한 것이었다. 영혼과 육신이 합쳐져야 사람이라고 하는 것처럼 왕도와 패도는 애초에 둘이 떨어질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하니 내 뜻에 반하는 자.”
나는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잠시 쉬고 있던 힘줄이 맥동(脈動)하기 시작했다.
“덤벼라.”
이것이 나의 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