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5 (25) 진(眞) 만인적(萬人敵) =========================================================================
“서, 설마 역모에 동참할 생각이냐…….”
포면의 따가운 눈빛을 외면하며 채구는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채구의 의도를 모르는 사람이 여기에 어디 있을까? 포면이 중인환시(衆人環視)리에 채구를 꾸짖는 것은 분명하게 선을 긋고 그 의도를 천하에 밝히기 위함일 것이다.
“포 숙부(포청천)께서는 나이가 차자 귀족들의 관행대로 음서로 관직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음서로 출사하는 것은 오매불망 과거를 기다리며 묵묵히 공부하고 있는 문인들에 대한 실례라 하여 스스로 과거를 치러 장원이 되었다. 나 역시 숙부의 전례를 받아들여 음서를 거부하고 과거를 치렀다. 문재(文才)가 좋지 않아 숙부처럼 장원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문인과 백성에게 나라는 사람이 관직에 올라도 좋은지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채 부윤(府尹)은 어떠한가? 부윤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문인과 백성에게 그대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증명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충과 효에 밝아 충효비를 백성이 스스로 세워주었던가? 아니면 공덕비를 세워주던가?”
채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과거를 통해 출사하는 관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음서를 통하거나 뇌물을 바쳐 관직을 얻는 것을 고위 관료로 가는 길이라 여겼다. 아버지가 고관이거나 부자라면 골치 아프게 공부할 필요가 없으니 자연히 머릿속에 공자나 맹자의 말씀이 들어 있을 까닭이 없다.
“포 숙부가 동경(개봉)의 부윤이 되었을 때, 속리(屬吏)들은 관행대로 부윤에게 들어오는 민원을 뇌물의 액수에 따라 포 숙부에게 걸러 보고했다. 포 숙부께서 그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하여 관련된 속리들을 내쫓고, 부윤 밖에 커다란 북을 설치하였다. 누구든 자신에게 할 말에게 있다면 직접 북을 쳐서 알리라는 뜻이었다. 고관대작을 가리지 않고 추상같이 법을 집행하였고 북방의 마적이 백성을 괴롭히는 것을 막았다. 동파 선생께서 포 숙부를 가리켜 청관(淸官) 포공(包公)이라며 관리의 표상(表象)이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런 포 가의 당대 가주다. 포 숙부의 청명(淸名)을 더럽히지 않고자 미욱한 가운데 끊임없이 노력하여 간신히 욕됨을 면했다. 그런데 그대와 그대의 아비는 무엇을 했는가?”
포면의 서릿발 같은 추궁은 포청천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것 같은 박력을 느꼈다. 채구뿐 아니라 동헌(東軒)을 지켜보고 있는 모든 사람이 그 기세에 숨을 죽였다.
“그대의 아비는 문인(文人)으로는 내가 따라갈 수 없는 경지에 올랐다. 서예는 동파와 산곡(황정견)이 사라진 중원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한다. 그는 한, 민, 당의 서예 명인들의 필법을 더 뛰어나게 묘사할 줄 알고 일곱 걸음을 채 걷기도 전에 내가 열흘 밤낮을 고민해야 간신히 운이라도 뗄 수 있는 시를 완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료(臣僚)로서 그는 무능하면서 욕심까지 많은 간신이 되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있어서는 안 될 곳에 계속 발을 디딘 결과다. 아비가 그러하면 자식이라도 정견(正見)을 지녀야 하거늘 권세를 믿고 외려 한 술 더 떴다.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수백 명의 적에게 패한 장수는 이치를 따지자면 당연히 사형해도 모자랄 지경이거늘 온갖 궤변을 늘어놓으며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미뤘다.”
“이잇…….”
포면이 채경까지 싸잡아서 비난하자 채구는 버럭 할 기세였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지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그러다 도저히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는지 결국 말문을 열었다.
“송의 관리 중 관행에 따르지 않는 자들이 얼마나 있는가? 그리도 홀로 고고한 척하고 싶다면 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면 그뿐이 아닌가? 처음부터 역도의 편에 설 작정이었으면서 나를 그 핑곗거리로 삼고자 하는 것쯤은 다 꿰뚫었다. 사로잡힌 나를 두고 의기양양하며 이제야 속에 담았던 질책을 한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네놈이 그리도 고고했다면 진즉 황궁에서 목숨을 걸고 간했어야 할 내용이다. 여기가 아니란 말이다!”
채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만큼이나 포면의 얼굴 역시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이런 비판이 언젠가 나올 줄 그는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비자는 나라가 망하게 하는 오두(五?, 다섯 벌레)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타국과 전쟁을 하는 와중에 능력 없는 신하가 공명심으로 설치거나 병역을 회피하는 행위, 둘째는 나라의 재정뿐 아니라 백성의 의식(衣食)까지 거덜 내는 무위도식(無爲徒食)의 관리, 셋째는 이권을 빌미로 백성을 괴롭히는 악덕 상인, 넷째는 권세에 빌붙어 백성을 괴롭히는 무뢰배, 다섯째는 이윤을 위해 정상적인 제품을 허술하게 만드는 장인이라고 했다. 지금 중원의 식자들은 하나같이 너희 부자와 동관, 고구를 오두의 수괴로 칭하고 있다. 천자는 백성을 대신해 신하를 돌보고 신하는 백성을 돌본다고 했다. 천자가 백성을 대신하는 신하를 알아보지 못하니 신하는 백성을 알아보지 않는다. 이는 이미 망국의 조짐이다.”
포면의 지적을 듣던 군웅 몇몇이 찔끔했다. 백성을 괴롭히는 무뢰배가 자신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여 가슴이 뜨끔했던 것이다. 그런 반응은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면 개심의 가능성은 있다.
반면 채구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포면을 향해 삿대질하며 말했다.
“네놈이 천자까지 능멸하려 하느냐? 이제 정녕 역신의 면모를 드러냈구나.”
천자가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을 대놓고 비판했으니 이제 포면은 대역죄인이라고 칭해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그래서 채구는 그것을 빌미로 자신에게 동조할 무리를 부르고자 했지만, 이 상황에서 누구도 선뜻 응하는 자는 없었다. 그것은 채구의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록조차 찾기 어려운 하, 은, 주, 고대 삼국을 빼면 중원의 이상향은 민 제국으로의 회귀라고 할 수 있다. 민 태조는 나라를 세우면서 백성을 하늘같이 떠받들겠다는 포부를 밝혀 민심을 얻었다. 그런 민 제국조차도 100년의 태평성대가 지나자 한, 당과 다를 바 없는 제국의 부조리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후 백성이 그렇게 떠받들어진 역사는 한순간도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왕과 귀족들은 백성을 위한다는 말을 한순간도 입에서 떼지 않았다. 그래야 재부(財富)가 따라왔으니까. 송의 실수는 그것이었다. 학문을 권장했으나 권력을 쥐려는 방편이었을 따름이다. 인격의 도야(陶冶)는 이미 옛말이 되었다. 농사짓는 고달픔을 모르는 자들이 관헌이 되었고, 전쟁의 위험을 모르는 자들이 병권을 잡으며 실리(實利)를 얻었다. 법을 세워야 할 자들이 남을 등쳐먹는 것을 지식이라며 자식을 훈육한다. 세월이 흐르자 편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은 늘었으며 힘들게 노동하는 자들은 줄었다. 그러하니 나라는 가난해지고 망국으로 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일 것이다. 그러하니 나라가 무너지도록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은 우리가 아닌 바로 너 같은 자들이다.”
채구의 전신이 떨렸다. 반박하고 싶지만 무슨 말을 꺼내놓더라도 다시 면박만 당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불과 반 시진 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자신의 아성(牙城)이었음을 생각하면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로서는 어서 빨리 왕연의 기병대가 오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채구가 더는 대꾸할 생각을 버리자 포면은 중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포 숙부는 동경의 부윤으로 재임 시 천자에게 삼 작두를 하사받았다. 개 작두는 백성의 죄를 다스리는 것이고, 호 작두는 귀족과 관리, 용 작두는 황족과 왕족을 다스릴 수 있는 무상의 권위가 있었다. 숙부의 뒤를 이어 내가 동경의 부윤이 되면서 삼 작두를 내려받았다. 이를 거둘 수 있는 사람은 천자뿐으로 아직 거둘 것을 명받지 못했다.”
삼 작두의 권위는 그야말로 암행어사의 마패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보다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채경, 동관, 고구 등이 왜 포면의 삼 작두를 뺏지 않았을까? 어쩌면 포청천의 판박이인 포면이 삼 작두를 아무렇게나 휘두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들은 황제를 끼고 있어 삼 작두에 절대 당하지 않을 것이니 차라리 정적이 아닌 포면에게 맡겨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까? 삼 작두는 포 가의 청렴과 강직을 대변하는 신물로 널리 알려졌으니 말이다.
“숙부께서는 당시 전횡을 일삼던 장 귀인의 인척 장요좌(張堯佐)를 탄핵하고 용 작두의 권위로 처벌하겠다고 밝히자, 깜짝 놀란 대신들이 장요좌를 용서해 것을 청했다. 그러나 숙부께서는 망설임 없이 그를 법의 심판대에 세웠다. 나는 그런 숙부를 닮고자 했으면서도 지금껏 권력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이야기지만 그렇게 함으로 내가 백성을 더 돌볼 수 있다면 그것이 백성에게 득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만이었다. 작은 악을 잡고자 큰 악을 방관한 것과 같다. 늦었지만 나는 이제 삼 작두의 권위를 제대로 세우고자 한다.”
채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포청천도 용 작두나 호 작두는 그리 많이 쓰지 않았다. 그만큼 증거나 증언을 잡기가 어렵고 더 큰 피해를 볼 것을 염려한 피해자들이 소를 취하하는 예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모의 무기로 삼 작두를 휘두르겠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삼 작두를 포청천에게 내린 인종은 송 역대 황제 중 가장 검소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가진 성군이었다. 인종이 포청천에게 삼 작두를 내리면서 설사 천자라 하더라도 잘잘못이 있다면 심판하라고 교지를 내렸다. 그런 인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포청천은 과감하게 간신들을 쳐낼 수 있었다.
지금의 천자가 삼 작두를 회수하겠다고 명령을 내리고자 했다면 포면이 옥에 갇히기 전에 해야 했다. 용 작두의 권위가 발동하고 그것을 황족과 왕족이 거부하면 성군으로 절절하게 칭송하고 있는 인종을 모독하는 셈이 된다. 최소한 법의 심판대로는 나와야 한다는 말이었다.
반면 법으로 한다는 말에 채구의 표정엔 안도가 흘렀다. 어쩌니저쩌니해도 죽은 천자가 산 천자의 권위를 이길 수 없는 노릇이다. 자신의 아버지와 동조자들이 천자를 감싸고 있는 이상 큰 고초를 겪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외려 포면을 철저히 파멸시킬 것이다.
그러다 포면의 품속에서 나온 철권(鐵券)을 보고 채구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건!”
놀란 것은 채구 뿐만 아니라 나도 있었다. 포면이 치켜든 철권이 어디서 많이 보았던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곧 생각이 났다. 10년 전 해남도에서 소동파가 지니고 있던 물건이었다. 천자가 내린 철권은 역모죄도 사면해준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권위를 지녔다. 나라의 허락 없이 동남아시아로 가야 할 상황에서 여차하면 그 철권으로 죄를 갚겠다고 소동파가 말한 적이 있었다.
결국, 그 철권이 포면의 품에서 나왔다는 것은 소동파가 죽을 때까지 그 철권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만약 철권의 권위를 부정하면 역대에 걸쳐 철권을 받은 사대부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동파 선생께서는 험한 유배 생활에도 철권을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철권을 사용해 유배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값어치 있는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이제야 철권을 내게 물려주신 이유를 알겠다. 나는 신종(神宗)께서 약속하신 철권의 권위를 빌어 삼 작두를 내려주신 인종의 뜻을 완수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천하에 고하며 여기에 모인 백성을 그 증인으로 삼고자 한다.”
채구는 눈을 감았다. 나는 그의 내심을 짐작했다. 더 듣기도 괴로울뿐더러 속으로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을 것이다.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왕연을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채구의 그런 간절함이 통했는지 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선봉 기병들이 나타났습니다!”
내 생각보다 한 식경 정도는 빨랐다. 이 정도라면 요시치카와 공손승이 이끄는 창병의 방진을 전혀 공략하지 않고, 왕연의 본대를 찾을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강주성까지 최대한 일찍 도착하는 것만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포면에게 말했다.
“만인적(萬人敵)을 알고 계십니까?”
포면은 그저 잠자코 있었다. 적이 올 것을 예상했다는 듯 내가 칼을 잡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니 말한 의도가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만 명의 적을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장수를 말합니다. 바꿔말하면 전장의 승패를 바꿀 수 있는 장수라고도 칭할 수 있겠지요. 항우나 관우, 장비 같은 이들이 그렇게 불렸습니다.”
나는 칼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이 허공에 치솟았다. 채구였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이렇게 죽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포 대인의 숙부인 포청천이 권력자들을 상대로 법을 집행하려 했을 때, 그들은 갖은 방법을 써서 무마하려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포청천을 암살하려는 자들도 있었지요. 그런 포청천의 곁에는 당대에 출중한 무예 실력과 협의로 이름 높던 남협이 있었습니다. 이제 포 대인이 천하 만민을 위해 기꺼이 삼 작두를 쓸 것을 결심하셨고 저 역시 당대의 남협이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썰물처럼 백성 사이에 길이 생겼다.
“천하는 오늘 진짜 만인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 작품 후기 ============================
남협 전조라고 표기했다가 그냥 남협으로 수정하였습니다. 포청천은 당시에 마적과 서하 기병등과 전투를 벌이는 지휘관의 역할도 했는데 그 수하들에 대한 내용은 정말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포면과 인연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으로 이해해주시면 되겠습니다.